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v.daum.net/v/20260111090250232

1998년 건국 50주년을 맞아 한국갤럽은 건국 이후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고, 어느 대통령이 추진한 것인지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10대 업적 중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 주도한 것이 4개나 된다. 대한민국 50년 역사상 제일가는 큰 업적은 박 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였던 새마을운동이고, 3위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7위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그리고 5·16혁명 이후의 행정개혁이 9위로 나타났다. 

박 전 대통령 통치 18년간은 통상의 대통령 통치가 아닌, 혁명가 박정희가 자신을 조국에 바친 기간이었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의 진면목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통상적 기준이 아닌 혁명가 박정희를 전제로 평가할 때만 올바르게 이뤄질 수 있다.
 

이순신과 나폴레옹을 우상으로 삼았던 소년


소년 시절 박정희는 병정놀이를 즐겼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대장 노릇하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저 아이는 군인이 되려나 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두 명의 영웅, 이순신과 나폴레옹이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가 1931년 5월 30일부터 이듬해 4월 2일까지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뒤에 군 생활하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읽었겠지만, 춘원의 소설 '이순신'은 소년 박정희에게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항상 나라를 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셋째 형 상희가 빌려 온 책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후 소년 박정희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는 신조로 프랑스를 이끌었던 나폴레옹의 도전 정신을 이어받아 개척 정신과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삶을 이어나갔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나폴레옹이 박 전 대통령의 삶에 미친 영향력을 두고, "박정희와 그의 우상 나폴레옹의 생애를 비교하면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식민지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필두로 해 두 사람의 공통점은 10여 가지에 달한다. 훌륭한 어머니의 영향력, 어린 시절의 병정놀이, 작은 키(박정희는 164cm, 나폴레옹은 167cm 정도), 사관학교 교육(나폴레옹은 두 곳의 사관학교를 다녔고, 박정희는 세 곳의 사관학교를 다님), 포병 출신, 쿠데타로 집권, 비슷한 집권 기간(나폴레옹은 16년, 박정희는 18년) 등을 포함 두 사람 각기 근대국가의 초석을 놓은 점, 이혼 경력, 비극적 죽음 뒤의 재평가도 공통적이다.

"두 사람의 본질적 유사성은 그들이 상징하는 시대정신"이라고 조갑제 대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고양된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시켜 국민군을 조직하고 이를 배경으로 전 유럽에 혁명 정신을 전파하는 전쟁을 벌였다. 박정희는 4·19혁명으로 부풀려진 국민의 기대와 열정을 장면(張勉)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정권을 탈취해 국가 근대화를 향해서 국민적인 에너지를 동원한 사람이다."

박 전 대통령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매우 존경했다. 군인 출신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구국 활동, 상무정신(尙武精神), 그리고 불굴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임기 중 이순신 장군을 '성웅(聖雄)'으로 추앙하는 대규모 숭모 사업을 추진했다.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 행사에 18년 임기 중 14차례나 직접 참석했고, 이외에 아산 현충사 성역화 사업,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 충무공 탄신기념일 제정, 현재의 100원 주화 앞면과 구(舊) 500원권 지폐에 이순신 장군 넣기 등 여러 사업을 추진했다.
 

원대한 비전 품고, 사심 없이 자기희생한 지도자


박 전 대통령은 뛰어난 지능을 가졌고, 무엇이든 신속히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었다. 집념이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지도자였다. 사심(私心) 없는 자기희생적 지도자로서 생전에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방종에 빠지지 않고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부었으며, 검소하게 살았지만 비전은 원대했다. 청렴했고,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친인척이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청와대로 초청한 적도 없으며, 단 한 푼의 재산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며, 특혜도 베풀지 않았다. 사후 남긴 것은 5·16혁명 당시 소유하던 집밖에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와 청렴성과 관련해서 많은 사례가 회자되지만 각기 한 사례씩을 소개한다. 
 

박 전 대통령에게는 어머니같이 자신을 키운 누나가 있었다. 당시 누나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렵게 살아 육영수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비서관을 통해 박 전 대통령 모르게 누나의 아들인 조카에게 택시 3대로 먹고살도록 주선을 해줬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박 전 대통령은 친구이기도 했던 담당 비서관을 파면하고, 택시를 처분함과 동시에 누나와 조카를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누나의 원망을 들은 박 전 대통령은 "누님 제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때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냉정하게 외면했다고 한다. 

미국 한 방위산업체의 사장이 한여름에 박 전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집무실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사장은 자기 회사의 무기 구입에 고마움을 표하고 작은 성의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의 내용을 확인한 후 대통령은 "사장님 하나만 물읍시다.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이 돈의 가치만큼의 무기를 가져오시오"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성공적 나라 운영의 핵심은 그의 용병술에 있다.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고, 발탁한 사람들 하나하나가 나라 운영의 기둥 역할을 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썼고, 기용한 사람은 믿고 맡겼다. 박 전 대통령은 상대가 누구든 그의 말을 늘 귀 기울여 들었다. 친인척이 이권이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

모든 정책을 사전에 잘 준비했을 뿐 아니라 상호 일관성을 유지했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란 말을 언급한 적은 없지만, 경제정책의 경우 결과적으로 볼 때 사유재산권의 확립과 선택의 자유를 바탕으로 민간의 창의성을 존중했다. 경제발전을 위해 기업가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총동원했으며, 정부-기업 협력체제를 구축해 장애 요인을 과감히 제거했다. 기업가들을 격려하고 도왔으나 뇌물을 받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현장주의자였다. 그의 현장주의 원칙은 '명령은 5%, 확인과 감독은 95%'로 확인된다. 최대 공로는 '하면 된다는 정신(can-do-spirit)'을 심어준 것이다. 이 모든 노력의 결과로 '한강의 기적'이 창출됐다. 많은 전문가가 박 전 대통령의 치세를 국가주의(statism)나 개입주의로 지칭하나, 이는 표피적 관찰이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괄목한 고도성장과 새마을운동의 놀랄 만한 성공의 배경에는 자율화·개방화의 논리가 구석구석에 배어 있으며, 채찍과 당근을 적극 활용한 시장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낙후된 나라를 가장 역동적 나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은 단연 그의 주도하에 이뤄진 압축적 산업화와 경제발전이다. 이는 절대빈곤을 탈피하고 대한민국을 현대적인 산업국가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총 4차, 1981년까지)은 대한민국을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시킨 핵심 동력이었다. 초기 계획은 수출 증대와 공업 고도화를 중심으로 추진됐으며, 정부는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자원과 인력을 특정 산업 부문에 집중시켰다. 이러한 전략적 집중은 압축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계획이 추진되면서 정책 이념은 점차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제3차 경제계획(1972~1976)에서는 초기 성장 중심 정책에서 나아가 '성장, 안정, 균형의 조화'를 이념으로 삼았고, 자립적 경제구조 달성 외에도 '지역개발의 균형'을 목표로 제시했다. 제4차 경제계획(1977~1981)에 이르러서는 '성장, 형평, 능률'을 이념으로 내세우며, '자력 성장 구조 확립'과 함께 '사회개발을 통한 형평 증진'을 목표로 삼았다. 

박 전 대통령은 애국심으로 나라를 살리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 대한민국에 천지개벽을 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는 1950~60년대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수상이 만든 '라인강의 기적'의 서독, 1950년대 후반~1980년대 초 급성장해 G2가 된 일본, 1965년 독립 이후~1990년대 리콴유 총리의 지도하에 급성장해 세계 최상위 수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자랑하는 싱가포르, 1인당 국민소득이 1990년 1만 달러에서 2021년 10만 달러로 급부상한 아일랜드 등이다. 

네 나라보다 더 열악한 여건에서 박 전 대통령은 네 나라의 경제 기적을 뛰어넘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강의 기적'을 창출했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이 82달러였었는데 1979년 1546달러로 증대했고, 국민총생산(GNP)의 경우 1961년의 20억 달러에서 1979년 630억 달러로, 수출은 같은 기간 41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증대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초 남과 북의 1인당 GNP가 82달러 대 320달러로 북한이 월등히 앞섰으나, 집권 9년 만인 1970년 남북의 1인당 GNP는 역전됐다. 

1995년 세계은행(IBRD)이 한국을 원조 대상국에서 제외했고, 한국이 2009년 1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에 24번째 회원이 됨에 따라,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됐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된 새마을운동


60대 이하는 모르겠지만 70대 이상이 향수에 젖어 어슴푸레 기억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 시절의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을 설명하기 전에 외국의 저명한 두 학자의 관찰과 새마을운동의 세계적 명성을 먼저 살펴보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삭스(Jeffrey Sachs) 컬럼비아대 교수는 "한국의 성공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세계 빈곤퇴치의 모범 사례다. 가난한 국가들이 새마을운동으로 빈곤을 퇴치한 한국을 본받으면 2015년까지 지구촌의 빈곤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2025년이면 대부분의 빈곤을 퇴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강대국의 흥망'을 저술한 역사학자인 케네디(P. M. Kennedy) 예일대 교수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됐음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개발도상국 중 대표적 승자로 한국의 박정희 시대를 지목한다"라고 해 한강의 기적이 새마을운동 덕분임을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의 치적 가운데 가장 널리 세계적으로 유포된 것은 새마을운동이다. 10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국가의 발전 모델 본보기로 삼았으며, 2013년엔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결정이 이뤄졌다. 새마을운동은 유엔과 중국의 덩샤오핑이 벤치마킹한 사업이었다. 덩샤오핑은 새마을운동 관련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해 당 간부들에게 나눠주며 적극 활용하도록 독려했다고 한다. 조선일보가 2008년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건국 60주년 특집' 여론조사에서 새마을운동(40.2%)이 건국 60년간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혔다.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8월 초 수해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서 부산으로 가는 중 철도변에 있던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을 보게 됐다. 아주 잘 정돈되고 깨끗한 마을을 보고 기차를 후진시켜서 시찰했다. 산림은 울창했고,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과 잘 닦인 마을 안길에 박 전 대통령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해 현장을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복구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마을은 1957년부터 독자적으로 마을 환경을 개선해 왔다. 이 마을과 관련한 모든 것이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신도1리는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됐다.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4000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의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먼저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부터 벌려봅시다"라고 역설했다.
 

전국적으로 불러 일으킨 "잘 살아보자"는 마음가짐


박 전 대통령은 1971년 전국 3만3267개의 리와 동에 시멘트 335부대씩을 지원했다. 그리고 지원받은 시멘트로 동네를 적극적으로 개선한 마을을 선별해 시멘트, 철강 등을 추가로 지원하고 전기를 가설해 주는 등 인센티브를 줬다. 마을 간 선의의 경쟁을 유도해 새마을운동에 적극 동참하게 했다. 1차 연도에 실적이 좋았던 1만6000개 마을에 시멘트와 철근 1t씩을 배분했다. 새마을 사업의 관심도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참여도에 따라 기초마을, 자조마을 그리고 자립마을 등 세 유형으로 구분하고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잘하는 마을에는 더 많은 지원을 해주자 자연히 경쟁의식이 생겨났다. 우수 마을에 대해서는 포상금을 두둑이 주고 마을에 전기를 설치해 주는 등 문화생활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을의 좁은 도로를 넓히고 교량을 건설하거나 둑을 개보수해 마을의 근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전국 농가의 초가지붕이 사라지고 함석과 슬레이트, 기와 등으로 대체됐다. 1979년에는 전국 농가에 상수도가 설치됐고 식수가 원활히 공급돼, 콜레라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도 사라지게 됐다. 

전국적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소득증대 사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환경개선은 물론 주민들의 사고를 혁신적으로 바꿨으며 소득도 증대됐다. 실제로 농가의 연평균 소득은 1970년 25만 원에서 10년 후인 1979년 223만 원으로 10배 정도 증가했다. 새마을운동은 도시와 직장으로 확대돼 전 국민이 근면, 자조, 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새마을운동은 가난한 농촌을 구하기 위한 사상 및 계몽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왜 성공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요인은 차별적 지원이었다. 자칫 재정지원에 의한 정부의 개입은 부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운동이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은, 차별적 지원이 더 잘하게 하는 유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웃 마을과 새마을 혁신을 경쟁하는 '기업가'로서 새마을 지도자를 양성한 것이다. 행정체계 속의 이장과 별개로 각 마을에는 새마을 혁신을 주도하는 '새마을 지도자'를 뒀다. 새마을운동은 마을을 공유재산과 공동사업의 주체로, 즉 '법인'으로 재편성했는데 새마을 지도자는 '법인'의 지도자였다. 행정을 담당하는 이장이 아니라 새마을 지도자가 마을 혁신 경쟁을 주도했다는 것은, 민간기업이 중화학 공업화를 수행했던 것과 비슷하다.

새마을운동은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농촌의 소득이 증대되고 마을이 정비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발전하면서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국민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면서 새마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했고, 이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한국이 근대화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세계적 전략가이자 미래학자 칸(Herman Kahn)은 1976년에 출판된 저서 '세계경제발전, 1979년과 그 이후'에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을 언급하면서 "한국이 10대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산업화 없이 민주화 없어…민주화 실질 공로는 朴
 

최근 지식인과 정치지도자 대부분이 "우리는 먼저 '산업화ʼ에 성공했고 이어 '민주화ʼ에 성공했기에 이제 '선진화ʼ를 지향하면 된다"라고 주장하고, 언론이나 일반인들도 대체로 이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근거로 그가 독재자였으며, 인권을 탄압해 대한민국 민주화에 크게 역행한 것으로 지적하기 일쑤다. 

우리의 현대사를 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세 단계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상 역사학파나 마르크스(K. Marx)주의의 역사 발전 단계론적 사고와 맥을 같이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인류 사회가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사회-중세 봉건사회-근세 자본주의 사회-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해 나간다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세계관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잘못된 견해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최근 역사를 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세 발전단계로 인식하는 것도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먼저 민주화(democratization)에 대해 살펴보자. 유신체제로 대표된 굴곡된 비(非)민주적 통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우리는 '민주화운동ʼ이라 불러왔다. 1980년대에 '군사독재ʼ에 항거해 대통령직선제가 쟁취되고 유신체제가 사라진 것을 우리는 민주화라 인식한다. '문민정부ʼ와 '국민의 정부ʼ 탄생으로 민주화가 완결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철창ʼ을 오간 사람들을 '민주화 투사ʼ라 부르고, 그들 일부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보상하고 포상까지 했다. 민주화 투사들이나 그 후예들이 지난 40여 년간 보여준 반민주적 작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체성 부인과 국론 분열을 초래해 대한민국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진짜 주인공은 건국과 전쟁 와중에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려 고군분투한 이들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자체가 50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민주화 작업이었다. 이후 박 전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시대를 거치면서 탄생한 다소 굴곡된 정치체제를 바로잡은 것이 한국 민주화의 핵심이고 이를 대단한 것이라 인식하는 건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인류 역사에서 공산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그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위업이 없었다면 1980년대 민주화가 가능했을까. 정부 수립 후 2년이 안 된 시점에서 북한 공산 세력이 무력도발을 했을 때, 이를 격퇴시킨 그 고군분투가 어쩌면 건국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두 번째 초석이 아닌가. 언제나 남한을 적화시키겠다는 야욕에 불타 있던 북한 공산 세력에 대항해, 박 전 대통령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하기는 할는지 의문이다. 

산업화(industrialization)라는 말 자체는 분명한 개념이다. 그러나 산업화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연계해 사용할 때는 주의를 요한다. 박 전 대통령 시대에 산업화가 달성됐다고 보는 것이 통상적 인식인데 과연 그러한가. 단순히 산업구조의 변화만을 살피면 산업화는 1980년대 후반기까지 진행됐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 경제는 이른바 '탈산업화(deindustrialization)ʼ 과정이었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산업화가 달성됐다는 것은 물론 단순히 산업구조가 변화됐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존이 문제였던 보릿고개를 넘어 삶의 질에 관심을 가질 만큼 소득이 증대한 현상을 산업화로 표현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용어나 개념을 찾아야지 산업구조의 변화를 지칭하는 산업화란 용어나 개념을 사용해 박 전 대통령의 치적을 산업화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고 단군 이래 최대 과제였던 우리의 가난과 빈곤을 해결하고자 했다. 보릿고개를 넘어 삶의 질에 관심을 가질 만큼 소득이 증대한 현상을 산업화로 정의했을 때, 그 산업화는 저절로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배고픔이 해결돼야 민주화가 가능하다. 민주화는 산업화를 가져오지 못하지만, 산업화는 민주화를 가져온다. 18세기 초중반에 산업화가 진행됐기에 18세기 후반 시민혁명이 전개됐다. 산업화로 소득이 증대되면 자연스레 민주화 욕구가 분출된다. 1980년대 빈곤에서 벗어나 먹고살 만하게 되자 비로소 중산층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민주화를 위해 아스팔트로 나섰던 것이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결코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가 인권탄압을 했느니 독재자니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미래학자 토플러(Alvin Toffler)는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자유화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된다. 이를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박 전 대통령이 영도한 경제발전에 의해 촉발됐고, 민주화 세력 자체도 소득 증대에 따라 양성됐기에,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한국 민주화의 실질적 최대 공로자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외친 혁명가 박정희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어떤 인물로 기억되길 바랐을까? 어떤 칭호가 그에게 가장 어울릴까? 그가 맡은 직책 그리고 그가 한 일과 연관 지을 때, 박정희는 사안에 따라 '대통령' '정치가' '지도자'로 지칭하면 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삶을 나름대로 관조해 본 필자로서는, '혁명가' 박정희라는 칭호가 가장 어울린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를 '혁명가'로 바라볼 때만이 그의 삶이 전체로 그리고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연설, 정책 기조, 남긴 어록을 통해 그가 바랐던 자신의 모습을 크게 세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했던 대한민국을 '한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대국으로 이끈 지도자, 국민을 보릿고개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준 지도자, 조국 근대화를 이룩한 지도자다. 둘째, 냉전 시대에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체제를 수호하고 국가안보를 굳건히 한 강력한 지도자, 강한 국가 건설의 설계자, 나라를 지킨 강력한 지도자다. 셋째, "우리에게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다. 선진국에 1세기 뒤떨어진 것을 우리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회복하자"라는 어록에서 보듯,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국민을 독려한 지도자,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과감하게 추진한 행동하는 지도자,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긴 실천가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말은 사실 일본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3걸(傑)' 중 한 명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한 말이다. 오쿠보의 부국강병 정책과 사명을 깊이 연구한 박 전 대통령은 두 계제(階梯)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외쳤다. 첫째, 1968년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때 반대가 심하자 "나의 시대에 경제발전을 위해 이 일을 하지 못한다면, 후일 나의 무덤에 침을 뱉어도 좋다"라며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둘째, 운동권 민주화 신봉자들, 호시탐탐 적화 야욕으로 남한의 전복을 노리는 공산주의자들, 사농공상의 뒤처진 사고에 함몰된 먹물들에게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유신체제밖에 없음을 알리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외치며 고독하게 유신을 선언했다. 

필자의 서재에는 박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을 때 사온 휘호(揮毫),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해"가 걸려 있다. 그는 1963년 8월 30일, 군인으로서 마지막 전역식에서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말했다. 군복을 벗고 정치에 투신할 때부터 이와 같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헌신을 강조해 왔다. 유신체제하에서 국정 운영에 대한 논란이 심화하던 시기인 1974년 5월 20일에 쓴 휘호로, 이것은 자신의 통치행위가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한 것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외국 지도자들, 온통 박정희 얘기뿐"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1월 대통령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박 전 대통령의 '수출 지상주의'와 '경제성장에 대한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외국에 다녀보니 외국의 지도자들이 온통 박 전 대통령 애기뿐이더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찬사는 차고 넘친다. 먼저 학계나 전문가 집단이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 전 대통령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이다."(피터 드러커 뉴욕대 교수) 

"누구도, 심지어 슘페터도 한국이 첨단 전자 기술 분야에서 미국, 일본과 어깨를 겨루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대추진(the big push·유신체제에서 중화학공업화) 후 한국은 종합적 산업구조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그것은 대성공이자, 한국의 독립 선언이었다. 한국인들은 이후로 어깨를 펴고 자신만만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바로 이것이 박정희를 전후(戰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로 만들고 있다."(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됐음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개발도상국 중 대표적 승자로 한국의 박정희 시대를 지목한다."(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 

"박정희의 역사적으로 가장 큰 공헌은 그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한국을 저개발의 농업 국가에서 고도로 성장시켜 공업국가로 변모시킨 것이다."(엘리스 엠스덴 MIT 교수)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지도자이었다."(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나의 인식과 평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립된 것이다. 하나는 그의 탁월한 정치적 경륜과 철학에 근거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훈훈한 인간성에서 느껴진 것이다. 그에게서 느낀 나의 감정은 자기 조국을 위해서 진정으로 노심초사하는 정치인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을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로 지칭하는 데 조금도 인색할 수가 없다."(리처드 스틸웰 전(前) 유엔군 사령관)

 

최광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석좌교수·前 보건복지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