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하순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자, 중공군은 춘계공세(5차공세)를 시작했다.





 4월 22일 밤이 되자, 중공군은 전 전선에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57개 사단, 60만 대군을 동원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전력이 약한 국군을 제일 먼저 공격하면서 밀고 내려왔다. 



<펑더화이>

펑더화이: "전력이 약한 남조선 사단을 먼저 뚫은 뒤에 후방을 장악해서 적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 전략 목표이다!" 


춘천에 주둔하던 국군 1개 사단(1만 명)을 5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한 뒤 후방을 차단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국군은 절반이 전사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정신없이 후퇴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중공군 20만명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서울 탈환을 중요한 전략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때 서울로 진격하는 중공군의 병력수는 지난 6.25전쟁때 북한군 병력규모의 5배가 넘는 규모였다.






서울로 가는 길목을 지키던 국군 1사단은 중공군에 대패하여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국군 1사단 옆에서 임진강을 지키던 파주 '설마리'의 영국군 대대는 후퇴하지 못했다.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들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었기에 미군 지휘부는 영국군 부대를 구원할 수 없었다.





이에 미군 지휘부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최대한 버티라고 요청하면서 항공보급을 제공하였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영국군 대대는 3일간 버텼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미군 지휘부는 탈출하던지 항복하라고 요청했다. 

영국군 대대장은 본인과 부상병 등 5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대원들을 탈출시키려 했다. 대대장이 중공군의 주의를 끄는 사이 탈출시키려고 했지만 530명이 포로로 잡혔고 69명만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때 영국군 대대 700명이 3일이라는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연합군이 서울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서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빠르게 서울을 점령하려고 했던 중공군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설마리를 다시 찾아온 영국군 참전 노병들>


<노병의 경례>


<영국군 참전 노병들을 영접하는 육군 25사단장> 




- 미군의 엄청난 화력
춘천을 뚫고 내려온 중공군은 연합군의 전선을 두 갈래로 분열시키는 것이 전략 목표였지만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방어선(참호)를 구축해 놓아서 실패하고 만다. 방어선 덕분에 남쪽으로 급격히 밀려내려 가지 않고 라인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더이상 밀고 내려올수 없었고 오히려 역습을 당했다. 미군이 화력을 집중했던 것이다. 하룻 동안 1개의 포병대대에서만 포탄을 무려 1만2천발을 발사하였다고 한다. 바다와 가까운 서울 방면에서는 함포까지 동원되었다. 미국 해군들은 수만발의 함포를 발사하였다. 당시 함포 1발의 가격은 최고급 승용차 캐딜락 1대의 값과 같았다. 단 한번의 전투에서 캐딜락 수만대를 날린 것이다. 그만큼 미국은 부자나라였다. 





<50년대 당시 최고급 승용차였던 캐딜락>



결국 중공군은 약 10만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후퇴하고 만다. 미군의 막강한 화력을 경험한 중공군은 이후 서부전선의 미군은 공격하지 않고 동부전선을 지키고 있는 국군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