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까지 이란은 매우 모범적인 고도성장 국가였다.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은 팔라비 2세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지주들에게 쏠려 있던 토지를 분배했고,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문맹률을 95%에서 50%로 낮추었다. 아울러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는 등 포용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팔라비 2세 국왕>




이 시기 이란은 자유롭고 평화로웠으며, 산유국으로서 부유한 나라였다.

팔라비 2세 시기(이란 혁명 이전)의 이란 모습은 아래 사진과 같다.



















당시 이란은 매년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성향이 강한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많았다. 특히 비무슬림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결국 시민사회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결탁하며 혁명을 일으켜 팔라비 왕조를 전복시켰다.





팔라비 2세가 미국으로 망명하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은 채 시위를 벌였다. 이후 이란은 강력한 반미 노선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란은 미국과 서방 세계를 압박하기 위해 원유 생산을 대폭 감축하였다. 하루 600만 배럴씩 생산하던 원유를 200만 배럴 수준으로 줄인 것이다. 이 때문에 배럴당 12~13달러 수준이던 석유 가격이 40달러를 넘어서게 되었고, 결국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였다.

당시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8%에 육박했고, 경제는 침체에 빠지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원유 가격이 오르자 전기요금, 기름값, 생산비, 유통비 등 거의 모든 물가가 함께 상승하였다. 원자재 가격까지 급등하자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실업자도 급증하였다.





물가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금리를 21%까지 인상하였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국은 미국 등 해외에서 막대한 차관을 빌려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리가 상승하자 이자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 한국의 국가 부채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초 한국은 브라질, 멕시코와 함께 세계 3대 채무국 가운데 하나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석유 가격이 60% 인상되었고, 연탄 수요가 늘어나면서 연탄 가격도 40% 올랐다. 아울러 전기요금은 35%, 버스요금은 30% 인상되어 서민들의 생활이 크게 어려워졌다. 거리의 네온사인은 꺼지고 가로등의 3분의 2가 소등되기도 했다. 






경제성장과 보릿고개 극복을 정권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던 박정희 정권에게 경기 침체는 치명적이었다. 민생이 어려워지자 독재를 정당화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가 침체되자 기업들도 어려움을 겪었고, YH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이란 혁명으로 촉발된 제2차 오일 쇼크는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