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은 독립군 지도자(장군) 김좌진의 아들이다.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반공 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은 참변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에 임명되는 등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다. 1925년 신민부(초기에는 한족연합회),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였다.

결국 김좌진은 부하였던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길림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현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에서 1930년 1월 24일 40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 이 때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두한은 처음에 좌익활동을 하였다. 좌익이었던 절친 정진룡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공산주의자한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우익으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친구 정진룡과의 우정은 끝이 나고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린다. 





이후 김두한은 극우단체에 가입하여 좌익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자비한 테러를 감행하였다. 

신탁통치 찬성대회를 사보타지한 것, 남로당 전당대회 습격, 박헌영 암살 미수, 신불출 암살 미수, 심영 암살 미수, 여운형 암살 미수,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규식을 살해 협박,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원봉 살해 협박 등이 있다. 위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김두한의 대상은 박헌영과 남로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좌우합작에 대한 사보타주와 테러 또한 상당히 비중이 높았다. 

그리고 1947년 마침내 친구 정진룡(조선 공산당)을 살해하게 된다. 







김두한은 테러혐의로 미군정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오키나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오키나와 형무소에는 미국 제일의 주먹 마이클 상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복싱의 달인으로 오키나와 형무소에서 복싱왕 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수감되어 있던 난다긴다하는 일본군 헌병도 여러 명 개박살낸 경력이 있다. 그리고 개박살을 넘어 마이클에게 맞고 병신이 된 경우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복싱을 죽도록 좋아하는 형무소 소장이 사형 집행을 2개월 정도 유보시켜주는 조건으로 김두한 VS 마이클의 매치업을 주선했고, 김두한은 사형 집행 유보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미국과 조선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말을 듣고는 복싱 대신 킥복싱을 한다는 조건하에 시합을 승낙한다. 사실 시대상 이 당시엔 아직 이종격투기가 나오기 전이라 복싱과 스트리트 파이트의 대결이 아닌 아예 킥복싱 매치가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이클 상사 또한 복싱 기술 위주라서 그렇지, 중간에 발차기도 썼다. 또한 김두한이 상대한 사람 중 유일하게 비아시아권(미국인)이다.









김두한(176cm, 93kg)에 비해 마이클 상사(196cm, 140kg)의 체격이 훨씬 좋았다. 이때문에 복싱 대신 킥복싱을 했던 것이다. 

마이클 상사의 실제모습은 밥 샙이랑 비슷해서 압도적인 거구였다. 야인시대에 나온 흑인배우(케냐 출신 유학생)보다 훨씬 더 거구였다고 한다. 









시합 당일, 무지막지한 펀치력으로 김두한을 2번씩이나 떡실신시키지만 환영 버프를 받고 일어선 김두한에게 박치기를 맞아서 패한다. 체급 차이가 꽤나 났기 때문에 김두한이 여러 번 공격을 먹였음에도 큰 대미지를 주지 못했지만, 또 다른 비장의 무기인 박치기 공격을 성공시키며 대미지를 입힌 것이다. 마이클 상사의 말로는 오헤머로 해골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물론 킥복싱 시합에서 박치기는 당연히 반칙이었기에 소장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마이클 상사가 킥복싱은 반칙이 많은 법입니다라며 쿨하게 인정했기에 별 일 없이 넘어갔다.







결국 박치기를 허용한 직후 대미지로 인해 눈이 풀리고 비틀거리는 등 전투력이 급 하락해서 위태로운 싸움을 이어가다 결국 점프 박치기를 3번 연속 허용하며 쓰러져 KO로 패한다.

시합이 끝나고 마이클은 김두한이 대단했다면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김두한을 격려하였다.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것이기에 사형판결은 유보되었고, 그동안 유진산과 장택상이 이승만에게 건의해 김두한은 마이클 상사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이송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김두한 같은 인물을 걸출한 호걸이라고 부른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들을 괴롭히는 인물들은 소인배라고 부른다. 김두한은 타고난 싸움천재이자 무술 격투 고수였다. 잇뽕이라는 별명에 맞게 유효타 한방으로 상대를 기절시키는 싸움꾼이었다.

이러한 김두한이 유일하게 형님이라고 불렀던 인물이 시라소니(이성순)였다. 시라소니가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평양 제일의 싸움꾼 박두성을 이긴 것이며 이후 중국 전역을 떠돌며 활약했다. 신의주 칼잡이 김장손과의 싸움, 상하이에서 칼잡이 아오끼의 싸움, 베이징에서 야쿠자 두목 구로야마와의 싸움, 베이징에서 쿵푸 대가 마오와의 싸움, 만주 봉천의 호랑이 이상대와의 싸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과의 우정, 천진에서 일본 야쿠자 카네미야 일당과 40:1의 싸움 등 여러 무용담이 있다. 당시 만주 지역은 동아시아의 화약고 지역이자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온갖 세력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동양의 서부'로 불리던 시절이라 사내들이 거친인생을 살수밖에 없었기에 싸움꾼들이 즐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시라소니는 앉은 자리에서 3m를 훌쩍 날아가 상대를 들이받는 괴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김두한 역시 그를 형님으로서 극진히 받들었다. 시라소니가 조선의 주먹세계에서 제일로 대접받았던 이유는 싸움실력 뿐만 아니라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돕는 대인배(협객)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김두한, 시라소니 같이 의협심을 가진 대인배(협객)는 극소수였고, 소인배 유형의 깡패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