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 대한 핵공격을 주장하던 맥아더가 신임을 잃자 새롭게 떠오른 인물이 야전사령관 리지웨이였다.



<매튜 B. 리지웨이>



리지웨이는 군인이었지만, 정치인들과 타협도 할줄 아는 인물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북진통일보다 38선 부근에서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핵공격은 절대로 안되고, 병력 증원도 불가하다고 통보했기 때문에 현재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중공군과 승부를 봐야했다. 다만 무기와 탄약은 무한대로 지원을 받았기에 화력전으로 중공군을 궤멸시키고자 했다. 






1951년 2월 중순 중공군 30만명이 4차 공세를 하였다. 중공군은 연합군의 약한 고리인 국군을 제일 먼저 공격하면서 내려왔다. 중공군은 국군이 연합군 중 제일 약하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에 약한 부분부터 공략해서 전선을 분열시킨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인해 전투가 집중된 지역이 경기도 양평이었다. 이곳에 국군 2개 사단(2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중공군 5만명의 공격에 패퇴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리지웨이는 도주하는 국군을 쫓아 정신없이 추격하는 중공군을 궁지에 몰아서 궤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리지웨이는 지평리 부근의 미군 5,600명, 프랑스군 500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후퇴하지 말고 현재 자리를 사수하라."

당시 지평리의 미군 부대는 미리 참호를 파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를 본 중공군 5만 명이 국군을 추격하지 않고 미군의 방어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국 무기와 미군 포로들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중공군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방어진지로 돌진하는 중공군을 상대로 미군이 정신없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게다가 후방에서 야포를 쏘아되고 공중에서 전투기들이 네이팜탄 폭격을 가했다. 엄청난 화력이 중공군에게 집중된 것이다.

결국 중공군 5천여명이 사상했고, 79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에 미군은 사망 52명에, 부상자 259명이었다. 

이 전투는 연합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였고 중공군에 대한 공략법을 확실히 터득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후 연합군은 북진을 하여 3월 중순 서울을 재탈환하게 되었다. 

만주를 핵폭격하지 않는 이상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리지웨이는 무리한 북진보다는 현재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공군의 다음공세때 남쪽으로 밀리지 않을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전술을 분석하였다. 중공군은 보급이 열악해서 장기전에 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장기전을 유도해서 중공군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확립하게 된다. 단계별로 방어선(참호)을 구축해서 후퇴하더라도 다음 라인으로만 후퇴하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