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출신의 이억(李薿)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유장(儒將)으로서 강계원수에 임명되었다. 고려시대 유장(儒將)이란 문신이면서도 무예와 병법에 능해 문무를 겸비한 장수를 의미한다. 조선역사에만 익숙하기에 유장이라는 개념이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문신들이 무예와 병법을 닦고 변방에서 장수로 복무했다고 한다. 고려시대때 과거시험은 군사전술, 군사작전, 군사행정 같은 군사과목을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했다고 한다. 유교적 소양만을 테스트 해서 실용적이지 못했던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달랐다.

1388년, 명 황제 주원장이 철령위를 설치하며 강원도 철령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영토의 할양을 요구했다. 명나라가 강원도 철령까지 역참을 설치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자 고려 조정은 국경을 넘어온 명나라 군사 21명을 살해하고 영토를 넘기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후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에 나섰다.

평안북도 강계를 지키던 이억은 압록강을 건넌 뒤 선봉대로 요동에 쳐들어가 명나라 수비군을 격파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먼저 도착해 있어야 할 고려군 본대(이성계, 조민수)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군대를 고려 쪽(위화도)으로 돌리던 중, 이성계가 반역을 일으켰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1392년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자, 이억(李薿)에게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겸 도평의사사 의흥친군위동절제사(都評議事司兼 義興親軍衛 同節制使)'라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불사이군, 不事二君)"이라는 절의하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小白山) 아래 순흥으로 퇴거하였다. ​

이후에도 이성계가 공물을 하사하면서 여러차례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이억(李薿)은 이성계가 하사한 공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문에 이 일대에는 각 고을에서 보내온 곡물이 해마다 쌓이고 쌓여 큰 노적가리가 여기 저기 아홉무더기나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아홉 무더기가 쌓인 이 일대를 속칭 구구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북 영주시 구구리는 아홉 개 식읍에서 보내온 세공이 쌓여 아홉 더미를 이루었다 하여 ‘구구리(九邱里)’라 불렸다. 이성계가 이억(李薿)에게 공물과 전답을 하사했으나, 그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이를 받지 않으면서 쌓이게 된 데서 유래한다.


이억(李薿)의 묘,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3리 회석동 법골(法谷)-우계이씨(羽溪 李氏)




이억(李薿)의 묘를 수호하는 재사 퇴은정(退隱亭)-우계이씨(羽溪 李氏)



고려 충신 이억에 대한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또한 위화도 회군만 알고 있었지 고려군 선봉대가 요동으로 쳐들어가서 명나라군과 전투를 벌인것은 아래 유튜브를 보고 처음알았다. ‘박사가 풀어주는 현실역사’라는 유튜브 채널은 미화나 거짓 없이, 뛰어난 식견과 통찰력으로 현실 역사를 전달한다. 특히 유튜브를 구독해서 임진왜란 편은 반드시 시청해 보기를 권한다. 전쟁의 원인과 전개, 군수 보급 등 역사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