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벌인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은 조선이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맺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여 마침내 한일합방으로 이어지게 만든 뼈아픈 역사의 사변이다. 다른 측면에서는 러일전쟁 막후에서 일본을 지원하며 전쟁 이후에 획득한 성과물인 한반도와 만주를 일본과 공유할 것을 기대했던 미국은 막판에 일본의 변심으로 그 뜻이 좌절되자 일본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이번 회에서는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미일 간 대립이 심화되는 계기를 만들며 태평양전쟁의 단초가 된 ‘가쓰라·해리먼 협정’을 둘러싼 전후 전개 과정을 소개하겠다.

‘철도왕’ 해리먼의 분노

“두고 보시오. 일본은 10년 안에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이오.”

미국이 중재에 나서 성사된 러일전쟁 종전 협상인 포츠머스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1년이 지난 1906년 9월 어느 날, 미국의 ‘철도왕’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은 자신의 사무실을 방문한 일본인 손님 앞에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남만주철도(중국 장춘~뤼순) 공동 경영을 위해 자신과 가쓰라 타로 총리가 맺은 ‘가쓰라·해리먼 협정’을 일본 정부가 일방적으로 파기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일본인은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였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에 최신예 군함을 구입하는 등 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발행한 외평채를 미국과 영국에 판매하는 책임을 맡았던 장본인이었다.

해리먼은 포츠머스강화조약 체결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1년 전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정부에 1억엔 규모의 자금을 투자할 테니 그 대신 조선 철도와 남만주철도를 연결해서 공동 소유, 공동 경영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1억엔이란 돈은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상당한 규모의 액수였다.

그는 장차 미국이 태평양과 유라시아대륙의 통상 패권을 장악할 것을 목표로 삼아 미국 대륙, 태평양, 일본, 만주, 시베리아, 유럽, 대서양을 연결하는 세계 일주 교통 네트워크를 확립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 첫 단추가 일본의 남만주철도 경영에 공동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남만주철도와 연결되는 시베리아철도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측과 협의하여 매수하겠다는 계산도 서 있었다. 이는 해리먼 개인의 구상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추진하는 해외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러일전쟁으로 국가재정이 파탄 상태에 놓여 있어서 남만주철도를 개설하고 이를 운영할 만한 자금 여력이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원로들과 가쓰라 타로 총리는 해리먼의 1억엔 출자 계획을 크게 반겼다. 그 결과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와 해리먼 간에 가계약 형식의 예비 협정각서인 ‘가쓰라·해리먼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이를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가 나서서 “일본이 20억엔의 자금과 10만여 명이 흘린 피의 댓가로 쟁취한 만주 땅을 미국인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라는 국민감정을 명분으로 삼아 합의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만주의 이권에 미국을 참여시키지 않고 독식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속내였다.

일본의 욕심, 친구를 적으로 돌리다

러일전쟁 당시에 미국은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암암리에 자금난에 허덕이는 일본을 지원하기 위해서 자국 기업인들이 일본의 외평채를 구입하도록 유도했다. 여기에 제이콥 시프 등 유대계 미국인 금융가들이 앞장섰다. 일본이 발행한 약 8억엔 규모의 외평채 대부분을 이들이 나서서 구매해 줬다. 이 과정에서 시프와 동업 관계였던 해리먼도 시프의 권유를 받아 500만달러 규모의 일본 국채를 구입하여 일본에 힘을 실어줬다.

일본의 승리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막후 중재 역할과 시프 등 유대계 미국 금융인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미국 정부와 미국의 금융인들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사전에 일본 측과 만주에서의 이권을 공유하자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 측의 일방적인 협정 파기는 그동안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던 미국인들에게 ‘일본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각인시키며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는 일본이 ‘가쓰라·해리먼 협정’ 파기를 일본 각의에서 결정한 3일 후에 유진 헤일 상원의원에게 서한을 보내 “잽(일본인을 비하하는 표현)은 러일전쟁 승리에 취해서 무척 건방지게 행동한다. 그들은 태평양의 파워게임에 참여하려 하고 있는데 그 위험성은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상으로 높아 보인다. 우리는 이에 대비해서 해군을 증강해야 한다”라며 그동안 친일 성향이었던 태도를 바꿔 일본에 대해 반감과 강한 경계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포츠머스 러일전쟁 강화조약에 참석한 러시아대표단(왼쪽)과 일본대표단(오른쪽). 중재자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대통령(가운데). [출처 : 야후재팬 화상]


미국의 대일 보복

일본의 약속 파기가 몰고 온 후과는 컸다. 미국의 대일 보복전이 시작되면서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조례가 제정되어 공립학교에서 일본인 아동 입학이 불허되었다. 1924년에는 일본인 배제 이민법안이 미 의회 상하 양원을 통과했다. 미국은 영국과 공동으로 일본에 대해 만주의 문호 개방, 통상의 기회균등을 주장하며 압박에 나섰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윌리엄스 태프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태프트 정권의 녹스 국무장관은 해리먼의 남만주 철도 구상을 이어받아 1909년, 유럽 열강과 일본, 러시아에게 만주 철도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4개국을 포함한 6개국 자본으로 구성된 신디케이트가 매입해 공동으로 경영하자는 ‘만주철도중립화안’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한다.

일본은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설정하고 러일협약과 영일동맹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만주의 이권을 지키려고 했다. 미국은 강력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영국과 일본의 관계를 끊어놓기 위해 제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열린 워싱턴회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으로 구성된 4개국 조약을 체결하고 영일동맹은 갱신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해 영일동맹은 소멸됐다.

일본은 에도막부 붕괴와 메이지유신 탄생의 숨은 조력자이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일본의 든든한 우군으로서 군국식민주의 일본 외교의 ‘빅 브라더’였던 영국을 잃게 되자 외교적 고립에 빠져들었다. 그 이후 일본은 만주와 중국침략 그리고 나치 독일과 파시즘의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국가의 길로 폭주했다. 그리고 군국주의 일본은 자국민 300여만 명의 희생과 주변 국가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면서 제2차세계대전 패전국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외교 평론가 오카자키 히사히코는 일본 외교 실패의 원점에 ‘가쓰라·해리먼 협정’ 파기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과거를 돌이켜보면 고무라 외상의 술책은 일본의 운명을 크게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라며 일본 외교의 실책을 비판했다.

필자는 이번 글을 통해 오늘날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서 외국과 맺은 협약, 협정, 조약의 엄중함을 인식하면서 자칫 깃털처럼 가벼운 외교 행태가 국가 존망을 뒤흔들 수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교훈으로서 상기시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