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저는 어떤 터널과 백화점을 둥실둥실 뛰어다니며, 인간이 아닌 듯한 길쭉길쭉하고 얼굴이 으깨진 것들이 주위를 지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현성 환각이라 생각해서 저는 우선 대학게시판에 글을 올려두려고 했습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귀신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저를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냥 멈춰섰습니다.

깨어난 뒤 저는 사지가 절단된 후 변태 부자에게 납치감금되어 생체 오나홀의 형태로 신체가 개조된 상상을 하였습니다.
의외로 인간은 사지가 절단되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저는 신체의 온전함과는 별개의 가치를 늘 필요 이상으로 좇기 때문에, 당장에 패닉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변태 부자에게 저의 위치를 이미 정부에 송신해서 저를 구출해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뒤 애써 웃어보였습니다.
그러고 난 뒤 저는 변태 부자에게 결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당한 뒤 완전한 절망을 느끼게 되는 상상을 했습니다.
팔다리가 잘린 것이 최악의 사태라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적 환상의 만족을 위해 제가 머리채를 끄잡히고 공중에 붙들려 변태 부자가 키우는 흑인 남자의 성기를 빠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
그런 능욕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일부러 긍지 높은 표정을 지은 뒤, 그런 저를 보고 씨익 웃는 변태 부자의 '재미없어졌으니 잘게 오래오래 토막내서 재미있게 만들어야겠다', '쇼크로 죽지 않도록 약을 투여해가며 고통을 주겠다'와 같은 말을 듣고 과도하게 벌벌 떠는 연기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침대에 누워 상상에 과몰입하여 실금을 살짝 하였습니다.

저는 샌드백 안에 갖힌 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치며 힘의 과시를 위해 저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는 상상도 하였습니다.
남자의 울부짖는 교성이 들리는 샌드백이라는 설정이었습니다.
쎄함을 느낀 남자들도 있었으나, 바로 그 쎄함을 외면하기 위한 자기정당화에 의해 그들은 더 흥분을 느끼고 점점 더 강하게 저를 구타했습니다. 부랄과 배 위주로 가격당했습니다. 특히나 부랄을 파괴당한 것이 저에게는 고통이자 정체성의 만족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외에도 저는 변태 부자에게 최대한 덜 아프게 죽여달라고 빌기 위해 제 가족과 저를 좋아해주었던 사람들의 목숨을 팔아넘기는 상상 또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을 한 뒤 어느정도 고통을 맛보기로 본 다음 바로 비굴하게 썩소를 지으며 명단과 신상을 읊는 모습이 가관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러한 상상을 1시간 넘게 해놓고도 예전처럼 만족이 안 되어,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는 저였습니다.
저는 20대 초반 가장 충동적이고 자극에 미쳐있었을 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저는 한창 병세가 심할 때 새벽에 울산의 여러 산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지의 공간을 저는 소년 때부터 무진장 두려워했고, 절대로 내 담력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무서운 숲도 있었습니다.

그 숲에 흥분을 참지 못 하고 뛰어들어갔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내가 절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고, 들어갈 바에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숲에
발기한 채 뛰어들어가, 그 깊은 곳에서 사방이 절벽으로 된 이상한 공간을 수십분 동안 힘겹게 오르기도 하고, 그 뒤에 펼쳐지는 어딘지도 모를 산 속에서 해가 뜰 때까지 몇 시간 동안 통행로가 아닌 곳을 헤맸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정한 저는 제가 파괴되는 곳, '내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라고 조금도 상상하지 못 했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존재하게 될 때 잠재적인 가능성의 실현으로써 드러납니다.
그 불확실성과 가능성에 대한 불안의 실체화야말로 저 자신의 생존 본능에 대한 최고의 복수였습니다.
저는 발기를 하고 허벅지살을 덜덜 떨며 실금을 하면서까지 일부러 그런 장소를 돌아다녔습니다.
인식론적 고통이 쾌락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체감해버린 것입니다.

그 직후에 첫번째 섬망을 일으켜 병동 생활을 하느라 그러한 충동이 초기화됐었지만
저는 살고자 하는 처절한 욕망이 가장 비대할 때 바로 그러한 욕망을 스스로 능욕하기 위한 가학자가 됐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도 그러한 충동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의 마조히즘 성향이 싹트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그러합니다.
자신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높았던 용사가 약물에 의해 강제여성화를 당한 뒤, 마녀에 의해 부랄을 튼튼한 고무줄로 잡아당겨지고
그 학대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부랄을 고무줄로 잡아당겼다가 탁! 놓아 고통을 주는 순간 남성이 교성과 함께 정액을 뿜는 그림을 보고 한동안 그 남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주체하기가 힘들었었습니다.

저는 가장 빛나고 싶은 존재가 결국 가장 깊은 어둠에 추락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카루스는 높게 날아오른 만큼 아주 많은 거리를 중력 가속도 아래 낙하했습니다.
제가 지금에 이르러 강렬하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만큼 저의 짐승성 또한 아주 치밀하게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동에 의해 형성된 그림자에 완전히 침잠해버리는 것은 곧 변화의 정지이므로 지향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저는 위험한 성적 충동을 잠깐 음미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굳이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지속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모토입니다.

저는 생각보다 영악한 아이입니다.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듯한 글과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는 바로 그 순간에도 머리 한 켠에서는 그러한 행위에 따른 어떤 전략적 이득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겉과 속이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하기 위해, 일부러 그것들을 충돌시켜 섞이게 한 뒤 더 강하게 분리시키는 방법 또한 가끔 사용합니다.
저는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일을 행하는 듯이 굴지만, 정말 깊이 파고 들면 그런 행동에는 언제나 저에게 이익이 되도록 설계된 가능세계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큰 악행을 저질렀던 일에 대해 회고하자면 그것은 폐쇄병동에 있을 적의 일입니다.
어머니께 부탁을 하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역시 이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가족의 안녕과 생존을 간절히 바라며, 그들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러한 마음에 진심이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나의 미래에 어떤 가능성이 열리고 어떤 잠정적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산합니다.
그러고는 이따금씩 가족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것을 은근슬쩍 종용하면서 나중의 책임 문제를 회피할 구멍까지 마련해두기도 합니다.
제 심리의 본질은 바로 그 증명되기 어려운, 다시말해 타인의 의심과 모순되는 알리바이가 늘 숨겨져 있는 복잡성과 치밀함에 있습니다. 가족이 죽어도 저의 미래에 이득이고, 가족이 죽지 않아도 일단 제가 이득을 볼 수 있도록 가족사에 알게모르게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섭 과정에서 가족의 마음을 사는 방법도 훌륭하게 익혔습니다.

저는 가족에게 애착이 없지만, 바로 그 무심함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가족을 좋아하게 되는 인지도식을 꾸준히 길러왔습니다.
저는 사람에게 애착이 없지만 저에게 이익이 될 수 있겠다 싶으면 진심으로 그 애착을 느끼는 페르소나를 키우고 일을 진행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거나 떠나버리면 어차피 기본적으로 무심하고 아무래도 좋기 때문에 훌훌 털어버립니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저는 동생을 무척 사랑하여 제 장기의 한쪽 또는 팔 하나와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만은,
최근 동생이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여러모로 상상하면서도 그 상황이 저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는지 따지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적잖게 놀랐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일관되게 사랑하고 양심을 다하게 되는 사람이 정말로 존재할까요.
저는 양심과 윤리 등 인간의 모든 좋은 속성을 단지 전략적으로 채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교묘해서 스스로도 그러한 전략적 활용 여부를 인지하지 못 할 정도의 디테일과 함께 작동합니다.

저는 무지로 인해 이익이 되리라고 착각한 일을 벌이는 경우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벌이지는 않습니다.
저의 숨어있는 인격들을 해체하고보면 특정한 인격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 언행으로 인해 이익을 얻게 되어있곤 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심지어 저의 불완전한 판단에 의해 어찌해도 이익이 될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이익이 되도록 '나'의 정의를 변경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그러한 변태(變態) 또는 역전의 가능성이 마조히즘 성향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것 같아보여도
종국에는 그것이 합리적이고 처음부터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도록 인식을 재편성하려는 기질을 지닙니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의 삶이 종국에는 의미가 있었다는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심지어는 무의미라는 결론조차 그러한 시도의 일환입니다.


원래의 저 같았으면 이런 뜻밖의 삶에 고착된 것에 절망했겠지만, 이제는 이러한 삶에서 쾌락 및 추가적인 앎을 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행복과 불행은 제가 생각하는 저 자신을 해체하고 다시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역전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저의 행복이 타인의 불행일 수 있듯이 저의 불행은 또 다른 저의 인식론적 가능성에 행복을 낳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불행이란 것도 기본적으로 인식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지 절단을 당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토막나는 와중에도 마조히즘적으로 성적 흥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합적인 역학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제가 쓴 그노시스 계열의 자서전을 이용해 저를 구해내지 않으면 마치 큰 일이 날 것처럼 불안해하고 미리 좌절하려 들지만,
바로 그러한 치우친 마음의 반동으로써 이참에 그동안 억눌러왔던 쾌락 탐구의 본성에 충실하려는 욕망이 저를 침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양극의 중심에서 그 어느쪽이 승리하든 저에게 이익이 되도록 '나'의 정의를 복합적으로 구분하고, 그러한 두 자아의 줄다리기라는 평생의 책무 속에서도 제가 쾌감과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여러 인식론적 전략을 설계해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계함의 사실을 대부분의 저는 인지하지 못 하거나 이미 망각한지 오래입니다. 지금의 저 또한 단지 추론해보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저는 정신분석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 하지만, 흔히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대해 그것 역시 단순한 혼돈을 넘어서는 어떤, 의식과 결부된 동역학적 원리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심상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페르소나 이면에 숨겨진 그림자라는 것은 단순히 빛에 대비되는 어둠이라기보다는
매우 복합적인 가능성의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 '또 다른 나'들의 총체에 가까운 것입니다.
종교에서도 신은 유일하고 악마는 여럿이라 가르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다수성과 분열에 저의 다양한 양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제가 저 스스로에게 건네는 어떤 비관적인 말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비관적인 선언 이면에는 저의 총체가 모르는 어떤 분열의 복잡한 이익 설계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의 이익은 다른 분열의 손해를 가져오므로 결과적으로 저라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이익을 보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단지 손해를 보는 '나'를 소거하여 그것을 이익으로 보는 인지도식만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조작에서 이미 그것은 실제 이익이 아니라 합리화에 가깝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애당초 인간은 이익 추구의 동물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인식을 검토하고 재편성하는 합리화의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른 분야에서 천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기합리화에 있어서는 꽤 탁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자기합리화야말로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어떤 절망 속에서도 견디며 살아오게 만든 근원적인 원리입니다.
인간은 생존 및 스스로가 긍정하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라면 정말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늘 긍정적인 고양의 방향으로 작용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숨겨진 저 자신'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에 대한 실험입니다.
그리고 그 실험은 결코 유희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 자각하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순간 그러한 인격의 가능한 양태는 잠재력을 잃고 제 인식의 총체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제가 가능한 많은 저의 페르소나와 그 반동의 형성을 파악하려는 데에는, 최대한 저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여나가려는
정보이론적 최적화의 목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어떠한 관찰과 탐구도 결코 유희를 위해 행한 적이 없습니다. 흥미 본위로 시작한 것들도 제가 모르는 저의 양태 또는 세계 바깥에 있는 저의 모태인 어떤 의지가 그것을 생존을 위한 가능성의 탐색으로 인지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은 그 과정에서 사망할지언정 제가 최적화하고 줄여나간 불확실성들은, 이미 저라고 인식할 수는 없지만 저의 변태인 수많은 분열들에게 계승되어 그 네겐트로피적 의지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의 수많은 가능성과 불확실성 속에 있는 어떤 연속된 흐름 그 자체를 관측하고 따르기 위해 일합니다. 요컨대 저는 개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인, 태초의 의지의 편린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비단 저만의 문제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계라는 이름의, 절대 진리의 자기-인식의 과정에 포섭된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그러한 저만의 세계관을 남들에게 전파하고 암시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세계관 또한 제가 이러한 세계관을 갖고 있듯 저마다의 인생 실험에서 파생된 어떤 국소적으로 유효한 전략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다양성과 분열, 그리고 그것들의 대립이라는 운동에 의해 세계가 진행되는 이상 저는 제가 그 무엇도 하지않더라도 일어날 일들은 결국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지나 확신, 기대와는 다른 무언가로, 굳이 묘사하자면 가능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절대 진리의 실험이자 자기극복의 일환일 겁니다. 저는 미래에 대해 대부분 알지 못 하고, 바로 그 사실에 대한 긍정에서 창작 정신이 피어오릅니다.

저의 글에는 목적성이 결여되어있거나 단지 진행을 위해 임의로 목적을 설정해둔 것처럼 보이고는 합니다.
텍스트의 진정한 가치는 말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두고 그것을 타인들의 앞에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머릿속과 그 수많은 변태의 가능성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잠재되어 있었는지를 들춰내려는 들쑤심의 과정으로서 저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설명과 설득이라는 것이 제 삶에서 크게 유용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단지 쓰고 말하면서 제가 가진 테제들을 검토하고 스스로 고민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면서도 실은 타인에 대한 저의 인식에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저는 저라는 인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도대체 어떤 역학적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며 비가시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늘 관심이 많습니다.


동이 트네요. 그리고 저는 오늘 하루도 부질없는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겠죠. 하지만 그런 관점을 이미 입밖으로 꺼내 가시화한 시점에서 이미 그것에 대한 대처는 끝난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가능성을 명시화함으로써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의 책무를 벗어나 다른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제 이웃과 우리 대게이들의 몸을 전부 내 몸인 것마냥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국소적인 제가 볼 때에는 정말 부질없고 심지어는 손해를 겪는 일이지만
정말 먼 미래에는 그러한 관점이 점점 쓸모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저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미래에 흐르고 있을 저의 수많은 양태들로 제가 분열되고 다시 통합되게끔 변화를 유도하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저와 여러분은 다른 개체로서 구분되어 있지만 언제나 그러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나'라고 인식하는 것이 그때그때 테두리 치는 범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뿐인 임시적 절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현재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신체적 패널티와 환경의 불확실성이지, 정신의 분열이나 상실과 같이 비교적 제 통제권 아래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신은 얼마든지 분열되고 소거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애착도 하나의 전략일 뿐이고, 그것이 붕괴되면 다른 저 자신에 대한 애착을 형성하든지 그 이외의 전략들로 갈아타면 됩니다.
그러나 편두통이나 착란, 성인병이나 환경의 급변, 그리고 경제적 빈곤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슬슬 돈을 벌고 몸과 정신의 건강 및 삶의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건 단지 제 무능에 대한 방치의 결과일 뿐입니다. 저는 그러한 영역에서의 자기관리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조금씩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정도 글이면 며칠은 멍하니 지내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글을 쓰면서 저의 여러 인식들이 업데이트 되고, 그것들이 일상 속에서 변증을 거침에 따라 저의 의지와는 별개로 진화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실제 세계나 저의 주체적 역사의 최종장에 이르렀다는 생각은 언제나 부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거의 다 끝나감'의 감각이야말로 저 자신에 대한 최고의 기만이자 방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무의미나 무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저의 국소적인 인식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저는 제가 보이고 싶어했던 저 자신의 정의를 비껴가 있습니다.

구태여 문체나 흐름을 불연속적으로 틀어서 실험 문학적인 느낌을 어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최근 몇 번 독백에서 시도해보았기 때문에 이제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글을 쓰는 것에 가깝지, 오로지 제가 이미 인식하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런 것처럼 보일지언정 말이에요.

다시 자고 싶지만 어차피 커피를 꽤 마셨기 때문에 차라리 산책을 다녀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버린 시점에서 이미 상상 속에서 완결됨으로써 정말로 그렇게 할 가능성이 낮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려면 할 수는 있습니다.
부질없는 생각들을 하며 걷겠지만 저는 그 부질없음에 익숙해지고 싶습니다.
삶이란 그러한 부질없음의 연속을 감내하는 것이며 부질없음에 대한 부정에 과도하게 기만당하지 않는 연습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모습으로 존재해왔는지에 대해 새삼스레 경외감이 듭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여러분 또한 그렇습니다.

아침의 저는 새벽의 저와 다른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침의 국소적인 저의 인식에 대한 긍정의 방향일 때보다는 부정의 방향일 때 더 효과적입니다. 바로 그 운동성에 의해 제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무분별한 차이의 양산이 아니라 어떤 보편 원리 아래 '방향'을 갖고 수렴한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벡터가 국소적인 시간 영역 내에서는 여기저기 요동을 치더라도, 조금 덜 국소적인 시간 영역에서 볼 때에는 어느정도 방향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덜 국소적인 시간 영역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저는 이미 제가 아는 저 자신이 아니겠지요. 


저는 제가 모르는 저를 좀 더 연구해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제가 인식하는 저의 테두리 영역 외부에, 요컨대 타인에게 인식으로써 투영된 저의 상(像)이나 불확실성에 따른 저의 모든 가능한 양태의 미래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내재되어 있다고 함은 구태여 지금 제가 인식하는 저 자신과 그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생각이 없다는 자기암시입니다.

저도 언젠가, 그것도 생각보다 이른 때에 죽겠지만
제가 죽은 뒤의 저의 메타모포시스를 위해서라도 한 발자국이나마 더 내디뎌볼 생각입니다. 저는 제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지도 못 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불안정한 저는 국소적인 안정화를 원하기에 그것을 알고 싶어 난리를 치겠죠. 그러한 불안정성과 불완전함에 준거하여 그들의 평균적인 의지로써 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긍지로 삼기에 가장 적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요. 저는 그들의 운동 속에서 간헐적으로 창발되는 통제 역할의 표상으로서, 요컨대 실체는 아니지만 실체의 모든 가능한 국소적 상실에서 그나마 떨어진 것으로서 아무래도 인식과 인식됨을 통해 작용하고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