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3년 전, 아마추어 수학자 커뮤니티 <시그마>의 채팅 로그로 시작된다. 닉네임 ‘오일러의 눈물(이노도)’과 ‘무한의 끝(한지만)’.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두 사람은 매일 밤 리만 가설(Riemann Hypothesis)의 제타 함수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그들에게 세상은 불완전한 3차원의 공간일 뿐이었고, 오직 수식만이 완전한 진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이해자였던 시간.
하지만 노도는 점점 붕괴하기 시작했다. 채팅창에 올라오는 그의 수식은 점차 논리를 잃고 비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숫자들이 나를 쳐다봐.", "소수(Prime Number)가 비명을 질러." 지만은 화면 너머 노도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그를 말리려 했지만, 노도는 "드디어 영점을 찾았어. 그들이 나를 막으러 올 거야"라는 마지막 로그를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며칠 뒤, 뉴스가 세상을 강타했다. '수학 천재 대학원생, 동료 살해 후 방화 시도'. 범인은 이노도였다. 그는 피해자가 자신의 증명을 훔치려 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정은 심신미약보다는 잔혹성에 초점을 맞췄고 여론은 그를 '미치광이 살인마'로 몰아갔다. 결국 노도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지만은 뉴스 속에서 텅 빈 눈으로 호송되는 노도를 보며 전율과 공포, 그리고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3년이 흘렀다. 지만은 더 이상 수학 난제에 도전하지 않는다. 노도의 파멸을 목격한 그는 '미치지 않기 위해' 가장 현실적이고 규율이 강력한 직업, 교정직 공무원을 택했다. 제복, 점호, 열쇠 소리. 그는 통제된 삶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밤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수학 노트를 꺼내 보며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중, 지만은 근무지 이동 신청 기간에 '청주교도소'를 지망한다. 그곳은 장기수와 중범죄자, 그리고 사형수가 수용되는 곳이다. 동료들은 기피하는 곳을 자원하는 그를 의아해하지만, 지만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수용 번호 4028번, 이노도. 그가 정말 미쳐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날 우리가 본 것이 진실이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청주교도소 보안과로 부임한 지만은 사동 순찰을 돌던 중 드디어 노도와 마주했다. 독방 끝, 철창 너머에 앉아 있는 노도의 모습은 처참했다. 과거 채팅방에서 느껴지던 날카로운 지성은 온데간데없고, 강력한 향정신성 약물에 취해 초점을 잃은 눈동자, 앙상하게 마른 몸, 그리고 멍하니 침을 흘리는 모습뿐이었다. 그는 지만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지만은 담당 교도관으로서 그를 대하려 노력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연민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노도는 '살인마'라는 낙인 때문에 다른 교도관들에게도 은근한 무시와 학대를 받고 있었다. 배식 때 국물을 쏟거나, 일부러 찬바람이 드는 시간에 운동을 내보내는 식이었다. 지만은 규정을 핑계로 그런 괴롭힘을 막아주지만, 노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만은 절망했다. "나의 오일러는 죽었구나."
어느 날 야간 순찰 중, 지만은 노도의 독방에서 기이한 소리를 듣는다. 사각, 사각, 사각. 손전등을 비추자 노도가 벽에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고 있었다. 펜도 없는 그가 사용한 것은 자신의 손톱이었다. 하얀 벽지에 핏물과 손톱자국으로 새겨진 것은 낙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복소평면 위에서 춤추는 제타 함수의 전개식이었다.
지만은 숨을 멈췄다.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순간에도, 노도의 무의식은 여전히 수학을 붙들고 있었다. 그 처절한 몸부림을 본 순간, 지만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했다. 그는 교도관이기 이전에 '무한의 끝'이었다. 지만은 CCTV의 사각지대를 확인하고 배식구를 아주 조금 열었다. 어둠 속에서 노도의 웅크린 등이 보였다. 지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과거 그들이 수백 번도 더 주고받았던 그들만의 암호를 속삭였다.
"...임계선 위의 모든 영점은, 실부(Real Part)가 2분의 1이다. 맞습니까?"
그 순간, 죽은 듯이 멈춰있던 노도의 어깨가 움찔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식구 쪽을 바라보는 노도의 눈. 탁했던 동공에 아주 잠시, 생생한 빛이 스쳤다. 그것은 광기가 아닌 지성의 빛이었다. "...무한...의 끝?" 갈라진 목소리로 튀어나온 닉네임. 지만은 울컥 치솟는 감정을 삼키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 나야. 증명하러 왔어."
다음 날부터 둘의 관계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겉으로 보기에 지만은 원칙주의자 교도관이고, 노도는 얌전한 사형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은밀한 교류가 흐른다. 지만은 검방을 핑계로 노도의 방에 들어가, 몰래 다 쓴 볼펜 심 하나와 꼬깃꼬깃한 종이 조각들을 쥐어주었다. 노도는 종이를 받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수식을 적어 내려갔다. 지만은 그 종이를 회수해 당직실에서 검토하고, 자신의 풀이를 덧붙여 다시 돌려주었다.
이 '쪽지 교환'은 노도에게 최고의 치료제가 되었다. 수학에 집중하는 동안 노도는 환청에서 벗어났고, 약물 부작용도 줄어들었다. 지만 역시 무채색 같던 일상에 활력을 되찾았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것은 수식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서로를 향한 구원이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보안과의 실세이자 악질적인 교도관 '박 계장'이 지만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신입이 사형수, 그것도 제일 골치 아픈 이노도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김 교도, 그 새끼 살인마야. 사람 죽이고 불 지르려던 놈이라고. 너무 정 주지 마."
박 계장의 경고에 지만은 태연한 척하지만 긴장했다. 어느 날, 박 계장은 지만을 시험하듯 일부러 노도의 운동 시간을 줄이라고 명령했다. 지만은 명령에 따르는 척하며, 대신 운동장 구석, CCTV가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로 노도를 데려갔다. 그 짧은 10분, 둘은 처음으로 철창 없이 마주 보았다. 노도가 물었다. "왜 나 같은 놈한테 이렇게까지 합니까?" 지만은 노도의 흐트러진 수의 깃을 정리해주며 답했다.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아니까."
비가 쏟아지는 밤, 천둥소리가 교도소를 울렸다. 그 소리는 노도에게 과거 살인 사건 당일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불타는 연구실, 비명, 사이렌 소리. 노도는 발작을 일으키며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비상벨이 울리고 기동타격대가 출동하려 하자, 지만이 먼저 뛰어 들어갔다. 진압봉을 든 다른 교도관들이 노도를 제압하려 할 때, 지만은 몸을 던져 그들을 막아서고 노도를 껴안았다. "괜찮아, 이노도! 괜찮아! 여기는 감옥이야.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숫자들은 여기 없어!" 지만의 품에서 나는 익숙한 섬유유연제 냄새,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 노도는 지만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이내 그의 품에 무너지듯 안겨 오열했다.
이후, 둘 사이의 감정은 급물살을 탔다. 이제는 수학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소한 안부를 묻는다. "밥은 먹었습니까?" "오늘 날씨가 춥습니다." 도서 대여 목록에 노도가 좋아하는 시집을 슬쩍 끼워 넣는 지만, 지만이 순찰을 돌 때면 쇠창살에 매달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노도. 다른 수용자들은 노도가 교도관에게 아부를 떤다고 수군대지만,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형수'와 '교도관'이라는 신분의 벽은 절대적이었다. 지만은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자각하지만, 이것이 노도에게 희망 고문이 될까 두려워했다. 노도 역시 지만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마음을 억누른다. "우린 수렴할 수 없는 평행선 같아요." 노도의 자조적인 쪽지에 지만은 답을 하지 못했다.
연말이 다가오고, 교도소 측은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해 대규모 행사를 기획했다. <교정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열린 음악회>. 특이하게도 수용자와 교도관이 한 팀을 이루거나, 교도관이 장기자랑을 하는 코너가 마련되었다. 지만은 평소라면 절대 참가하지 않았을 행사지만, 상품으로 걸린 '특별 접견권'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라면 노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만이 고른 노래는 대중가요였지만, 가사를 조금 개사했다. 일반인들이 듣기엔 평범한 사랑 노래지만, 수학을 아는 사람, 특히 노도가 듣는다면 명백한 '고백'이자 '암호'가 되도록. '보이지 않는 점을 이어 선을 만들고, 끝없는 무한 속에 너를 가두네. 증명할 수 없는 이 마음은 허수 같아서, 현실엔 없지만 내 안에 가득해.' 지만은 야간 근무 때, 노도의 방 근처 복도에서 작게 흥얼거리며 연습했다. 감방 안에서 그 소리를 듣는 노도. 그는 지만이 부르는 노래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직감했다. 차가운 독방 바닥에 누워 지만의 목소리를 이불 삼아 덮으며, 노도는 생애 처음으로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게 되었다.
행사 당일. 강당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지만, 곳곳에 배치된 교도관들과 수갑을 찬 수용자들의 모습이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사형수인 노도는 맨 앞줄 구석, 감시가 삼엄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수많은 무대가 지나가고, 사회자가 지만의 이름을 호명했다. "보안과 김지만 교도!" 환호와 야유가 섞인 소음 속에서 지만이 무대에 올랐다. 제복을 단정하게 입은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조명이 그를 비추고, 강당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지만의 시선은 오직 한 곳, 4028번 이노도를 향했다.
반주가 시작되고 지만은 노래를 불렀다. 화려한 기교는 없다. 하지만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이 마이크를 타고 강당을 채웠다.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노도의 가슴에 박혔다.
“세상이 틀렸다고 말해도 / 나는 너의 답을 알아 / 0으로 수렴하는 우주 속에서 / 너는 유일한 나의 상수야.”
노도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하지만 노래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는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무대 위 지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두 사람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교도소의 높은 벽도, 수갑의 차가운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서로의 존재만이 선명했다. 지만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사랑해. 네가 어떤 모습이든, 세상이 널 뭐라 부르든.'
노도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이 아닌, 벅차오르는 환희와 감동의 눈물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정적이 흐른 뒤,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 지만은 무대에서 내려오며 땀에 젖은 손을 꽉 쥐었다. 자신의 증명이, 성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