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검객으로 두 자루 칼을 쓰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의 시조다.
《오륜서》에 따르면 무사시는 약 60회의 실전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호구나 죽도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실전은 목검이나 진검을 사용해 중상이나 사망에 이를 때까지 겨루는 극히 가혹한 대결을 뜻한다. 만약 이러한 대결을 실제로 60차례나 치르며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면, 이는 매우 뛰어난 무력과 실전 경험을 의미한다. 비록 자칭에 불과하다는 한계는 있으나, 이를 사실로 가정할 경우 무사시의 실전 횟수는 일본 검사들 가운데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무사시는 스스로 나무를 깎아 제작한 목검으로 대결에 임했으며, 자신의 목검에 맞을 경우 뼈가 부러지거나 두개골이 손상되어 치명상을 입거나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상대에게 함부로 덤비지 말 것을 경고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검객들이 무사시에게 도전했고, 그 결과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성품이 굳세고 상무정신이 강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무사시는 실리적인 관점도 가졌다. 무사시가 말년에 저술한 《오륜서》를 살펴보면
"니텐이치류는 긴 대도로도 이기고, 짧은 소도로도 이긴다. 따라서 대도의 길이를 이렇다 저렇다 정하지 않고, 어떠한 무기로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이 니텐이치류의 도인 것이다."
"병법에서는 무기의 효용을 알아야 한다."
무사시는 이도류 자체를 절대적인 원칙으로 고수했다기보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무기와 전술을 선택하는 실용적 이념을 지녔던 것으로 해석된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센고쿠 시대와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의 환경은 이러한 실리 중심의 전투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무사시는 실력을 기르기 위해 개인적인 훈련 및 수련을 중시하였다.
"1000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10000일의 연습을 '련'이라고 한다. 이 '단련'이 있어야 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식 개인주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무사시가 독립적인 검술가로서 개인적 전술과 군략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1612년 사사키 고지로와의 대결
고지로는 무사시의 라이벌로서 모노호시자오(物干し竿;빨래너는 장대)라는 3척에 달하는 장검인 오다치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군이 사용한 장검은 조선과 명나라 군대에 큰 위협이자 공포로 인식되었다.
《기효신서》와 《징비록》을 살펴보면 일본군과 왜구가 대형 장검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기효신서》는 명나라 절강성 해안을 침략한 왜구들이 길이 약 다섯 척에 이르는 대도를 사용해 무차별적인 살육을 저질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징비록》 역시 왜병이 오오타치를 휘두르자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졌다”고 전하고 있다.

무사시와 고지로의 대결은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있는 간류섬에서 벌어졌다.
무사시는 고지로의 장검술이 위협적이고 지원병력이 많기에 심리전을 활용하였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승부의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는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먼저 도착한 고지로는 초조해졌고 급하게 무사시를 공격하다가 심리전에 무너졌다.
고지로가 칼집을 바다에 던지자 무사시가 그 이유를 묻자, 고지로는 "너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칼을 거둘 필요가 없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결투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무사시는 “칼집을 버렸으니 너는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일갈하며 심리적 동요를 노렸다. 이어 햇빛이 고지로의 시야를 가리는 순간을 포착해 뛰어올라 목검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고지로는 무사시의 움직임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대로 머리가 터져서 죽고 말았다. 무사시도 고지로가 휘두른 장검에 맞아서 한 손의 엄지와 검지를 잃었다고 한다.

무사시는 상대방에게 예를 표한 뒤 배를 타고 달아났다. 고지로를 죽이는 데 사용된 목검은 애도를 표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 바닷물에 수장되었다.

<간류섬의 대결을 기념한 동상: 시모노세키 여행을 가면 방문해보자>
- 일본식 개인주의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개인주의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로 평가된다. 개인주의 지수 비교에서 미국(91점), 영국(89점), 프랑스(71점)에 비해 일본은 46점, 한국은 18점으로 나타난다. 2010년 연명흠(인제대학교 디자인대학)의 개인주의 감성 비교 연구에 따르면, 네덜란드(2.98)와 일본(2.94)이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으며, 중국(2.82)과 한국(2.37)이 그 뒤를 이었다. 이는 일본이 한국에 비해 개인주의적 성향이 현저히 강함을 시사한다.
집단주의도 한국과 일본은 성향이 다르다. 한국은 서로 역량을 주고 받는 관계주의 성향의 집단주의 문화를 가졌다. 이때문에 부정부패가 심하다. 반면에 일본의 집단주의는 개인이 조직의 구성 요소로서 맡은 역할을 정밀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가치로 삼는다. 이러한 특성은 장인 정신의 발달로 이어졌다.
한국 사회는 대인관계 중심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업무를 매뉴얼에 따라 엄격히 수행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유연하게 조정하는 방식을 선호해 왔다. 이러한 유연성은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빠른 적응과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으나, 동시에 부정부패나 완성도 저하(부실공사)로 이어질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선진국 단계에 접어든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최고 수준의 품질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현장 재량보다는 체계화된 매뉴얼과 정교한 관리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일본식 개인주의와 장인정신은 개인 및 국가의 역량과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발현시키며 일본 제국의 성립과 팽창을 뒷받침했고, 그 결과 일본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의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반면 조선 사회는 관계 중심의 문화가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집단 간 대립과 분열이 심화되었고, 이는 국론 분열과 부정부패로 이어져 국가적 쇠퇴를 초래했다. 일본은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어 부국강병을 이루고 외부 세계를 바라볼 여력이 있었던 반면, 조선은 집단 간 분열로 내부 다툼에 몰두하느라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대응할 수 없었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 선수들은 유소년 시절부터 개인기술과 기본기 연마를 중시하며 성장한다. 그 결과 성인이 되었을 때 팀 전체의 잠재력이 폭발하게 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유소년 시절 개인기술을 중시하면 ‘싸가지 없다’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축구 수준은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그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기술과 기본기의 격차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