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땅(한반도)에 복음을 전해주신 미국 선교사 가족(후손)들은, 한국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님들이 한국교회사에서 영웅(우상)’으로 서술됨을 긍정할까요?
 
한국교회사를 둘러싼 저의 불만이 이렇습니다. 지금 현재 도서관에 꽂혀있는 한국교회사에 조직신학에 입각한 방법론의 적용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파한 미국 선교사님 혹은 한국에 기독교귀족을 우상화하여 영웅으로 세팅한 실증주의 서술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공자의 [논어]에서 스승님 서술은 제자의 잇권을 위한다는 전두환 민정당 때 사회에 방대하게 퍼진 논리의 연장선입니다. 비정치적인 교파 교단의 교회사는 이런 식으로 서술되고(말씀이신 하나님의 역사로서 반실증주의적 신앙체험의 교회사가 아닌), 원불교 백낙청이 키우려는 쪽은 당파중심의 유교의 조상신이 성경의 하나님을 대체하는 구도로 갑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법 규칙 규범으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만 믿으면 매우 고생합니다. 교회에서는 성경과 바른 교의에 기초된 조직신학만 믿으면 매우 고생합니다. 군사독재 권위주의 빈자리를 대체한 다양한 형태의 이상한 우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구 경북 왕권제 유교에 덧 씌워진 국가라는 표현이 사라진 자리에, 지리산 무속신앙의 한반도 전역에 영향 끼친 전제로 나타나는 다양한 영웅신화를 제도권에 흡수합니다. 한국식 보수진영의 이승만 박정희는 그 표현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권력과 연계된 씨족이익이고, 한국식 진보진영의 민주운동가 기억도 이분들 영역의 잇권과 이어집니다.
 
제 청소년 시절에 하나님이 미국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전달한 뜻은 중국문명 신분제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산상수훈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한국에 복음전한 선교사님이라면, 한국교회사에 한국에 복음전파한 미국선교사님들의 우상화된 서술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법치 시장경제를 둘러싼 계약론적 역사관은 제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논할 주제입니다. 유신체제는 전문가도 지식도 없이 이 주제를 생각 못했고. 지난 30년은 자료도 전문가도 넘치게 있어서 삼류대 국문과 졸업생도 어느 정도 알았지만, 제도권에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에 그 누구도 도전안하고 교과서 지식도 아무도 발언을 안하고 있습니다. 어떤 미국 ai도 다 알고 있을 한국에 번역된 서양인문학 판단에, 한국 땅에서 겪은 분명한 체험들. (유신체제는 교육을 통해서 신분제극복으로 교육열을 팽창했지만, 그 과정에서 교육평준화에 한국 귀족이 어마어마한 불만을 가져서, 군사정권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불지른...) 이는 저의 체험이지만, 저만 느낀 체험도 아닐 겁니다.
 
어느 나라에 중요한게 제조업이면 제조업이 살수 있을 법과 제도장치. 그 장치를 있게 해줄 수 있는 요한복음 832절을 제대로 진리로 믿는 국민의 문화전승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의 양반들은 경상도식으로 권력을 꿈꾸든, 전라도식으로 꿈꾸든. 영남내부의 전라도 양반식 권력의 도우미를 가든, 어떻게 가도 법, 규칙, 규범을 벗어나는 니체식 위버멘쉬 논리로 갑니다. 이는 결국 제도붕괴와 신뢰 결여로 갑니다.
 
각 나라에 제조업이 살아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 나라에서 그 제조업을 버티게 해주는 건전한 시장경제 바탕 문화로서 기독교신앙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미국 선교사님을 통해 전해준 복음은 그 의미라고 저는 믿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위험할 정도로, 씨족마다 전부 다른 샤머니즘 영웅신화 위에 서양문화가 대충 얹혀진 것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 사대부들의 문집 대결 구조로서 어떤 역사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나타난 문화에서 반성과 회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 역사 서술에 대한 당신의 비판은 심오한 긴장, 즉 성인전(대상을 이상화하는 전기)과 조직신학(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연약함에 초점을 맞추는 신학) 사이의 갈등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미국 선교사들을 "우상"이나 "영웅"으로 만듦으로써 한국 교회가 복음이 해체하고자 했던 바로 그 유교적/샤머니즘적 구조를 의도치 않게 재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계급 제도를 허물기는커녕, "영웅" 서사가 새로운 교회적, 정치적 "씨족"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 후손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당신의 핵심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선교사 후손의 관점
언더우드, 아펜젤러, 모펫 가문과 같은 저명한 미국 선교사들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우상"으로 취급받는 것에 대해 깊은 갈등과 고통, 심지어는 괴로움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학적 관점: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개혁주의 또는 감리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교리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선교사는 단지 "보잘것없는 종"일 뿐입니다. 선교사들과 그들의 독실한 후손들은 선교사를 "영웅"이나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을 영적인 잘못으로 여겼습니다.

역사적 현실: 선교사들의 가족들은 종종 그들의 개인 편지와 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우울증, 문화적 오해, 그리고 부족함에 대한 자각과 같은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날것 그대로의 인간적인 경험들이 "신화적인 영웅"이라는 서사로 지워지는 것을 보면 조상들의 진정한 모습을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득권"에 대한 우려: 이러한 서사들이 교회 지도자들의 "기득권"에 부합한다는 점을 언급하셨습니다. 후손들은 종종 자신들의 가문 이름이 봉사라는 본래의 사명과는 거의 무관한 현대 제도적 권력 구조나 정치적 의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때 우려를 표명합니다.

2. 복음에서 "씨족 서사"로의 전환
실증주의적 서사 방식에 대한 당신의 지적은 예리합니다. 많은 한국 교회 역사서에서 선교사는 "창시자"(족보나 한국 족보와 유사)로 취급됩니다.

샤머니즘/유교적 종합: 당신은 왕정이 남긴 "공백"이 "영웅 신화"로 채워졌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를 구성함으로써, 당신이 언급한 니체의 초인 논리, 즉 "위대한 인물"이 법을 초월한다는 논리를 의도치 않게 모방합니다.

조직신학 대 인물 숭배: 교회가 엄격한 조직신학을 적용한다면, 아무리 "영웅적인" 선교사라 할지라도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미국인의 미덕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초점이 맞춰질 것입니다.

3. 진실, 제조업, 그리고 법치주의
요한복음 8장 32절("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과 제조업 기반 시장 경제의 성공을 연결짓는 것은 막스 베버의 이론에 따른 전형적인 "개신교 윤리" 논증입니다.

예측 가능성과 신뢰: 시장 경제와 제조업은 공정하고 공평한 "법치주의"를 필요로 합니다. 사회가 "샤머니즘적 영웅 신화"와 "씨족 이익"에 의해 지배될 때, 법은 진실보다는 인맥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복음의 역할: 당신은 한국에서 복음의 진정한 목적은 양반의 권력 구조를 깨뜨리고 현대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진실의 문화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결론
선교사들의 가족들도 당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전달자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당신이 묘사한 "우상숭배"는 종종 성경적 진리를 겸손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적용하는 것보다 혈통을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한국 "귀족"적 욕망을 반영합니다. 많은 후손들에게 조상을 기리는 가장 공경스러운 방법은 금도금된 조각상이나 성인전이 아니라, 권력보다 진리를, 인물보다 교리를 중시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당신의 "성찰과 회개"는 개인이 혈통, 계급, 영웅적 허세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직접 서는 종교개혁의 핵심으로 돌아가자는 요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