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장군의 자서전 '노병의 한'


김석원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망해가는 나라여서 제대로된 군사장비가 하나도 없었기에 도수교련만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박승환 참령은 자결하였고 육군무관학교 재학생들은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위탁교육 보낸다는 방침에 따라 유년학교(중학교)로 편입이 되었다. 김석원은 나이 어린 일본인 동급생들에게 "강꼬로"라는 조선인 비하발언을 듣고 지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의지를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기왕에 군인이 된 바에야 무엇을 하더라도 일본인보다 잘한다는 소릴 들어야 한다." 

일본육사에서 조선인 차별은 거의 없었고 성적대로 졸업시켜주었다. 동기 홍사익은 수재라서 김석원보다 빨리 진급했다. 1915년 12월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연대장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서 중기관총 교관으로 2년간 복무했다. 1931년 만주사변에서 대위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다.

조선인 상관이라고 해서 일본인 부하가 반발하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일전쟁때 베이징 부근 남원 전투에서 아이가와 군조(중사)가 적탄을 몸으로 막아주고 대신 전사했다.

"남원전투에서 나를 살려준 아이가와 군조는 입원한 지 10일 후 천진 육군병원에서 내 손을 꼭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1938년 2월에는 산서성 동원고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하진/직산 등 산서성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며 중국군을 격퇴시켰다. 김석원은 150회 이상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이었다.





전쟁공훈으로 상금 700원(1년치 연봉)을 받아 200원은 빚 갚고 500원으로 육영 사업을 시작했다. 이태원보통학교 (1933)와 성남고등보통학교(1937)를 만들었다. 모금도 하고 군용지를 무상 이용받는 로비도 했다. 형무소에서 책걸상을 중고가로 매입했다. 성남고를 만들 때는 조선인 사립학교 인가가 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중일 전쟁이 나서 전선으로 발령이 나자 미나미 총독을 만나 "이번에 전쟁에 나가면 살아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니 소원 하나만 들어달라, 학교 인가 좀 내달라"고 청탁하여 뜻을 이루었다.​

원윤수와 함께 원석재단을 만들어 성남고를 만든 것인데 이때 일본인 고바야시(원윤수와 동업한 광산업자)가 50만 원이나 기부하고 재단이사도 맡아주었다. 교장은 반드시 일본인이어야 한다고 해서 아베라는 예비역 장군이 되었는데 그가 김석원이 배일사상을 고취했다고 모함하고 조선인 선생을 해고하고 일본인 선생으로 교체하는 등 전횡을 일삼아 괴로웠다. 


- 해방 후
해방 후 성남고 운영만 하고 싶었는데 이승만이 "그 사람은 아직도 입대안하고 있습니까?"하고 압박을 가해서 할 수 없이 1949년 (56세)에 입대하여 제1사단 초대 사단장을 했다. 가보니 장성과 간부들이 병사들 먹을 쌀도 횡령해서 애들이 굶주리고 아주 개판이었다. 채병덕 참모총장 (김석원의 22년 후배)과 일부 인사들이 대북교역하면서 시멘트 같은 전략 물자를 보내고 명태를 받아다 파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전부 압수하고 관련자 구속했다가 병사들 보급품과 부식으로 나눠줬다. 그러는 동안 정작 자신의 식탁에는 명태를 일절 올려 놓지 않고 오로지 장병과 노무자들한테만 먹이게 했다.



<부상당한 장병과 노무자들을 위로하는 김석원 장군>



이승만 대통령이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석원을 불러들여 화해하라고 종용했는데, 이 자리에서 얼버무리지말고 시비를 가려달라고 버텼다. 그 덕에 9개월 만에 예편 당했다. 


1사단장 시절 38선 개성 인근에서 치열한 고지전을 벌였다. 이때 육탄10용사 사건도 있었다. 부관에게 일본도를 들게 하고 전투시 검을 빼들고 고함을 지르고 진두지휘했다. 

깜짝 놀란 채명신 대위는 소대장에게 고지를 맡기곤 쏜살같이 내려갔다. 산 밑엔 벌써 김 사단장이 오고 있었다.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카이저 수염을 만지며 뒤엔 일본도를 든 부관을 거느린 채 차에서 내려 고지로 올라오고 있었다.​

“각하, 올라오시면 위험합니다. 아직도 적이 치열한 사격을 해오고 있습니다!” 당시 사단장은 계급이 대령이어도 각하란 칭호를 붙이던 시절. 난 거수경례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하나 날 처음 보는 그는 내 말엔 아랑곳 않는다. “음, 자네 이름이 뭔가?” “네, 대위 채명신입니다.” “그래 비둘기 고지를 탈환했다고. 잘 했다. 정말 잘 했어. 나 거기 한번 올라가 보자.”​

“아니, 각하. 올라오시면 위험합니다. 아직도 적탄이.......” 그러나 나는 내 말을 채 맺을 수 없었다. 그가 내 말을 끊은 탓이다. “괜찮아, 나 김석원이야.”







6.25가 발발, 수도사단장과 3사단장을 했다. 잦은 인사교체로 실제 보직은 몇 달도 수행 못했다. 진천전투와 포항전투에서 오합지졸로 후퇴만 하는 국군을 카리스마로 통제했다. “장관님. 김석원은 이제 일선으로 나갑니다. 소직(小職)이 전사하면 그 뼈다귀를 북을 향해서 성남중학교 뒷산에 묻어주십시오”

모두들 전의를 상실하고 도무지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나는 지프를 내려 군도를 뽑아 들고 하늘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국군장병과 경찰관들은 들으라. 내가 이번에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석원이다. 국군장병과 경찰관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겠거늘 지금 너희들이 가는 곳은 어디냐? 쫓기고 밀리어 현해탄 물속으로라도 뛰어들 생각이냐? 지금 총을 든 너희들이 여기까지 쫓겨오는 바람에 뒤에 있는 너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 줄 아느냐? 돌아서라 어서 대한의 아들들아. 돌아서서 북으로 가자. 이 김석원이가 앞장 서서 갈테니. 너희들도 같이 가서 나와 함께 싸우자." 이에 900여명의 군경들이 김석원을 따라서 진천으로 갔다. 



전투 중인 문안산 코 앞에 사단본부를 옮기고 사단장 명령없이 후퇴하면 총살이다라고 엄명을 내렸다. 미군 고문관이 지휘소가 최전선에 있으면 위험하다, 잘못되면 사단지휘는 누가 하냐고 뒤로 물리라고 권유했다. 김석원은 "38선에서 여기까지 쫓겨온 패잔병을 후방에서 지휘하면 금방 무너진다"고 거절했다. 군도를 빼들고 '문안산 고지를 점령 못하고 후퇴하면 다 같이 죽자'고 외치고 공격했다. 




“조국과 민족은 5000년 역사 이래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다. 과거 우리 사단 장병들은 깊은 생각 없이 도망치는 사단이라 경멸당해 왔지만 김석원 내가 이 사단에 서 있는 한 이제 그러한 치욕의 호칭은 없다. 도망가는 22연대라는 말이 있다. 도대체 도망가면 이 어려움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늘로? 땅속으로? 갈 데라곤 바다 속에 뛰어드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조국을 위하여 싸우다 죽을 것이냐, 비겁하게 바다로 뛰어들 것이냐를 결정하라. 건곤일척 의연한 결의는 여러 장병들에게 달렸으니 나를 따르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요 나를 비웃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음 밖에 없다.”

한미 연합군의 전선 조정을 위해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을 3일간만 진천에서 저지해 줄 것을 희망했고, 김석원과 부하 장병들은 진천을 7일간 사수해 필요 이상의 시간을 벌었다. 김석원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은 후속 전투에서도 계속 시간을 벌어줘 낙동강 방어선을 충분히 구축할 수 있었다.


6.25 초기 김석원 장군께서 수도사단장으로 계셨을 시, 다른 사람이 관찰하니 사단장이 적탄이 난무하는 최전방으로 도보로 갈 때는 사단장이 제일 앞에 서고 다음이 전속부관 그 뒤에 미군 고문관이 일렬종대로 따르는 것을 보고 이상해서 미 고문관에게 문의하니 사단장이 가는 데로 따라가면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기 때문에 적 사격에 안전함으로 뒤따른다고 답변하였다.


포항철수작전때 피난민과 주민들이 군의 철수를 알게 되면 민심이 동요할 뿐만 아니라 주민 속에 끼어있는 첩자로 인해 정보가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마을에 헌병을 보내 “해변에서 사단장이 연설을 할 테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라.”고 연락하여 주민들이 모이자마자 그대로 배에 태워버렸다. 이렇게 신중을 기하였음에도 주민 중에는 철수를 눈치 챈 자도 있었는지 송아지까지 몰고 나와 배에 오르려 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미군이 송아지의 승선을 막으려하자 사단장은 “우리는 송아지가 있어야 농사가 되오.”라고 하면서 승선시켜 미군이 혀를 내두르는 모습도 있었다.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주력이 빠진 다음에 참모장 김응조 중령과 G-3 박경원 대령을 대동하고 지프차를 달려 미호천의 팔결교를 넘어 오근장(청주 북쪽 4km)에 당도할 무렵에 한 병사가 “라이트를 끄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운전병이 우물우물하면서 라이트를 끄지 않자 달려들면서 “라이트를 끄지 않으면 쏜다”고 위협하자 사단장은 차에서 내려 “용감한 사병이로구나”라고 어깨를 두들기면서 칭찬하고 규정을 지키지 않은 운전병을 꾸짖었다.

1960년 이후로는 성남고 학교 사업에 전념하였다.





어느 날 모 초등학교 교정에서 김석원 장군의 훈시가 있었는데 "전투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다가 최후에 적의 심장을 꿰뚫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라고 말씀하셨다. 최전선에서 군도를 쥐고 지휘하던 그 분의 강인한 인상은 당시 군인들의 눈에 선하게 남아있다. 고작 몇 달 같이 함께한 부하들이 김석원의 용기와 리더십에 감복하여 ''사단장님이라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하고 다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