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론]

'거란(契丹) 성종(聖宗) 통화(統和) 3년(985) 가을 7월에 모든 도(道)에 조서를 내려 각자
무기를 완비하여 동쪽으로 고려 정벌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고려는 거란의 동쪽에 위치)
《요사 열전 이국외기, 고려》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고려] 영토(我境)를 길로 삼았는데 ··· '
《고려사, 성종 4년 5월 미상

'거란이 여진국(女真國)을 정벌할 때에 길이 고려의 땅(高麗之界)을 거치게 되자 ··· '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거란(契丹)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 동북여진
(東北女眞)으로 가는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사, 현종 17년 윤 5월 19일》

'원풍 5년(1082)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馬行道: 고구려-발해 이래 
로 만주 북부 초원 지대의 말 생산지와 요동 평원의 내륙 수계를 잇는 핵심 교통로이자 전략 도로)가 고려(高麗)
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송]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데, 고려 왕에
게 "여진이 만일 중국에 와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끝내 여진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속자치통감장편》  

'성종 원년(982) 6월 정광(正匡) 최승로(崔承老)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나라[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사졸(士卒)들이 아직까지 베개를 편안히 하지 못하고 군량을 많이 소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서북이 오랑캐에 
인접하여 방수(防戍: 변방이나 국경을 지키는 일)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헐탄(馬歇灘: 마행도의 한 지점)을 
경계로 한 것은 태조(太祖: 고려 태조 왕건)의 뜻이고, 압강(鴨江: 압록강)의 석성(石城)을 경계로 하는 것은 대조
(大朝: 거란)가 정한 바입니다. 
《고려사, 병지》



'압록강(鴨綠江: 요하)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白頭山) 너머로 쫓아내어 그곳에 살게 하였다.' 
《고려사, 성종 10년 10월 3일》

'당나라 초기에 말갈인은 속말(粟末)과 흑수(黑水) 양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구]고려에 신하로 속해 있었다. 
··· 흑수말갈은 숙신(肅愼) 땅에 거하였으며 산이 있는데 대게 (요동의) 장백산(長白山: 백두산=불함산=태백산)
이라고 한다. 금(金)나라가 발원한 곳으로 여진(女直)이 옛날부터 고려에 속해 있었다. ··· ' 
《금사 제135권 열전 제73 외국하, 고려전》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파견해 금(金)을 찾아갔다. 그 서(書)엔, “심지어 네 근원[금(金)]은 
내 땅[고려(高麗)]에서 발(發)한 것이다(况彼源發乎吾土).”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 금나라 초대 황제 완안
아골타)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고려사, 예종 14년 8월 3일》

'우리(我)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
나 된다. 고려(高麗) 태조가 고구려(高句麗) 땅에서 일어나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을 정하니 삼한(三韓)의 땅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고려가 다스리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極矣)를 이루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

'고구려(高麗)는 본래 부여(夫餘)의 종족이다.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으로
는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 요수(遼水: 현 난하)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고, 북은
말갈(靺鞨)과 접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의 백산(白山)서 흘러 나오는데, 물이 기러기의 머리
과 같아 압록수(鴨淥水: 요하/혼하)로 불린다'
《신당서 열전, 동이, 고구려》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
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73, 세종 18년 윤 6월 19일》
'철리국(鐵利國)에서 사신을 보내 예전처럼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붙음)할 것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고려사, 현종 12년 3월 23일》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 왕저(王佇)가 아뢰기를, "서번(西蕃: 서쪽 제후) 추장(酋長) 아부환(阿夫渙) 등 9인은
마음을 다하여 변방(塞)을 지키고 있으니, 마땅히 관작을 올려주고 상을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명령하여 
아부환 등 3인을 유원장군(柔遠將軍)으로, 산두(山豆) 등 6인을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삼고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렸다.'
《고려사, 문종 35년 1월 19일》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후백제]를 격파하니, 왜(倭)·탐부(耽浮)·환어라(驩於羅)·철륵(鐵勒)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에 부속하였다(皆附之).'
《남당서 권 18, 고려조》

'왜국은 일본국(日本國)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高麗)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今屬高麗).' 
〈곽약허, 도화견문지〉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지리의 학설이 분명치 못하므로 사람마다 각각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어느 것이 참말이며 거짓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려조에서 전해 오는 비록(秘錄: 비밀스럽게 
기록된 문서)도 역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여, 사(邪: 허황됨)와 정(正: 올바름)을 정하기 어려우니, 청하옵건대 음양
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 지리서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깎아내어 지리의 표준을 확정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임시 본부)을 
설치하여 일정하게 교정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권 6, 태조 3년 7월 11일》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윤)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 곳인가? 고황제(高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조선의 경계
라.'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하였는데, 이때는 바야흐로 파저강 정벌에 뜻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권 59, 세종 15년 3월 20일》  

'검상 이극감이 당상의 의논을 아뢰기를, "《고려전사(高麗全史)》는 사람들의 시비·득실이 역력히 다 갖추 기재되었으므로, 황보인과 김종서가 
《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하여 반사하고, 《고려전사
(高麗全史)》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에만 간직하였습니다. 우리 동방 만세에 법받을 만하고 경계가 될 만한 책은 《고려사(高麗史)》와 같은 것
이 없으니, 청컨대 《고려전사(高麗全史)》를 인간하여 널리 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권 12, 단종 2년 10월 13일》  

'신은 그윽히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이고, 호수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 요임금과 아울러 섰고, 
주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위와는 통호하였으며, 풍연에는 정성을 바쳤고, 수나라는 육사가 대패하였고, 당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
나라는 패군하여 처참하였으며, 송나라는 섬겼고, 금나라는 부모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명나라 
고황제도 또한 삼한이라 이르고 하하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동의 동쪽 1백 80리는 연산을 경계로 하여 파절을 삼았으니, 성인께서 만리를 헤아려 밝게 보시는데 어찌 토지가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거나 사냥
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수백 리의 땅을 버려 그 곳을 비게 하였겠습니까? 진실로 동교의 땅은 삼한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의 강역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혹 서로 섞인다면 흔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 신이 그윽히 생각하건대, 《고려사》는 전조의 치란을 기록해 후세의 권징이 되는 것이므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역란의 일이 
있다면 소위 역란하는 자는 역대의 역사가 모두 있는 것이니, 어찌 홀로 전조의 역사에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참칭한 일이 있다면 전조의 태조가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고 개원하여서 종실을 칭하였고, 금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황제로 삼았고, 고황제는 스스로 성교가 있다고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참칭하는 데에 혐의가 되겠습니까? 소위 번국이라고 하는 것은  기내의 제후와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만약 근대의 일이 있어서 유전할 수 없다면 
지금 명나라도 《원사》를 행하니, 어찌 그 이목이 미칠 것을 헤아리겠습니까? 만약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삭제하고서 행하면 가할 것입니다. 비단 지경 
안에서만 행할 것이 아니라 《사략》과 같이 중국에 전하거나 일본에 전해도 또한 좋겠습니다. 
 이는 비단 일시의 계책이 아니고 만세의 무궁한 계책이 되는 것이니, 빌건대 우리 나라[조선]에서 찬술한 
여러 서적 가운데 부득이한 비밀 문서 외에 《고려전사》와 같은 것은 옛날대로 전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6, 예종 1년 6월 29일》  



[서북계]

'압록(鴨淥)의 중국어 발음은 ‘yalu’ 로, ‘yalu’는 만주어(滿洲語)로 ‘경계·토지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境界)’를 
의미한다.(이훈 편저, 滿韓辭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924쪽.) 즉, 鴨淥은 만주어 ‘yalu’를 한어
(漢語)로 음차(音借)한 것으로, 압록강(鴨淥江)은 ‘경계·토지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의 강’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압록강(鴨淥江) 어느 특정 강을 의미한다고만 볼 수 없으며, 경계를 마주하는 두 정치 집단
의 정치·군사적 힘의 변동에 따라 변화 가능한 으로  할 것이다.' 
「김영섭, 고려 서북면 경계 재검토 -강동 6주(江東六州)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62, 2019.9, 159-188(30 pages)」

'천현(天顯) 원년(926) 거란(契丹)의 왕이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부여성은 바로 
당나라와 고구려 때의 부여성이다. 이 당시에 고려 왕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워 혼동강(混同江: 송화강)
까지 차지해서 지키고, 혼동강 서쪽은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부여성이 발해에 속한 것이다. 혼동강은 
바로 압록수(鴨綠水)이다.'
《자치통감》

'요사(遼史)에 '요흥종(遼興宗)이 압자하(鴨子河)를 혼동강(混同江)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고 
'압자(鴨子)가 곧 '아리'즉, 혼동강 곧 송화강(松花江)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 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東史綱目)고이(考異)에, '삼국유사 '요하(遼河)일명 압록(鴨綠)'과 주희의 여진
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鴨綠)이 있다,'고 하였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
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조선상고사》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 요하 상류 동요하 북단 이통하)와 상거하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契丹)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떨어져 있다. ··· 말갈에서 발원하는 압록
강(鴨綠水: 이통하-혼하를 잇는 유기적 통합 경계로, 본 사료에서는 '혼하'를 뜻함)은 그 물빛이 마치 오리 
[鴨頭]과 같아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요동(遼東)과는 500리 떨어져 있고 국내성(國內城)을 거치면서 다시 서
으로 한 강물과 합류해 흐르는데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이 두 강이 합쳐서 흘러가다가 서남쪽 방향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 이것이 가장 큰 강이다. 물결은 맑고[淸澈] 지나치는 나루터
에는 큰 배를 댈 수 있다. 고려에서는 이곳을 천혜의 요충지[天塹]로 여기는데 그 너비가 300보에 이를 만큼 넓다. 
(압록강은) 양성(平壤城)에서는 서북으로 450리이며 요수의 동남쪽으로는 480리 거리에 있다. 요(遼)의 동쪽
은 곧 옛날 거란에 속했던 지역인데 현재는 사람이 이미 전부 흩어진 상태다. 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
여서 다시 성을 세워 수비하지 않고 다만 오가는 길목으로 삼을 뿐이다. 압록강의 서쪽은 백랑수(白浪水)와 황
(黃嵓水)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리 흐른 곳에 합류해 남으로 흐르니 
이것이 곧 요수(遼水)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 영토》

'압록강(鴨綠水: 이통하-혼하를 잇는 유기적 통합 경계로, 본 사료에서는 '혼하'를 뜻함)의 서쪽으로는 백랑(白浪水)
와 황암수(黃嵓水)라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里)를 흐른 곳에서 합류하여 으로 흐르니 이것
이 바로 요수(遼水: 요하 상류 동요하 북단 이통하)이다. / 남소주, 정관 21년(647) 이적이 남소에서 고구려(高麗)군을 
토벌하고 군사들을 돌려 파리성에 이르러 백랑(白狼)과 황암(黃岩)의 두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 강이 얕고 폭이 좁은 
것을 이상하게 여겨 거란(契丹) 요하의 근원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답하길, 이 강은 다시 수리를 가서 합쳐져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를 곧 요수(遼水: 요하 상류 동요하 북단 이통하)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랑수(白狼水)는 
 릉하(大凌河)다.' (백랑수≠대릉하, 성경강역고 기록의 착오)
《선화봉사고려도경 / 영토》 / 《성경강역고[2]



'(고려의)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요하/혼하)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高句麗) 
때보다 확장된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

'최승로가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고려 태조 왕건)께서 ···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
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 생각해보니, 압강(鴨江: 요하) 서쪽 마을에 5개의 성을 쌓아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여 3월 초에 축성할 곳으로 가서 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할까 합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고려
의 대왕(大王: 고려 성종)께서 미리 신하들에게 분부하시어 안북부(安北府)에서 압강 동쪽에 이르기까
지 총 2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답사하고 성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게 해주십시오. 아울러 일꾼들
을 동원해 우리[거란] 측과 함께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명령하여 주시고, 축성할 성의 수가 도합 몇 개
인지를 빨리 회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려사, 성종 13년 2월 미상》  
 
'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리 땅은 모두 생
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해 왔으니, 그 뜻은 이 두 성(二城)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구고려]
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고려]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
면, 거란(遼)의 동경(요양)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말하는가? 게다가 
압록(요하) 안팎 또한 우리의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
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거란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서희의 8주 개척)
《고려사 열전, 서희》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죄수에서 풀어주고 조선으로 가자 
그대로 그 땅에 였다. ··· 북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파견하여 그(고구려 장수태왕)가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게 하니, 요(遼)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唐)의 고종(高宗)이 고구려[高麗]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를 설치하였다. 홀한는 바로 옛 평양성인데 중경(中京)현덕부(顯德府)라고 불렀다. 태조(太祖: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건국
하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함락시켰으며 그 왕 대인선(大諲譔)을 포로로 잡아 동란왕국(東丹王國)으로 만들고, 태자 야율
도욕 (耶律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神冊) 4년(919)에 요양(遼陽)의 옛 성을 수축
고 발해와 한인(漢人) 민호로 동평군(東郡)을 세워서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년(928)에 동란국 백성들을 옮겨서 
살게 하고, (동평군을) 승격시켜서 남(南京)으로 하였현 13년(938)에 남경을 고쳐 동경으로 삼고 부(府)는 요양이라고 하
였다. 호수는 40,604이며, 주(州)·부(府)·군(軍)·성(城) 87개를 관할하고 현(縣) 9곳을 통할한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 동경요양부

'통화(統和) 11년(994) 왕치(王治: 고려 성종)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 표를 올리고 사죄
하므로 조서를 내려 여진국(女直國) 압록강(鴨淥江: 요하) 동쪽 수백 리의 땅을 주었다.'
《요사 열전 이국외기, 고려》

'고려의 임금은 왕해(王楷: 고려 인종)이다. 고려(高麗) 땅은 압록강(鴨江: 요하) 이동의 
로(曷懶路: 고려와 완안부의 분쟁지) 이남에 위치했으며,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이른다. 
《금사 제135권 열전 제73 외국하, 고려전》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 일명 안정홀(安丁忽)로서 요수(遼水)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 요하)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이 설치되었으며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월희(越喜: 말갈의 한 갈래)의 
옛 성이 있었던 으로 발해(渤海)는 회원부(懷遠府)를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종이 이 지역
[신주]이 고려와 인접하였다고 하여 개태 초에 주를 설치하고, 한민(漢民: 중국인) 포로들을 데려다 채웠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 신주》
 
'삼만위는 요양 북쪽 330리에 있으며 남쪽 90리에 철령위가 있다. 삼만위 서쪽 370리에 폐지한 의주(懿州)
가 있으며, 동북쪽 310리에 폐지한 신주(信州)가 있다.' 
〈고조우, 독사방여기요〉
 
'생각건대 오늘날 창도부(昌圖府) 동북쪽의 팔면성(八面城: 현 요령성 철령시 창도현 팔면성진)이 대게 곧 
요(遼)나라 신주(信州)의 옛 성이다. 
《성경강역고[1]》
 
'신주(信州): 본래 월희의 옛 땅이고 발해(渤海)가 회원부를 설치했다. 치소는 회복현(懷福縣)이다. 요(遼)
나라에서 신주 창성군을 설치했으나, 원(元)나라가 폐지했다. 옛 성은 현재 봉천성 철령현 동북쪽에 있고 
개원현(開原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29일 차 노정: 함주(咸州: 현 요령성 개원)에서 40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또 50리를 가면 동주(同州)
에 이른다. ···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니 금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산(新羅山)이오. 산 속이 깊고 
멀어 갈 수 있는 길이 없소이다. 그 사이에서 인삼과 백부자가 나고 산 깊은 곳에 고려(高麗)와 국경을 접하고 
있소."라고 했다. 산 아래에 이르러 행로가 가히 30리였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

'지리적인 사실을 상고해 보면 계림[신라]은 곧 길림(吉林: 중국 지린성)이다. 허항종 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에서
말하기를, "함주(咸州)에서 동주(同州)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 큰 산을 바라보니 곧 신라산(新羅山)이다"라고 하였다. 요(遼)
의 함주는 지금의 함평(咸平)이며, 분주(芬州)는 지금의 동산현이다. 모두 현재의 철령(鐵嶺)과 개원(開原) 사이에 있다. 동쪽
으로 나아가 위원보문(威遠堡門)에 이르면, 그 곳이 바로 길림과의 경계이다. 즉 길림 주(州)의 이름이 신라에서 비롯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땅을 후에 발해(渤海)가 차지하였다. 이때 당(唐)은 조선(朝鮮) 땅을 병합하여 신라를 계림(雞林)이라
불렀다. 칠중성(七重城)은 경주(慶州)의 북과 남에 걸쳐있다. 발로하(發盧河)가 흐르는 곳이다. 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하기를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이끌고 포로하(匏盧河)를 건너 칠중성을 공격하였는데, 곧 이 강이다. 매소성(買肖城) 역시 그곳에 
있다. 당시 군사를 운용할 때는 모두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오고 갔다. 9주(九州)를 설치함에 이르러서
는 동으로는 길림에 이르고 서로는 광녕(廣寧: 현재의 북진시)에 이르렀다.'
《흠정만주원류고 / 당회요》

 
'거란 성종 개태 8년(1019) 군대 집결에 편리하기 위해, 고려와 영역 경계인 지금의 요령성 개원시 개원노성
(開原城) 지방에 함주(咸州)를 건설하고, 지리의 도움을 빌려 고려에 대해 전개하는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다.'
「周向永·许超, 铁岭的考古与历史, 鐵嶺: 辽海出版社, 2010년 중국에서 발간된 철령시 지역의 고고와 역사를 소개한 책, 166쪽」

'『고려사절요』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는 서희 장군이 994년과 996년 사이에 장흥진
(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龜州)·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선주(宣州)·맹주(孟州) 등 8개 지역에 
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고려사절요』나 『동사강목』의 기록에 대하여 오기이거나 다른 이칭 
중복 기재 등으로 보고, 중국 『宋史』의 기록을 근거로 6州를 정하다. 그런데 뒤에 자세히 다루거니와 우리나라의 
기록을 부인할 특별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宋史』를 근거로 6주로 축소한 것은 문제가 있다. ··· 서희 장군은 거란
과 담판을 하여 모두 8개 주를 개척하였으나 귀화진과 장흥진을 특별한 사유도 없이 오기로 보아 외하고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 6주를 이른바 '강동6주'라 이름 붙여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지역으로 설명하여 왔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거란의 3차에 걸친 침략 의 군사 이동 상황과 평안도의 지명 지리를 비교하여 보면 서로 부합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압록강 남쪽의 지명 수가 요령성 요양과 개원 사이에서 같은 이름으로 있는데, 고려군과 거란
군의 군사행동을 요령성으로 옮겨 보면 지리적으로 상당 부분이 부합된다. 따라서 서희 장군이 개척한 8주는 의 
압록강 남쪽이 아니라 요령성 요하 상류의 남쪽 개원 일대와 요양시 이북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이 전쟁 발발 원인과 관련하여, 송(宋)과 거란의 국경 부근인 웅주에서 ‘거란국주 가 그 모친의 분묘를 수비하기 위하여 고려를 정벌
하려 하였다’라고 한 이 기록은 비록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송 측의 기록이지만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란 성종의 모친 성신
선헌황후(聖神宣獻皇后)는 이해 1010년 4월 그 남편 경종(景宗)의 능묘가 있는 건주(乾州)의 건릉(乾陵)에 장사되었는데, 이 건주는 거란 
중경 대정부, 현 적봉이다. 그러므로 고려가 요하를 넘어 거란 중경을 위협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등장하는 遼陽은 
『遼史』 지리지에 의하면, 요하 서쪽으로 현재의 심양인 거란 동경과 요하 동쪽으로 현 요양 부근의 고려 西京으로 비정되는 지역을 함께 
아우르면서 서로 국경을 둘러싸고 다투고 있던 지역이었다.'
「윤한택, 고려와 거란의 전쟁기록 복원

'··· 『遼史』에는 이런 압록강이 요하인지 한반도 압록강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전쟁 경로에 대한 자료가 나온다. // 11월 을유 일에 대군이 압록
강을 건너니 강조가 맞서 대항하였으나 패배시키자, 강조는 동주(銅州)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병술일에 강조는 다시 출병하였으나, 우피실상온 
야율적로가 조의 부장(副將) 이립(李立)을 사로잡았고, 달아나는 군사들을 수십 리를 추격하여 죽였으며, 버린 군량미·갑옷·무기들을 노획하
였다. 무자일에 동주(銅州)·곽주(霍州)·귀주(貴州)·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이 노고달령(奴古達嶺)에 이르러 적병을 맞아 그들과 
싸워 패배시켰다. 묘일에 왕순이 사신을 보내 조근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리니 허락하였다. 군사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금했다. // 이 사료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알 수 다. ··· 무자일에 노고달령까지 점령이 되자 고려 현종은 3일 뒤인 신묘(辛卯)일에 조근하겠다는 표문을 올리게 된다. 
현재의 한반도의 압록강(鴨綠江)이 遼史에서 얘기하는 압록강(鴨淥江)이라고 할 때 전쟁 경로를 살펴보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전쟁 경로로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11월 을유일에 압록강을 건너간 거란군이 3일이 지난 무자일에 동주, 곽주, 영주를 항복시키고 나서 갑자기 
당일에 후퇴 경로로 다시 압록강 뒤로 건너 노고달령까지 가니 고려가 항복했다는 전쟁 상황이다. 한반도의 압록강 지나 고려의 동주, 광주, 귀주, 
영주를 항복시킨 거란군이 다시 뒤로 압록강을 건너서 후방에 있는 *노고달령까지 가니, 고려가 항복했다는 황당한 전쟁 경로인 것이다. 시간
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전쟁의 경로상으로도 맞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전쟁 경로를 보여주는 것은 『遼史』에서 얘기하는 鴨淥江이 
북한의 鴨綠江이라는 왜곡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 '
신민식, 고려 서북계 지리적 위치에 관한 융합적 고찰

 
'이에 따라 우리[고려]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鶴柱) 건너 강안
(岸江)​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고려사, 선종 5년 9월 미상

'학야현(鶴野縣). 본래 한의 거취현(居就縣) 땅인데, 발해(渤海)가 계산현(雞産縣)으로 하였다. 예전에 정령
(丁令威: 한나라 때 요동 출신의 전설적인 신선)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해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내려 앉아서 부리로 새겨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비록 그대로이나 사람은 아니니,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
'라고 하였다. 호수는 1,200이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 동경요양부[2]



'하늘과 사람이 같이 경사를 누리고 원근(遠近)이 다 평안하며, 모든 농사꾼이 풍년을 함께 축하하고 곡식
도 모두 잘 여무는 데 올랐으니 10월을 택하여 요성(遼城: 서경[환인])을 찾아가 조상들의 옛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한다.'
《고려사, 성종 9년 9월 7일》

'동녕로(東寧路). 본래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으로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였다. 한(漢)이 조선(朝鮮)
을 하고 낭랑(樂浪), ·현토군(玄菟郡)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낙랑 지역이었다.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반에 그 왕 
고련(高璉: 고구려 장수태왕)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머물렀다. 당(唐)이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 평양(平壤)을 공략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鴨綠水: 요하 상류 동요하 북단 이통하, 또는 혼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데에 있었
는데, (그곳은) 평양의 옛터가 아니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西京: 환인)이 되었다.'
《원사 지리지, 요양등처행중서성 / 동녕로[1]》

'원(元) 지원(至元) 6년(1269)에 이연령(李延齡)·최탄(崔坦)·현원열(玄元烈) 등이 부(府), 주(州), 현(縣), 진(鎭) 60개 성(城)을 가지고 
와서 귀부하였다. 지원 8년(1271)에 서경[환인]을 고쳐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다. 지원 13년(1276)에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로 
승격시키고 녹사사(錄事司)를 설치하였으며 정주(靜州)·의주(義州)·인주(麟州)·위원진(威遠鎭)을 나누어 파사부(婆娑府)에 예속시켰다.'
《원사 지리지, 요양등처행중서성 / 동녕로[2]》

'정축 최탄(崔坦)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西京)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玄孝哲)·한신(韓愼)에게 은패(銀牌)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서경[환인]을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東寧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慈悲嶺)을 고려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고려사, 원종 11년 2월 7일》

'동녕로(東寧路)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으로, 당(唐)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平壤)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천여리나 옮겨갔다. 지원 6년에 고려의 이연령(李延齡) 등이 그 지역(서경[환인])의 60여 성()을 가지고 원나라에 
내부(內部)하자, 원나라에서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후에 동(東寧路)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동녕(東寧)은 
곧 요양(遼陽)인데, 요양을 동녕이라 부르게 된 것을 상고해 보면. ··· '
《흠정속문헌통고 / 동녕로

'심양로(瀋陽路)는 본래 읍루(挹婁)의 옛 땅으로 발해(渤海) 대씨(大氏)가 정리부(定理府)를 세우고 심(瀋)·정(定) 
2주(州)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심주(瀋州) 땅이다. 거란(契丹)이 흥요군(興遼軍)으로 삼았고, 금(金)이 소
덕군(昭德軍)으로 삼고 또 고쳐서 현덕군(顯德軍)으로 하였으나, 후에 모두 병화에 훼손되었다. 원(元) 초에 요동
을 평정하고 고려국(高麗國) 인주(麟州) 신기도령(神騎都領) 홍복원(洪福源)이 서경(西京[환인])·도호(都護)·귀주
(龜州) 40여 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각기 진수사(鎭守司)를 세우고 관을 설치하여 그 민을 어루만졌다. 
후에 고려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켜 홍복원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귀순하니,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를 제수
하고 투항민들을 옮겨 요양 심주에 흩어져 살게 하였는데, 처음 성곽을 만들고 사존(司存: 행정 관청)을 설치하였
으며 요양의 옛 성을 교치(僑治: 본래 있던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 행정 기관을 두고 다스리는 것)하였다.' 
《원사 지리지, 요양등처행중서성 / 심양로》



 
'개태 3년(1014)에 고려의 보주(保州)와 정주(定州)를 취해 이곳에 각장(搉場: 고려와 거란 사이 국경 지대에 설치된 공식적인 무역 
장소)을 두었다. 동경통군사에 예속되었으며, 주와 군, 그리고 현 하나를 관할하였다. 내원현(來遠縣). 처음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채웠고, 다시 해(奚: 선비의 한 갈래로 거란의 부속 민족)와 중국인 700명으로 지키게 하였다. 호구수는 1,000이다. 선주(宣州) 정원군
(定遠軍)이 설치되어 있으며 자사를 두었다. 개태 3년(1014)에 중국인 호구를 옮겨 설치하였다. 보주에 예속되었다. 회와군(懷化軍)은 
하급이며, 자사를 두었다. 개태 3년 설치하였고 보주에 예속되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 보주[2]》
 
'정주(定州)·보녕군(保寧軍)이 설치되어 있다. 고려 때 주를 설치하였으며, 옛 현은 하나로 그 이름은 정동(定東)이다. 성종 통화(統和)
13년(995)에 군으로 승격되어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채웠다.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정동현(定東縣). 고
가 설치한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요나라 때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거주케 하였다. 호구수는 800이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 정주》
 
'영덕진(寧德鎭)에서 거란 내원성(來遠城)에 회신 첩문을 보냈는데, 첩문에서 이르기를, " ··· '오직 동해의 땅[고려]만이 아직 존귀한 북극
(北極: 거란)에 복종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지난번 사신으로 간 6명이 상국(上國)에 억려돼 있습니다. 그리고 (거란이) 우리 (고려의) 
강역 내에 (무단으로) 들어와 쌓은 정주(定州)와 선주(宣州) 두 성을 아직 돌려받지 못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황제 폐하
께서 시대의 기운을 열어 다시 새롭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 때를 만나 천상의 큰 은혜가 사방을 적셔 변방에서 다시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디 사신들을 놓아주고 아울러 침략한 땅들을 돌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제껏 요청할 방법이 없어서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 귀국[거란]에서 순박하고 성실한 정성을 승낙한다면, 우리나라[고려]가 감히 즐겁게 보내는 예를 게을리 하
습니까? 오직 황제의 명령에 달려 있는데 어찌 번거롭게 꾸짖는 말을 하십니까? 또 말씀하길, '황제가 천둥번개처럼 격노한다면 백성
들이 어찌 편안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엎드려 생각건대 지금의 황상은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비천한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도량이 넓은 분이므로 인빈(寅賓: 멀리 떨어진 곳)의 지역을 돌아보시고 반드시 추치(推置: 배려하여 알맞은 대우를 해주는 호의)의 
은혜를 더할 텐데 무고한 우리 백성에게 어찌 크게 노함이 있겠습니까? 보낸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마도 우스갯소리를 한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정종 원년 6월 미상》

'정주(定州)는 옛날에 파지(巴只)라 불렀으며【선위(宣威)라고도 한다.】, 정종 7년(1041)에 정주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고 관문(關門)을 
두었다. 공민왕 5년(1356)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었다. 별호는 중산(中山)이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봄·가을에 향(香)과 축문
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지명 교치에 따른 '후방 방어 기지' 신설+후대[조선시대]에 중국 지리의 명칭 체계를 재이식한 흔적)
《고려사 지리지, 동계 / 정주》



 
'의주(義州)는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으로, 화의(和義)라고도 부른다. 처음에 거란(契丹)이 압록강(이통하-혼하를 잇는 
유기적 통합 경계로, 여기서는 '이통하'를 뜻함)의 동쪽 언덕에 성(城)을 쌓고 보주(保州)라고 불렀는데, 문종대에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두면서 포주(抱州)라 불렀다. 요(遼)나라 자사(刺史) 상(常孝孫) 내원성(來遠城)과 포주(抱州)를 우리
[고려]에게 귀속시키니 임금(고려 예종)이 기뻐하면서 (거란 보주선의군사 소속이었던 포주를 '후방 방어 기지'인) 의방어사
(義州防禦使)로 (소속으로) 고치고 남쪽의 인호(人戶:사람)들을 데려다가 그곳을 채웠다. 이때에 다시금 압록강을 경계로 관방
(關防: 국경 및 요충지에 구축하는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다. 의주에 압록강(鴨綠江: 이통하-혼하를 잇는 유기적 통합 경계로, 
기서는 '혼하'를 뜻함)이 있다. 【마자수(馬訾水) 혹은 청하(靑河)라고도 한다】'
《고려사 지리지, 북계 / 의주》

'마침내 귀국[거란]에 의지하여 점차 초적을 제거하였고, 이후로는 별다른 대비가 없어도 변방의 사정이 한가로워졌습니다. 
성종(聖宗: 거란 제6대 황제 야율융서)의 칙서에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고 (소)태후의 자애로운 말씀이 어제 같은데, 요에서 
갑인년(1014)에 하천에 다리를 놓고 배를 만들어 길을 통하게 하였으며 을묘년(1015)에는 (고려의) 국경에 (무단으로) 들어와 
주성(州城: 보주)을 쌓아 대를 배치하였고 을미년(1055)에는 궁구(弓口)를 세우고 정자를 만들었습니다. 또 병신년(1056)에는 
상주문을 윤허해 건물을 철거하고 조서로 말하기를, "자질구레한 일은 항규(恒規: 오랜 규범)를 지키도록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임인년(1062)에는 매매원(買賣院)을 의선군(義宣軍) 남쪽에 세우려고 하여 (고려가)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고함)하니 
(거란이) 수리해 세운 것을 철거했습니다. 갑인년(1074)에는 탐수암(探守庵: 정찰용 군사시설)을 정융성(定戎城) 북쪽에 설치하고
는 우리가 항의하자 이미 세운지 오래되었다고 회답하였습니다. ··· (선의군(宣義軍)→의선군(義宣軍): 《고려사》 개변의 증거)
《고려사, 선종 5년 9월 미상》 

 
'보주(保州)·선의군(宣義軍)이 설치됐으며 절도를 두었다. 고려(高麗)가 이곳에 주(州)를 설치하였으며 옛 현은 내원(來遠) 하나
이다. (거란의) 성종이 고려의 국왕 순(詢: 고려 제 8대 황제 현종)이 제멋대로 즉위한 것을 문죄하였으나 (고려에서) 불복하였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 보주[1]》



' ··· 보주의 본래 이름은 용만현(龍灣縣)이었다. 이곳을 흐르는 압록강이 고려와 요의 경계였다. 그런데 요 성종이 고려를 침입하여 용만현을 차지하고 보주
라고 불렀던 것이다. ··· // *농안현: 지방민들이 쓰는 이름은 용만(龍彎)다. 현의 치소 가까이에 고탑(古塔)이 있다. 요 성종 때 세운 용안탑(龍安塔)을 일컫
는데, 음이 와전되고 또 농안(農安)과 비슷하여서 현의 이름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나라 시대에는 발해 대씨의 상경 부여부였다. 요 시대에는 황룡부였다. 금 
시대에는 제주라고 하였다. (중략) 현의 경내는 평원이며 왼쪽으로 송화강이 흐르고 이통하가 연결된다. 역마(驛馬)가 두 강을 따라 흐르다가 개천과 평야를 
교차하는데 몽골과 만주의 인후(咽喉)이다. 요금 시대에 네 번의 전쟁이 일어난 지역이다. // 위의 사료는 현재의 길림성 농안현에 대한 지리지 설명이다. 농안
현의 이칭이 용만(龍彎)이며, 이곳에서 요금시대에 네 번의 큰 전쟁이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고려는 요와 세 차례 큰 전쟁을 치렀다. 금 태조 아골타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요의 황룡부를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요를 멸망시키는 발판을 삼았는데, 요의 '황룡부'가 곧 농안현이었다. 즉, 사료에 기록된 네 번의 전쟁은 
세 차례에 걸친 고려와 요의 전쟁, 한 차례에 걸친 금과 요의 전쟁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농안현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다. ··· 요는 자신의 영토를 알리기 위해 
중요한 경계지점들에는 요탑을 세웠다. 요탑은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으로 조사에 의하면 총 96개가 있다. 이 요탑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요탑(遼塔)의 위치
를 통하여 요의 강역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지도5〉의 왼쪽은 요탑의 위치를 나타낸 지도이고, 오른쪽은 요탑들의 경계를 이어서 요의 강역을 살펴본 것이다. 
이 지도에서 요의 동쪽 경계를 살펴보면, 요동반도는 천산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현 길림성에서 동단에 위치한 요탑은 농안현에 세워져 있다. 이 연구결과
를 통해서도 고려와 요의 경계인 압록은 '이통하'로 볼 수 있으며, 요가 고려와의 전쟁에서 빼앗아 차지했던 '보주'는 농안현 지역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농안
현 일대가 고려의 서북계가 되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사항으로도 알 수 있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 성별로 중요 유적지를 조사하여 각각의 문물 지도집을 
발간하였다. 길림성 유적을 조사한 자료 중 이 지역의 관련사항을 살펴보면 아래의 〈표1〉과 같다. 유적명: 大高麗廟子遺址 / 시기:  / 발굴 유적 위치: 
省 德惠市 大靑嘴鎭 小岺村|유적명: 大高麗廟子屯北遺址 / 시기: 遼金 / 발굴 유적 위치: 吉林省 德惠市 大靑嘴鎭 小岺村|유적명: 高麗房南山山城 / 시기: 
金 / 발굴 유적 위치: 吉林省 九台市 上河灣鎭 双合村|유적명: 高麗廟子遺址 / 시기: 遼金 / 발굴 유적 위치: 吉林省 九台市 胡家鄕 寶山村. 고려 유적지가 있는 
길림성 덕혜시와 구태시는 모두 음마하(飮馬河) 주변에 있는 도시들이다. 이를 통해서도 고려의 서북국경은 이 지역이어야만 합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
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종합하여 요·금 시대 고려의 국경인 압록강과 보주의 위치를 나타내면 다음의 〈지도6〉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 
「허우범, 요·금 시대 고려 서북계의 범위 재고찰

'황룔부(黃龍府: 현 길림성 장춘 농안현)는 발해(渤海)의 홀한군(忽汗郡)으로, 뒤에 용천부(龍泉府)로 삼았다.  
《대원일통지, 개원로 / 상경고성》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는 
용천(龍泉: 현 길림성 장춘 일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 혼하)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東界)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 현 길림성 장춘 일대에 소재했던 고려의 군사 거점)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정주(定州=정주방어사)와 
장주(長州=장주방어사)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말하길, "나라[고려]에서 곧 허정과 나불 등을 
보내려 하니 와서 명령을 따르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고려사 열전, 윤관》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고려 예종)께서는 상지(上智)의 자질을 몸에 타고 나시어 중흥(中興)의 업을 손에 쥐셨사옵니다. 임금의 
밝은 지혜[聖明]가 일어나 계승되니 삼대(三代)의 문장이 찬연하고, 다스림이 정해지고 공을 이루니 백년의 예악(禮樂)이 우뚝 섰습
니다. 어찌 다만 만 백성이 진실로 살아날 뿐이겠사옵니까? 따르는 이들은 태사(太史)의 말을 여러 차례 어기며 구부리어 서경 사람
들의 바람을 좇았사오니, 이곳을 천자의 덕[龍德]의 길한 땅이라 했으니 실로 이곳은 봉성(鳳城)의 옛 터입니다. 기자(箕子)의 풍습을 
싣기에는 오늘이 적당하옵고, 요양(遼陽: 보주[포주])의 땅이 다시 우리의 강토로 들어옴을 보게 될 것이오니, 실로 만고에 없는 보기 
드문 일인지라 마땅히 사람들과 더불어 즐겨야 할 것이옵니다.' (이듬해 보주[포주] 재수복)
동인지문사륙, 권8

'요(遼)의 내원성(來遠城)에서 보내온 공문(牒)에 이르기를, "지난번 생여진과 동경(東京)에서 일어난 발해인의 반란 때문에·곡물의 
수확이 줄어들었습니다. 현재 관아에는 곡식이 있으나 정규군의 군량 외 일반 민가에는 비축해 둔 식량이 부족한 실정이오니 임시
로 쌀 50,000 석을 빌려주시면 민가를 구제한 다음, 오는 가을에 빌린 수량만큼 조금도 부족함 없이 갚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이
에 중서성에 모여 의논하게 하고 판병마사(判兵馬事) 김연(金緣) 등을 시켜 거란 통군(統軍: 여러 군대를 총괄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에게 이르기를, "만약 두 성과 사람 및 물품을 우리[고려]에게 반환한다면 쌀을 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두세 번 오가
면서 설득하여도 통군이 수긍하여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금(金)의 군대가 요(遼)의 개주(開州)를 공격하여 차지하였고, ··· 통군 
상서좌복야 개국백(尙書左僕射 開國伯) 야율영(耶律寧)이 내원성자사(來遠城刺史)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상효손(常孝孫) 
과 함께 그 관리와 백성을 통솔하여 140척의 배에 싣고 강가에 정박한 다음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첩문을 보내 말하기를 ··· "우리나라
[거란]가 고려국과 인근에 위치한 관계로 진작 식량을 빌리는 일을 추진했으나, 일이 성사되지 못했기 때문에 통군부 내 백성들이 양
을 얻기 위해 후방 지역으로 달아나 버렸으니 이는 나중 우리가 돌아와서 서로 좋게 해결할 일입니다. 이제 고을 백성들과 관할 지역을
인계하고 가니 이것을 인수한 뒤에는 선명(宣明: 임금의 말씀)에 따라 시행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내원(來遠)·포주(抱州)의 두 성을 
우리에게 반환 하고는 마침내 바다에 배를 띄워 달아나자 우리 군대가 그 성에 들어가 무기 및 화폐와 보물들을 거둔 것이 매우 많았다.
김연이 상세하게 적어 급히 알리니 임금(고려 예종)이 크게 기뻐하여, (거란 보주선의군사 소속이었던) 포주를 고쳐 (그 소속을 후방 방어 
기지인)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하고, 압록강(鴨江: 이통하-혼하를 잇는 유기적 통합 경계로, 본 사료에서는 '이통하'를 뜻함)을 경계로 
삼았으며 변방의 방어를 위한 요새를 설치하였다.' / '백관들이 나라의 영토를 회복한 것에 대하여 표문을 올려 하례하였다. 아뢰기를, "요
즈음 두 적국([요]·[금])이 전쟁을 벌여 2성의 소속에 대하여 크게 우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말갈(靺鞨: 금)이 2성을 바치겠다고 간청한 것은 
하늘의 계시에 따른 것이며, 선비(鮮卑: 요)가 몰래 도망간 것도 진실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샘과 우리의 이 
다시 우리 영토가 되어 호적과 지계에 올려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되었으며 천하(中區)를 더욱 확장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아뢰
기를, "임금(고려 예종)의 웅장한 계책을 보필하지 못하여 부끄러워하고 있던 차에 처음으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돌에 새겨 공로
를 기념해야 하나 아직 칭송할 글월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술잔을 받들어 (성상폐하의) 만수무강을 빌며 풍악을 울리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예종 12년 3월 3일》 / 《고려사, 예종 12년 3월 6일》

'금(金)에 위위경 김자류(金子鏐)와 형부낭중 유덕문(柳德文)을 보내 선유사(宣諭使: 타국에 황제의 뜻을 알리고 외교적 교섭을 할
목적으로 특명을 받아 파견된 사신)를 파견한 데에 사례하였다. 표문(表文)에 이르기를, “고백숙(高伯淑)이 와서 은밀히 황제의 뜻
을 전했는데, ‘보주(保州[포주])를 고려(高麗)에 귀속시키고 다시는 수복(收復)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구려
[勾麗: 고구려]의 본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로 하였고, 평양(平壤)의 옛 터는 압록강(鴨綠江: 요하/혼하)을 경계로 하였는데, 수 
차례 바뀌어 변하였습니다” ··· 라고 하였다.'
《고려사, 인종 4년 12월 12일》


 
 
'홍유(洪儒)의 초명(初名)은 술(術)이고, 의성부(義城府) 사람이다. 궁예(弓裔) 말년에 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기병 장수가 되었는데, 은밀히 모의하여 밤에 태조(太祖: 고려 태조 왕건)의 집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삼한(三韓)이 분열된 후 도둑떼들이 다투어 일어났고, 지금의 왕(궁예)이 용맹을 떨쳐 일어나 크게 호령
하여 초적을 섬멸했으며, 드디어 셋으로 나누어진 요좌(遼左: 요동)의 절반을 점거하였습니다." ··· 라고 하였다.'
《고려사 열전, 홍유》

 
'요좌(遼左: 요동)는 본래 고려 땅이다.'
〈연도기행, 1656년 8월 29일 갑진〉

'요동(遼東)의 쌍성(雙城) 및 화주(和州) 등처에서도 금을 캐게 했다.'
《원사 식화지》

'조휘(趙暉)는 원래 한양부(漢陽府) 사람이었으나, 뒤에 용진현(龍津縣)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고종(高宗) 45년
(1258), 몽골군이 대거 침입하자, 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장주(長州)·의주(宜州)·문주(文州) 등 15주(州)
의 사람들이 저도(猪島)로 들어가 지켰다. 조휘는 정주 사람 탁청(卓靑)과 등주(登州)·문주의 여러 성 사람들과
논의하여 몽골군을 끌어들이는 가운데 빈틈을 노려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과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경별초(京別抄: 중앙에 있던 별초군) 등을 죽이고 드디어 고성(高城)을 공격하여 집
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뒤에, 화주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투항하였다. 이에 몽골에서 
주에 쌍성총관부(雙城惣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반역열전, 조휘》



 
'그곳의 사람들에게 고유(告諭: 어떤 사실을 널리 알리고 깨우쳐 주는 것)하여 말하기를, 
요심(遼瀋: 요양·심양)은 우리나라[고려]의 경계이며, 민은 우리의 민이다.'
《고려사 열전, 지용수》

'요심(遼瀋: 요양·심양) 지역은 애초 본국[고려]의 옛 영토였으나 원나라를 섬기게 된 이후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 행성(行省)의 관할로 두었던 것이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12월 2일》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가 변경을 편안하게 하는 대책을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북계(北界)는 여진(女眞)
·달달(達達)·요심(遼瀋: 요양·심양) 등과 맞붙어 있어, 실로 국가의 요충지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아무런 일이 없을 
때도 반드시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양성해 불의의 사변에 대비해야 합니다." ··· 라고 하였다.'
《고려사, 우왕 9년 8월 미상》

'향산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 북쪽에 있는데 요양(遼陽)과 경계를 이루었다. 산의 크기
는 비할 데가 없으며 장백산의 분맥(分脈)이다. 향나무ㆍ사철나무가 많고 선불(仙佛)의 고적이 있다.'
《동문선, 제72권》

'11월 정해 아태조(太祖, 이성계)와 지용수(池龍壽) 등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
(鴨綠江: 이통하-혼하를 잇는 유기적 통합 경계로, 본 사료에서는 '혼하'를 뜻함)을 건넜다. / 기축 아군이 
요성(遼城)으로 진군한 뒤 요성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11월 2일》 / 《고려사, 공민왕 19년 11월 4일》

'요성부(遼城府): "당(唐)나라가 설치했다. 옛 치소는 오늘날 요령성 요양현 북쪽 70리에 있다." ··· '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의정부의 장계(狀啓)에 의거하건대, 함길도 절제사 이세형(李世衡)의 보고에 의하면, 피로(被虜: 적에게 
사로잡힘)된 남자 1명의 이름은 이상(李相)인데, 심문해보니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의 군인으로 정통
(正統) 2년 9월 일에 탈륜위(脫輪衛) 야인들에게 포로가 되어, 이곳저곳으로 팔려서 종이 되었다가 변경에 
이르러 왔는데 이번에 붙잡히게 되었다고 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94, 세종 23년 10월 22일〉

'우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 표문으로 청하기를...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고려]의 땅이었습니다.'
《고려사, 우왕 14년 2월 미상》

'홍무(洪武) 21년(1388) 4월에 우(禑)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 왔으니, 
과거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高麗)가 예전에는 압록강(鴨綠江)으로 경계를 삼았
으면서도 이제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朕)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함으
로써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명사 외국열전, 조선》

 
'철령위. 요양성 북쪽 240리에 있다. 옛날에는 철령성이 지금의 철령위 치소 동남쪽 500리에 있었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 홍무(洪武) 21년에 철령위를 그곳에 설치하여 26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요동지〉

'철령은 서쪽으로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으로 범하(汎河)가 있으며  남쪽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흘려서 요하로 들어간다.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곧 옛 철령으로 고려와 경계 접하고 있다. 홍무
초년에 봉집현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
《명사 권41 지리지2》

 
'봉집현(奉集縣)은 당(唐)나라 때 발해(渤海)가 설치했으나 원(元)나라 때 폐지되었고, 명(明)나라에서는 
봉집보(奉集堡)라 했다. 오늘날 요령성 심양현 동남쪽 45리에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동북계]

'동여진(東女眞)의 귀순주(歸順州) 도령(都領) 대상(大常) 고도화(古刀化), 부도령(副都領) 고사(古舍), 
익창주(益昌州) 도령 귀덕장군(歸德將軍) 고사(高舍), 도령 검부(黔夫), 전성주(氈城州) 도령 봉국장군
(奉國將軍) 야호(耶好)·귀덕장군(歸德將軍) 오사불(吳沙弗), 공주(恭州) 도령 봉국장군(奉國將軍) 다로
(多老), 번장(番長) 파가불(巴訶弗), 은복주(恩服州) 도령 원보(元甫) 아홀(阿忽), 도령 나거수(那居首), 
온주(溫州) 도령 삼빈(三彬)·아로대(阿老大), 성주(誠州) 도령 이다불(尼多拂)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부(內附: 다른 나라나 집단이 안으로 들어와 붙음)하여, 군현(郡縣)으로 편입되기를 간청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2월 21일》

'병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동북 변방(東北邊) 15주(十五州) 밖(外)의 제후국 백성(蕃人)들이 
잇달아 귀부(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붙음)해 오면서 우리[고려] 군현(郡縣)에 편입시켜 달라는 간청
이 지금까지도 끊이지를 않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 덕분이다.'
《고려사, 문종 27년 4월 3일》

'무인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삼산(三山)·대란(大蘭)·지즐(支櫛) 등 9개 촌(村)과, 소을포촌(所乙浦村) 
(蕃長: 추장) 염한(鹽漢), 소지즐(小支櫛) 전리(前里: 앞 마을)의 번장 아반이(阿反伊), 대지즐(大支櫛)·라기나(羅基那)·오안
(烏安)  무이주(撫夷州) 골아이(骨阿伊)의 번장 소은두(所隱豆) 등 1,238호(戶)가 와서 부적(附籍: 고려의 호적에 편입)하기
를 요청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小支櫛) 요응포(應浦) 해변까지는 700리걸쳐서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여러 
번인이 끊이지 않고 귀순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關防: 국경이나 요충지에 구축하는 방어 시설)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유사(有司: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에 주(州號: 주의 명칭)를 아뢰어 정하도록 하고, 또 주기(朱記: 지방관이 
공무를 수행하는 붉은색 도장)를 하사하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6일》

'동여진의 대제(大齊)·자고(者古)·하사(河舍) 등 12개 촌락의 번장인 곤두(昆豆)·괴발(魁拔) 등1,970호(戶)가 상곤(霜昆)의 례에 
따라 우리[고려]에게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붙음)하겠다 요청하여 왔으며, 또 두룡(豆龍)·골이(骨伊)·여파(餘波漢) 등 
부락(部落)의 번장 아로한(阿老漢) 등도 우리 주현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거주지는 우리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이제까지 조근(朝覲: 제후가 지방에서 천자를 뵈러 오는 일)해온 일이 없었는데 이제 모두 귀부해 온 것입니다. 만일 국경을 
그어버리고 관방(關防: 국경 및 요충지에 구축하는 방어 시설)을 설치하는 경우, 여파한 고개 바깥에 있는 제차고(齊遮古)·대사
(大史伊)·칭견(稱見)·곤준(昆俊)·단준(丹俊)·무을비(無乙比)·화두(化豆) 등 지역은 광활한 (壤地)의 넓이가 끝이 없고 번인(제후국 
백성) 가구도 넓게 거주하고 있는 만큼 그 끝까지 모조리 요새를 설치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요청하건대 영외(국경 밖)의 여러 번
(諸蕃: 번국·번방)이 모두 우리의 주현으로 편입된 연후에 점차 멀리 있는 번까지 편입시키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23일》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흑수(黑水) 말갈 출신의 통역인 가서로(加西老)가 동번(東蕃: 동쪽의 제후국)을 회유
하여 우리[고려]의 주현(州縣)으로 편입되게 한 공이 있으니 그에게 감문위산원(監門衛散員)을 제수하며 고맹(高孟)
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7월 5일》

'한림원에서 아뢰기를, “동여진(東女眞)의 대란(大蘭)  11개 촌의 (內附者: 고려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와 복속한 사람)들
이 빈주(濱州)·이주(利州)·복주(福州)·항주(恒州)·서주(舒州)·습주(濕州)·민주(閩州)·대주(戴州)·경주(敬州)·부주(付州)·완주(宛州) 등 
11개 주(州)가 되기를 요청하니 각각 주기(朱記: 지방관이 공무에 사용하는 붉은색 도장)를 하사하고 귀순주(歸順州)에 소속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4일》



'해동청(海東靑)은 오국성(五國城: 부아리국·분노리국·오리미국·월리독국·월리길국으로 이루어진 여진 5국의 연맹체)
의 동쪽 고려와의 경계 지역에서 난다. 작으면서도 굳세어서 고니[天鵝]를 잘 잡는데, 발톱이 흰 것이 더욱 특이하다.'
《대명일통지》
 
'오국(五國): ··· 부아리국은 지금 러시아 합파라부사극(哈巴羅夫斯克: 우수리강 유역의 하바로프스크)이고 분노리국은 
지금 탕(湯原縣) 안에 있는 쌍하촌(雙河村) 남고성(南古城)이다. 오리미국은 지금 수빈현(綏濱縣) 영역 내 송화강 
쪽 기슭에 있는 오래하(敖來河) 반고성(畔古城)이며, ··· ' 
《대원일통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고려-조선 시기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확인돼 한국중세사 국경 연구의 최대 논쟁이 예상다. 
··· 이날 국제학술회의는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의 아르쩨미예바 N.G.의 "연해주 지역 조선
(1392~1897년) 성에 대한 첫 번째 조사"부터 시작됐다. 또 니끼친 Yu.G.의 "피터 대체만 수역[파르티잔스크 연안]의 
고려 및 조선시대 고고학 유적들"은 고려의 국경사에 대한 기존 통에서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이어 쥐시홉스야 
I.S.의 "고려 및 조선시대와 동시기의 연해주 고고학유적 출토 자기와 청자들"까지 러시아 극동고고학계 권위자들의 발표
가 계속됐다. 그동안 한국 역사학계는 러시아 블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하는 연해주에는 한국사와 관련해 발해 유적들과
일항쟁기 당시 유적들만 주로 분포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날 발표회에서는 연해주 지역서 요나나 금나라와
는 관계없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산성·토기들이 발견됐음이 국내 보고된 것이다.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산성
은 거란이나 여진족같은 유목민족의 유적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산성으로 보고 있다고 밝혀 청중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고고학 발견은 고려와 조선의 국경이 두만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것이다. 초기에 러시아 학자들은 이 유적
들을 고려나 조선의 거주 흔적으로 인식하는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고대 한국 성(城)의 특징인 석성과 고려-조선의 
자기(磁器), 기와들이 다량 출토되자 고려 혹은 조선시대 문화와의 관련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번 발표논문을 모두 검토한 
한국 전통문화대학교 정석배 교수는 "타당한 내용"이라며 "연해주에서 오랫동안 답사와 조사를 하고 논문들을 검토해본 결과 
러시아 학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또 발해사를 전공하며 여러 차례 연해주를 답사한 "고구려, 발해학회" 
연구위원인 정진헌 박사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는 "시대적으로 발해 이후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대부분의 러시아 학자들
은 이 유적들에 대한 구분을 못하고 엉뚱하게 불과 200년이 안 되는 금나라와 연결지었다"고 지적했다.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남창희 교수는 "고대와 중세 국경의 연구와 현대의 영토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이 국제연합에 가입
하면서 1945년 이후 동북아 국경 질서를 인정한만큼 국경사 연구가 현대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외교분쟁을 유발한다는 우려는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한다.
|아시아경제, 2017년 11월 19일자 기사


 
 
'무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6성을 새로 쌓았다 하여 표를 올려 칭하(稱賀: 축하)하였고 또 공험
(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계지(界至: 국경)로 삼았다.' (기미주 영토 내 물리적 경계 설정 후 직접 통치 시도)
《고려사, 예종 3년 2월 27일》

' ··· 김구진은 동북9성의 크기를 세종 시대의 6진 규모와 비교하여 추론하였다. 즉 세종 때 6진 개척을 담당
한 군사는 함길도 토착 군정 6천 명 정도인데 비해, 윤관의 9성 정벌 때 동원된 군사는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징발한 17만 대군이었다. 세종 때 6진에 4차에 걸쳐 사민(徙民)한 규모는 2,800 내지 3,200호에 불과하였으나, 
고려 때 동북9성에 사민한 규모가 2차에 걸쳐 75,000호인 것을 지적하였다. 두 가지 사실을 비교해볼 때 윤관
이 정벌한 동북9성의 범위는 세종 때 개척한 6진의 범위보다 훨씬 더 넓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수빈강(수분하)은 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의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
으로 흘러서 소하강(대수분하)이 되어 공험진·선춘령을 지나 거양성에 이른다."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수빈강: 근원이 백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이 되고, 한쪽은 속평강(소수분하)이 되어, 공험진·선춘
령을 경유하여 거양에 이른다"는 기록들에 의하여, 두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수빈강 즉 현재의 수분
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소하강, 즉 현재의 대수분하와 목단강시와 동녕현의 자연 경계인 태평령(太平岭)
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속평강, 즉 현재의 소수분하라는 두 지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의 사실
은 소하강과 속평강이 만나는 지점 일대에 공험진·선춘령이 있다는 것이다. 속평강과 소하강이 만나는 지점인 동녕
현 도하진 일대는 고구려에 복속된 북옥저 시기 건설돼 발해와 이후 고려 시기에도 계속 사용된 오배산성(五排山城)
과 홍석립자산성(紅石砬子山城)이 있으며, 현재 인근 수분하 강변에 고려령(高麗岺)이라 불리는 지명도 있다. ··· 필
는 2015년 10월 6일부터 7박8일의 일정으로 공험진·선춘령의 현재적 위치를 찾는 현지답사를 진행하였다. ··· 필자가 
춘령으로 비정한 곳은 현재의 흑룡강성 동녕현 도하진 홍석립자촌(紅石砬子村) 남쪽 수분하 건너편에 위치하는데, 
재는 고려령으로 중국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현지에서 만난 홍석립자촌에 거주하는 한 노인은 단지 '수분하 건너
의 산에 오래된 성터가 있고, 그 성터가 '고려국'이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전한다. 2015년 10월 7일과 8일
의 이틀에 걸쳐 진행된 선춘령 지역 답사에 의해 작성한 현지 지도는 다음과 같다.[지도8] ··· '     
「이인철,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함길도] - 동쪽은 큰 바다[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鐵嶺: 현 강원도 철령)에 닿았으며,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하였다. 준령(峻嶺)이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鐵嶺)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
(亘)한다.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모두 1천
7백 여 리이다. / [경원도호부] - 복호봉(伏胡峯) 대천(大川: 크고 이름난 강)은 두만강(豆滿江)과 수빈강(愁濱江: 수분하)
【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蘇下江: 대수분하)이 되어 공험진
(公險鎭)·선춘령(先春嶺)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다다르고,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빈강이 되어 아민(阿敏)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이다. 그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까지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이현
(豆籠耳峴)에 이르기까지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쪽으로 공험(公險鎭)에 이르기
까지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까지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
까지 1백 50리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정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 ··· 예종 2년(1107)에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원수(元帥)가 되어 지추밀원사
(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으며, 공험진(公嶮鎭)
의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국경으로 삼았다. 명종 8년(1178)에 이르러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다. 비록 연혁
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高麗)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현 강원도 삼척) 이북은 통
어 동계라 일컬었다.'
《고려사 지리지, 동계》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
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금(金)나라는 본래 우리 나라[고려]의 평주(平州) 사람이 세웠으므로 우리 나라
를 부모의 나라(父母之國)라 하였고, 윤관(尹灌)이 9성(九城)을 쌓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국경을 삼아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감히 군사력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134, 성종 12년 10월 17일》

'공험(公險鎭)은 회령부(會寧府)의 소하강(蘇河江: 대수분하) 가에 있는데,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 두만강(豆滿江) 이북 
700리 지점이다. 고려 예종 3년에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해서 이곳으로 국경을 삼았다.'
〈허목, 기언 / 변새〉
 
'윤관비는 선춘령(先春嶺)에 있으며 두만강 북쪽 700리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을 호인(여진인)이 긁어버리기는 했지만 
 흔적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다.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으니,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
서 소하강(蘇河江: 대수분하) 가에 이르기까지 그때의 성터가 남아 있다. 그곳은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이고 백두산의 동북
쪽이다, 그는 이처럼 국경(國境)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국경을 정한 것은 김종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
에 윤관이 솔빈강(速平江: 수분하)까지 국경을 넓히고 그 일을 기록한 비석이 아직도 그곳에 서 있는데 김종서 때에 와서 두만
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을 나라[조선]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고 있다.'
〈이익, 성호사설 / 천지문〉

'옛적에는 봉경(封景: 나라의 경계)이 동서로는 2,000여 리, 남북으로는 1,500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新羅]와 백제[百濟]를 합병하여 동북쪽이 자못 넓어졌다. 그 서북쪽은 거란[契丹]과 연접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