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하순 중공군은 2차 공세를 감행하였고 불과 2주 만에 38선 이북을 모두 점령하였다. 연합군(국군, 미군, UN군)은 38선 이남으로 밀렸고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야전에서 재래식 전력으로 중공군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중공에 휴전을 요청했다. 

그러자 중공은 고압적인 자세로 2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1. 한반도에서 미군과 UN군을 철수해라.
2. 대만에서도 미군을 철수시키고 중공만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하라.



미국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설상가상 소련이 공군력을 지원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원래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 했다. 중국과 북한이 미국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중공군이 미군을 이기자 슬그머니 공군력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은 공군과 고사포(대공포) 부대 7만2천 명을 파견하였다.





당시 소련의 미그 전투기는 성능 면에서 미국 전투기보다 우수했다고 한다. 게다가 불리하면 만주로 도망치면 되었기에 미국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당시 미국의 전투기는 만주로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련공군은 미군 전투기 1,309대를 격추시켰는데 공중전으로만 1,100대를 격추시켰다고 한다. 그 비싸다는 B-29 폭격기만 200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당시 미공군 보유량의 3분의 1이 한국전쟁에서 날라간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 24일 서울시민들에게 대대적인 대피령을 내렸다. 12월 말 최소 80만명의 피난민이 한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지난 6.25전쟁때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호된 경험(인민재판, 부역자 색출)을 했던 시민들은 이번에는 대부분 피난을 떠났다. 

한강다리들은 여전히 폭파된 상태였지만 한겨울에 한강물이 꽁꽁얼어서 지난 6.25전쟁보다는 쉽게 남쪽으로 피난을 갈수 있었다. 






연합군은 중공군의 현지보급을 방해하기 위해 청야전술을 사용하였다. 이로인해 서울의 웬만한 곳은 모두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중공군이 신이 나서 서울을 점령했지만 얻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중공군은 공세를 거듭한 끝에 1951년 1월 중순, 충청도 금강 유역과 경북 안동까지 밀고 내려왔다.   

공산군이 폭격에서 안전한 만주에 군수공장과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침략을 감행하자 연합군은 대응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북한지역을 폭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공산군들의 본거지는 만주에 있었고 불리하면 만주로 도주했기에 궤멸시키기 어려웠다. 이것은 베트남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은 불리하면 중국영토로 들어가서 은신했기에 미국이 아무리 북베트남지역을 폭격해서 쑥대밭을 만들어도 궤멸시키기 어려웠다.  

1950년 12월 1일, 맥아더는 기자로부터 압록강 건너편 중공군에 대한 작전 제한이 "효과적인 군사 작전에 장애가 되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것이 실제로 "군사 역사상 전례 없는 엄청난 장애물"이라고 답했다.


이에 약이오른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에 핵공격을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30일 맥아더는 만주와 중국본토에 1차로 26개의 핵공격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대만의 장제스와도 비밀리에 회담하였다. 장제스는 1950년 8월부터 한국전쟁 참전의사를 밝혔지만 중국의 대만 침공우려 때문에 맥아더는 대만군의 참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장제스>


맥아더 장군의 1차 목표는 북한을 무너뜨려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것이었고, 2차 목표는 중공을 무너뜨려서 장제스가 중국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장강 이남은 대만이 차지하게 해서 중공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때문에 맥아더는 장제스와의 비밀회담에서 핵무기 투하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중국 본토로 상륙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이 반대하였다. "현재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맞소. 하지만 중국에 핵공격을 하면 핵무기를 가진 소련이 참전하여 3차 대전이 벌어질 것이오." 

답답했던 맥아더는 1951년 1월 10일 트루먼에게 재차 요청하였다. "만주를 핵공격하지 않으면 북진이 어려워져서 남한을 지킬수 없습니다."

이에 트루먼은 "전쟁은 한반도 내에서만 해야 합니다. 북진통일만이 목표가 아니기에 38도선에서 휴전을 협의하도록 하시오."

이에 맥아더는 병력이라도 보충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정부는 그것도 거부하였다. 맥아더는 트루먼을 겁쟁이라고 비난하였다. 

화가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행정부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유로 맥아더를 해임시켰다. 철저한 군인이었던 맥아더와 달리 트루먼은 정치적 계산을 하는 정치인이었기에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