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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일부 비판자들은 같은 시기 고도성장을 이룩한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사례를 들며, ‘한강의 기적’을 동아시아 전체가 공유했던 일종의 ‘발전 공식’ 혹은 ‘냉전 질서가 부여한 수동적 수혜’의 산물 정도로 축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박 대통령이 다른 세 나라와 달리 얼마나 척박한 정치적·물리적 환경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견인했는지를 간과한 피상적인 주장일 뿐이다. 널리 주목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네 마리 용’ 가운데 복수 정당이 실제로 존재하고, 야당이 정치적 발언 공간과 의회 진출을 허용받았던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주변국 지도자들이 ‘정치적 무풍지대’에서 무소불위로 정책을 집행하는 효율을 구가할 때, 박 대통령은 야당의 견제와 상시적인 정치적 저항이 수반되는 고난도의 통치 환경을 뚫고 전진해야 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국가별 실상을 대조해 보면 그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싱가포르: 1968년 총선 이후 1981년까지 리콴유의 ‘인민행동당(PAP)’이 의회의 모든 의석을 독점했다. 대안 세력의 진입 자체가 봉쇄된 일당 체제였다.

대만: 장제스의 ‘국민당(KMT)’ 지배 아래 명목상의 야당들은 존재했으나, 이들은 국민당의 노선을 따르는 위성정당에 불과했다. 1949년 계엄 선포 이후 1987년 장징궈(장제스의 아들)의 계엄 해제 전까지 야당의 창당은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홍콩: 선거 제도 자체가 아예 부재했다. 1985년 이전까지 입법회는 영국 총독이 직접 임명하는 자문 기구적 구조로 운영되었을 뿐이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결정적 지표는, 위 세 나라가 감당해야 했던 경제발전 과제의 '규모'와 '난도' 자체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한국 영토의 1% 안팎에 불과한 도시국가이자 항만·금융 특화의 소규모 경제였고, 대만 역시 국토와 인구 면에서 한국과는 체급 자체가 다른 섬 국가였다. 반면 대한민국은 수천만 명의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국가 단위'의 거대 경제체제였으며, 특정 분야의 특화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복합적인 산업구조를 밑바닥부터 설계해야 하는 전방위적 국가 재건 과업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이 남긴 상처의 깊이가 달랐다. 싱가포르·홍콩·대만도 전쟁 피해를 완전히 비껴간 것은 아니었으나, 한반도처럼 국토 전역이 장기간 전장으로 전락해 산업·사회 인프라가 총체적으로 붕괴하는 수준의 ‘전면적 초토화’는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주변국 지도자들이 경쟁적 야당 정치가 배제된 일원적 통치 환경과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존속된 산업 기반 위에서 정책 집행의 효율을 누릴 때, 박정희 대통령은 치열한 정당 간 정쟁과 전후 복구라는 이중의 고난을 짊어지고 국가 재건의 과업을 완수해 낸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는 수많은 장기 권력자들과 그 성격과 성취의 차원을 달리하며, 불가능에 가까웠던 국가 개조를 최단기간에 완수해 낸 독보적인 ‘국가건설의 설계자’로서 그 역사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본문 출처: 이재훈, 『박정희는 역사이다』, 380~38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