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현대 무술계에 끼친 영향[편집]
토야마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군대에서 쓰인 실전무술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크게 흥했다. 현대에 와서는 단일 검술 유파[6]로써는 일본 내외로 가장 규모가 크고 수련자가 많은 편이며, 그만큼 현대 무도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다. 토야마류 관련자들이 베기술 강습회를 많이 열었기 때문에 나카무라류와 함께 타메시기리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장본인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스포츠 찬바라나 진검도[7] 같은 무술이 파생되었다.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배우기 힘든 경우가 많은 고류에 비해[8] 원래부터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도록 고안된 군도술에 뿌리를 둔 만큼 배우기가 쉽고 간편하거니와, 특히 베기 시참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신규 수련자의 유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수련자의 입장에서도 베기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통해 재미와 성취감을 느끼기 쉽다. 이런 점이 전후 민간유파로 새출발한 토야마류가 급격히 세를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7.1. 한국과의 관계[편집]
토야마류가 흔히 난징대학살에 쓰인 검법으로도 국내에는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전군보급이 1940년 되어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경학살검법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길 수는 없다. 토야마학교에서 후반기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들이 기법을 활용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만 중일전쟁을 맞아 급격히 확장된 일본군의 사정상 남경공략 시점에서 검술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의 숫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토야마학교 검술이 활용되었을 비율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돌격 및 호신을 위한 검술이었으므로 결국 쓰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악명은 상당부분 나카무라 타이사부로(中村泰三郞)에게서 시작되었다. 토야마학교에서 검술교관교육을 받고 부사관으로써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는 만주 흑천성 방면으로 배치되면서 베기술 연구를 거듭했다. 전후 그는 자신의 전쟁중의 경험과 토야마류에 합류하면서 배운 것[9], 그리고 사람을 실제로 참살한 전범인 타카야마 마사요시와의 대화를 통해 얻은 정보 등을 살려 자체적으로 연구를 더해 나카무라류 팔방베기 발도도(中村流八方切り抜刀道)를 창시했다. 베기술과 도검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전후 일본 검술계에서는 이름이 높았는데,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베기술이나 시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에 베기술을 추구하던 비천 이영식이 우연히 나카무라류의 교본을 입수하여 자체적으로 연구에 연구를 더하고, 마침내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를 초빙하여 나카무라류를 직접 사사해 베기술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마침 세를 한창 늘리던 해동검도에 이영식의 제자들이 들어갔고, 해동검도에서 마침내 베기술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베기라는 것이 짚단과 대나무를 베는 일본식 시참의 형식을 그대로 따오게 된 것. 해동검도가 이 점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베기술과 진검검리를 최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지만, 국내의 대부분의 검술 단체들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한 다리 건너 나카무라류를 통하기는 했지만, 그 근원은 토야마류에 있는 만큼 토야마류는 한국 현대 무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셈이다. 그 외에는 무술인 최영철이 스포츠 찬바라 창시자이자 토야마류 수련자인 타나베 테츤도(田邊哲人)에게 토야마류를 배워 잠시 보급한 적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