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적과 미국본토에서 싸운적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일본은 미국을 실제로 침공했었고 미군은 1년이나 싸워서 겨우 빼았긴 땅을 회복합니다.
이것을 아투섬 전투라고 합니다.
아투섬은 알라스카에 있습니다.


아투섬은 노무노무 추운곳으로 얼음과 산으로 뒤덮힌 섬입니다.
평지는 거의 없어서 해변정도가 거주가 어렵게 가능한 섬으로
크기는 한국의 제주도 절반정도 크기에 해당되는 섬입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뒤 6개월후인 1942년 6월7일
일본군은 북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미군의 해상 항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일본 북부군 소속 301 독립보병대대 500여명이 아투섬과 키스카을 침공합니다.




당시 아투섬에는 20여명의 원주민과 미국인 2명정도가 머물러 있었는데
원주민은 풀어주었지만 남편분은 그자리에서 사살되고
부인분은 60세가 넘는 나이이셨지만, 일본 본토에 포로로 잡혀가셨습니다.
두분다 원주민 교육을 위해 와 계셨던 교육자 분들이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진지 강화를 위해 2500명 정도가 아투섬과 키스카섬에 주둔하고 포대등을 설치하여 임무를 수행합니다.









당시 미국은 언론통제국으로 이미 진주만 폭격으로 충격을 받고 있었던 미국국민들이
이제 미국본토까지 침공당했으니 다 죽겠생겼다란 공포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하여
해당 사건을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것으로 보도했습니다.


당시 미군은 미드웨이전이 미국이 죽고 사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그것에 더 집중해 있었지만
미국 본토 자체가 침공당해 적에게 빼았겼다란 "상징적" 사건이 그렇게 반가운 소식은 아니였습니다.
미군은 이에 1년정도가 지난 1943년 5월 날씨가 조금 좋아진 틈을 타
미제7보병사단 17연대가 아투섬 상륙작전을 펼칩니다.
대규모 폭격을 먼저하고 해군포격의 엄호를 받으면서 상륙한섬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땅은 화산재로 유황도와 비슷한 부드러운 파우더와 같은 지형이었고 그 위에 눈이 내려 있어서
트럭이나 차량이 땅에 내리면 눈과 뒤섞이면서 고운 진흙으로 변해 늪처럼 빠져버렸고
사람도 그 위를 지나가면 발이 허벅지 까지 푹푹 빠졌다고 합니다.
상륙할수있는 지형은 얼마되지를 않아 비좁은 해변가에 겨우 연대병력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고
더군다나 안개가 거의 매일 짙게 깔려 있었서
바로 앞도 보이지를 않는데 어디선가 포격과 총격이 미군들을 사살했고
5월인데도 밤이되면 너무 추워서 동사하는 군인들이 생겼습니다.
미군들은 일본군은 보이지 않는데 날씨와 안개가 우리를 죽인다며 불평하였다고 합니다.




아투섬은 지금도 이렇게 안개가 짙게 깔린다고 합니다. 산 위에서 공격을 하면
도대체 누가 어디에서 자신을 향해 쏘는지 알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군들은 이런 지형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안개가 덮힌 산위에 매복을 하며 2600명의 병력으로 방어를 합니다.
먼저 일본군들은 미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상륙한 미군들의 비좁은 해변을 포격으로 공격하기도 하였고
또 산에 숨어서 미군들을 저격과 기습을 하는 방어를 사용합니다.








전투는 고통스러웠습니다.
미군은 이런 혹독한 추위와 산악전에 익숙하지 않았고
부드러운 땅에 상륙한 미군과 딱딱한 산에서 아래를 내다보고 공격하는 일본군은
아무리 병력차가 나도 미군에게 너무도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짤은 일본군 저격병의 공격을 받고 얼음산을 미끄러져 떨어지는 미군의 그림입니다.]
미군은 박격포와 포병을 이용하여 일본군이 매복하였을것이라고 예측되는 지역에 포격을 가한후
수색을 해가며 일본군들을 사살하며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차량은 계속 얼음 진흙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 포를 끌어가며 이동을 했다고 합니다.
미군의 피해도 많았습니다. 숨어있는 스나이퍼들의 저격과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 오자 일본군들의 피해도 늘기 시작했습니다.




부상병이 점점 늘어가고 병력이 줄어들면서 미군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본토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일본은 항공모함 즈아카쿠, 쇼카쿠, 준요, 하요 그리고 전함 무사시, 콩고, 하루나
순양함 모가미, 코마노, 스즈야, 토네, 치쿠마, 아가노, 오요도
그리고 구축함 11척을 도코에 집결하여 지원 공격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미군의 잠수함들이 지속적으로 지원함을 끊어버리고 통신기지도 파괴되면서
연락이 끊어진채 아투섬에 같힌 일본군들은 본토의 지원이 이제는 없다라고 믿게 됩니다.

지휘관 야마사키 아스요 대령은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최후의 결전을 지시합니다. 살아남은 병력들에게 총검을 장착하게 하고
부상당한 군인도 무기가 없는 군인도 스키폴대에 창을 매달거나 나무작대기를 깎아 죽창을 만들게 했습니다.
찌를수있는 모든것을 준비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들에게는 수류탄을 나눠 줬습니다.
1943년 5월 29일
야마사키는 천여명 병력 제일 앞에서 이들을 이끌고 새벽 몰래 해안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캠프로 접근합니다.
미군에게 들키지 않게 산위에서 해변까지 밤새 포복으로 접근한 야마사키는
미군캠프 바로 앞에서 새벽 3시 30분경 반자이 돌격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큰 반자이 돌격으로 미군 캠프의 외곽 방어선은 돌파되었고
후방 야전병원과 보급구역까지 도달했습니다.
야마사키는 미군이 포대를 설치하기 위해 작업중이던 언덕위를 공격하던중 총에 맞아 일본도를 손에 쥔채로 쓰러져 사망합니다.
맨 앞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서 지휘관이 사망한것을 목격한 일본군들은 분노의 돌격을 하며 치열한 백병전을 합니다.

너무도 짙은 안개 때문은 경비병들은 천여명의 일본군 기습을 전혀 감지 하지 못했었고
일부 미군만 아침식사준비를 하고 있어 이렇게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많이 올거라고 믿지 않고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도 백병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고
해변쪽에 있던 상륙정에서는 폭스홀 언덕을 넘는 일본군들을 향해 기관포를 난사했으며
살아서 해변의 폭스홀을 넘어온 일본군들은 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반자이 돌격은 태평양전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가장 오래 지속된 공격으로
9시간 넘게 전투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본군 포로들 짤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멸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은 겨우 29명이었고
2650명의 수비군은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미군 매장팀들은 2351명을 매장했다고 발표했지만,
2주간 함대와 야포 포격으로 죽은 일본군 사망자는 훨씬 많을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포로중에는 장교는 한명도 없었으며
산속에 있던 일본군 벙커안에서는 수류탄으로 자폭한 일본군 부상병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전투가 끝난후 일본군 방어선 넘어 섬 뒤쪽에는 놀랍게도 일본군 잠수함 기지가 있었고
항구와 보급을 위한 철도 그리고 상당규모의 정착촌도 완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함께 침공당했던 키스카섬에서는 아튜섬 방어를 위해 일본군은 철수해 있었으나
이 사실을 모르고 상륙한 미군과 카나다군들은 서로 적으로 오인하고 사격하여 사상자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미군은 이 전투로 549명의 전사자
1100명의 부상
동상등의 피해자 수천명이 발생하였으며
일본군은 2650여명이 사망한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미국본토침공에 대항하여 영토를 회복한 전투로 미국에게는 상징적인 전투였지만
미군전쟁역사상 가장 큰 반자이 웨이브를 미군이 훌륭하게 방어한 전투로도 기록됩니다.
이 전투를 주도한 보병 7사단은 이 경험으로 이후 오키나와 상륙전에도 해병보다 더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해 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튜섬 전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미국인들도 자신의 영토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가 치열한 전투끝에 회복했다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전쟁사 최대 반자이 공격을 9시간동안 막아낸 미군의 기록은 사라지지 않을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