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사람들이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을 가졌다. 이로인해 근대시대 이후 세계 제국이 된 미국과 자주 충돌하였다. 서막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때 평양 군민들이 화공으로 셔먼호를 격침시키고 미국인 선원 19명 전원을 살해한 것이다. 물론 셔먼호 선원들이 난폭하게 행동한 것이 원인이었지만 단 1명의 포로도 잡지 않고 모두 죽인 것은 북한 사람들의 호전성을 엿볼수 있다.







- 푸에블로호 사건
1968년 1월 미국의 첩보함 '푸에블로호'는 일본에서 출발해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소련의 극동기지들을 정찰한 뒤 북한 동해안을 살펴보려고 했다. 


<푸에블로호>



당시 미 국방성은 푸에블로호 함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북한 해안선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서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고,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라!" 굉장히 위험한 임무였던 것이다. 푸에블로호는 11차례 북한영해를 침범하면서 정찰을 하다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게 나포되었다. 배를 돌려서 도망치려고 하자,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가 마구 발포하였다. 이과정에서 1명이 사살되고 82명의 선원들이 포로로 잡혔다.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외신을 타고 전세계로 퍼졌고 미국은 격분하였다. 특히 푸에블로호는 최신식 정보장비들을 탑재하고 있었다. 배안에 통신감청방이 3중 잠금장치로 따로 설치되어 있어서 엄청난 기밀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의 폭격을 받자 통신감청 요원들은 도끼와 망치로 장비들을 파괴하고 기밀문서들을 소각하거나 바닷속에 버렸지만 절반은 북한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미국의 정치인들과 UN대사는 "공해상에서 푸에블로호를 납치한 것은 전쟁 행위이며 의도적이고 계획된 공격이다"라고 비난하였다. 당시 미국은 오키나와에 있던 전투기 361대를 남한에 전진배치시키고 핵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로 급파하여 배와 선원들을 돌려보내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북한은 "우리 영해를 침범하면 소련배와 중국배도 일단 나포해서 조사하는 것이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북한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우방이었던 소련과 중국도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해서 북한에게 배와 선원들을 돌려주라고 은근히 압박하였다. 

이에 미국은 소련과 접촉해서 나포된 배와 선원들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소련은 "얘기는 해보겠지만, 요즘 북한이 우리말을 잘 듣지 않는다."하면서 난처해 했다. 


당시 북한은 중국과 소련이 미국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고 격분하였다. 북한은 영해를 함부로 침범한 미국의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맞섰다. 

화가 난 김일성은 전군 동원령을 내렸다. "소련도 배를 내어 주라고 압박하고 중국은 아는 척도 안합니다. 남들한테 굴복하면서 살면 뭐하겠슴메? 내래 앞장 설 테니, 모든 인민군대는 나가서 싸웁시다."

북한의 평양방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전 백승의 역전의 용장이신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에는 전면전으로 되갚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남한이었다면 세계최강 미국과 전쟁하려는 지도자는 미친사람이라고 끌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사람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다. 원산에서는 곧 미군의 폭격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산마다 빼곡히 고사포를 박아둬서 고사포가 마치 숲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김일성 독재체제가 잘못된 체제였음에도 북한사람들은 강력한 지지를 보낸 것이다. 그만큼 북한사람들은 성품이 호전적이다. 남한사람들과는 확실히 성품이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당시 상황은 미국에 불리하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이 구정공세를 펼쳤고 베트콩들이 미 대사관을 습격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청난 기밀문서들이 북한에게 넘어가서 미국한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결국 미국은 자존심을 구기며 북한과 1:1 협상을 하게 된다. 

당시 판문점에서 8개월 동안 미북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북한군은 고압적인 자세로 미군을 압박하였다. 심지어 1968년 4월 12일에는 협상도중 미군을 폭행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미국은 대선이 있었고(정치적 불안정), 베트남전이 한창이었기에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북한이 미국의 약점을 제대로 노렸던 것이다.  






협상이 길어지자 미국 대선기간이 되었는데 어느새 미국 국민들이 대선에 정신이 팔려서 푸에블로호 사건을 잊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포로로 잡은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영상을 찍어 대대적으로 공개하였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살려주세요."



1968년 11월 닉슨이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자,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무려 20여 차례의 협상 끝에 미국은 잘못을 인정하면서 북한이 제시한 사과문에 서명했다. 북한은 선원들은 석방하지만 배는 돌려주지 않았다. 

1968년 12월 23일 11개월만에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서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겨서 전시하였다. 북한주민들의 반미교육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68년 푸에블로호를 노획했던 군인들 가운데 생존자들이 안내와 해설을 맡았다고 한다. 참관자들은 "세기를 이어오며 조선에 대한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책동을 감행하여온 미제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금치 못한다"고 했다.




<평양 대동강변에 전시되어 있는 푸에블로호>


북한이 미국의 감시를 피해서 동해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긴 과정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한다.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한반도 영해 밖으로 나가 남쪽 제주도와 일본 사이 공해를 거쳐 서해안을 통해 대동강변으로 옮겼다. 공해 상에서 미국에 발각되지 않도록 배의 마스터 안테나 등을 눕히고 주위에 철판을 둘러 위장했다. 미국은 수송 작업이 끝나고 3일 후에야 알아차렸다고 한다.

북한의 특수한 체제와 사람들의 호전적인 성품 그리고 역사적 악연을 고려할때, 미국과의 화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