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 ~ 5월 중공군은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2차례 춘계공세를 펼쳤지만 미군의 화력에 막혀서 실패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무려 16만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후퇴하였다.

공산진영은 무력으로 남한을 점령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을 하게 되고 1951년 7월 휴전협상을 제의해 왔다. 






이승만 정부는 통일 없는 휴전은 절대로 반대라고 주장하면서, 휴전을 하려면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모두 철수하고 북한은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약소국의 힘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결국 UN측은 공산측의 휴전협상을 받아들였다. 

UN군은 원산항 근처에 정박해 있는 덴마크 병원선을 회담 장소로 제의했지만, 북한은 개성에서 하자고 했다. 








결국 북한의 요청대로 개성에서 회담이 열렸는데, 이것은 UN군의 실수였다.

당시 개성은 북한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UN군은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1951년 7월 UN군 대표들이 회담장에 백기를 달고 도착하자, 북한의 평양 방송은 이를 촬영해서 적군이 항복하러 왔다고 선전하였다.





열흘 뒤인 7월 10일 본회담이 시작되었는데, 북한측은 UN군측 의자 다리 밑동을 잘라내어 테이블에 앉은 북한측이 UN군 대표를 내려다보게 하였다. 당연히 UN군은 위압감을 느끼고 자세가 불편하여 제대로 협상을 할수 없었다.

북한측은 테이블 위에 깃발도 UN기보다 10cm 더 높게 하였다. 이후 깃대 높이기 경쟁이 벌어져서 결국 기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올라가는 해프닝도 발생하였다.






본회담이 시작되었다.

UN군: "휴전선은 지금 전선을 기준으로 설정하자."

북한(남일 총참모장): "그건 안된다. 전쟁 이전 38도선으로 설정하자."

UN군: "그렇게 되면 옹진반도가 고립되어서 남한에게 손해이다."

북한(남일 총참모장): "지금 전선을 기준으로 하면 우리 북조선 영토가 좁아져서 싫다. 우리 인민군은 38선 이남을 5개월 간 점령했지만 너희는 38선 이북을 겨우 2개월 점령했다. 너희가 지금 전선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낙동강을 휴전선으로 삼겠다."

UN군: "그것은 전쟁 초기였을 뿐이다. 지금은 우리가 제공권,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기에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다.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미국은 단 한명의 병사도 일본에 상륙하지 않고 일본을 항복시켰다."

북한(남일 총참모장): "너희는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일본을 항복시킨 건 먼저 조선인민의 독립투쟁, 8년간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그리고 소련의 참전덕분이다. 너희는 일본과 5년동안 싸웠지만 결국 소련의 참전으로 이긴 것이다."


이렇듯 휴전협상은 한치도 물러섬이 없었기에 2년 동안 지속되게 된다. 휴전 협상 기간 동안에도 양측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 한국이 휴전협정 공식 당사자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
1. 북한과 중국이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은 군사력이 약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에 의존했기 때문에 한국을 휴전 당사자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2. 미국도 한국을 협상에 직접 참여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자체를 반대하고 북진통일만 주장했기 때문에 한국이 협상에 참여하면 휴전 자체가 깨질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