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석가모니 사상의 핵심은 중도中道이고 승려를 `중`이라 합니다. 중도 사상만큼 중요한 말씀은 자등명법등명입니다. 불상의 촛불이 두 개인 이유이고, (물만 셀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구원자, 구세주를 스스로 하라는 뜻입니다.
부처는 깨달음, 해탈, 열반을 말하였는데 이 중에 해탈, 열반이 무엇인지 알쏭달쏭한 이유는 석가모니의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깨달음까지도 석가모니의 `주장`이었지만, 깨달음은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불교는 지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보다는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추천합니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이해했다고 해서 부처(붓다)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약 3천 년 전 깨달음이라서 지금은 중학생도 이해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깨달음을 아는 것은 이해한 것이고, 깨달음의 느낌을 받는 것은 별개입니다. 이해한 중학생들은 모두 `부처`가 된 것일까요? 둘째, 초기 불경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더라도 자신의 말, 행동, 인생에 반영하고 있지 않으면 불경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과 겉모습이 같기 때문입니다. 불자와 보살의 차이라고 생각되며 `깨달음의 양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살생, 육식에 대한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잔인한 마음은 어디까지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물을 살생함으로 인해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살생해도 되는 존재들은 모기, 바퀴벌레, 집 거미 등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러 죽이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지금 불교는 스님이 죽을 때 어떤 성격으로 죽는지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채식으로 인해 건강이 너무 나쁜 채 수행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하는 육식 금지 보다, (몸 편한 생활을 최소한으로 하듯이) 육식과 살생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부처(붓다)는 명상하고 있거나 한 뒤에 창의적인 생각이 잘 떠오르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는 아마도 수면(기절) 중에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계속 작동하는 무의식의 존재`를 스스로 이해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유일하게 모차르트만 뇌파 발생 음악(사운드)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자신이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는 그런 시차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스스로 자기 무의식을 실시간으로 관찰해서, 낭패스럽고 야매적인 성격으로 살지 말아야 할 것을 추가로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심리`인 것 같습니다. 명상은 `나 자신의 관찰자`가 되는 것이고 `마음 알아차림`을 하기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찾았다는 확신이 들거나 남들에게 인정을 받은 순간이 오면, 그때는 반듯이 `마음 알아차림(사띠)`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전부터 명상을 해오지 않은 사람은 반듯이 명상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지압 명상은 인당, 신정, 상성 혈자리를 지압해가면서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양반다리 자세는 쩍벌남이 되는 습관이라서 별로입니다. 전두엽을 지압하지 않는 명상은 (졸기 쉽고) 사고력, 판단력 개선효과가 없어서 별로입니다. 명상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없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