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중공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역전되자 연합군(국군, 미군, UN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혹한이 몰아치던 그해 12월 21일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여 소집명령을 내렸다. 

서울로 모인 국민방위군이 약 50만명이었다. 이승만은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서 활약했던 김두한을 국민방위군 육군준장 사령관으로 임명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김두한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대경험이 없다고 해서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다. 



<176cm 93kg의 거구였던 김두한은 조선제일의 주먹이자 협객이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씨름선수 출신 정치깡패 김윤근에게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겼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동청년단을 방문했을 때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 김윤근을 보고 간부로 발탁했다는 믿지 못할 일화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김윤근의 군경력이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훗날 재판때 김윤근은 일등병 경험도 없다고 털어 놓았다. 군경력이 전무한 김윤근을 하루아침에 사령관(준장)에 임명했던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게다가 대한청년단, 서북청년단 등의 깡패(건달)들을 방위군의 간부로 임명했다. 주먹질 하던 건달들이 하루아침에 별을 달고,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설상가상 이승만 정부는 제대로된 예산안도 없이 이들에게 엄청난 예산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은 깡패(건달)였다. 군사지식, 책임감, 직업윤리가 없었던 건달들은 예산(군자금)을 빼돌려 유흥비로 탕진하고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이승만 정권에게 헌납했다.

군량, 군복, 군화, 무기, 군용차량 구입을 하라고 준 예산이지만 이들이 서류를 조작하여 착복한 액수가 당시 돈으로 55억환, 오늘날 화폐가치로 2조원이었다. 

당시 방위군 장교들은 "물을 돈 쓰듯이 사용해봤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결국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였던 국민방위군은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 당시 중공군에 밀려서 서울이 다시 함락당하자,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을 육군본부와 임시정부가 위치한 남쪽에 배치하려고 했다. 이로인해 국민방위군은 300~400km를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군용차량이 하나도 없어서 혹한의 날씨에 천 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식사(짬밥)가 제공되지 않았다. 북한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했던 서태원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 '거지 중의 상거지'란 표현은 다른 국민방위군 경험자 및 목격자 증언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관용구다.







정부의 징집이었기에 군복은 나라에서 입혀주겠지 해서 급하게 홑바지와 저고리만 입고 나왔는데 군복과 방한복이 제공되지 않았다. 혹한에 야외에서 자야되는데 2명 당 가마니 1장이 전부였다. 이런식으로 행군하다가 동사, 아사, 병사, 낙오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을 본 사람들은 '죽음의 행렬', '해골의 행렬'이라고 불렀다. 간부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면 깡패출신 간부들은 몰매를 때렸다고 한다. 혹한에 장거리를 행군하다가 동상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낙오하면 서북청년단 출신 간부(깡패)가 폭력을 행사했다. 결국 약 10만명이 사망했고 동상으로 팔다리가 잘려서 불구가 된 방위군이 최소 20만명이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50만명이 모였지만 총 한번 못쏴보고 10만명이 죽었고, 20만명이 불구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국방장관 신성모와 사령관 김윤근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숨기려 했던 데에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둘 다 이승만이 총애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당시 헌병사령관 최경록은 1951년 1월 대구로 가는 길에 가마니를 뒤집어 쓴 군인들이 거지처럼 서성거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군기가 이 꼴이 되다니.' 하는 생각에 혼내주러 갔다가 오히려 그들의 안내를 받아 굶어 죽고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헌병사령관의 전시 주업무가 후방에서 군사적으로 치안유지를 하는 것인데, 이때서야 국민방위군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고는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조사하였다. 그리고 2차 수사의 주역이 되어 책임자 총살형에 큰 역할을 했다.

결국 국민 방위군 사건이 국회에 폭로가 되면서 실상이 드러났다. 국회는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강을 건너다 말을 바꾸어 탈 수는 없다."라는 터무니없는 변명으로 일축했다. 하지만 여론이 들끓자 진상조사가 벌어졌고 방위군 장교들이 총 55억환(현재가치 2조원)을 착복한 사실을 밝혀냈다. 진상조사단의 발표가 있은 후 5일 만에 국민방위군들은 모두 귀향 조치가 내려졌다. 

당시 법정에서 검찰관은 이렇게 절규했다.

"휘하 장병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순간에도 간부(깡패)들은 따뜻한 요정에서 기생을 옆에 끼고 양주 가효(맛 좋은 안주와 술을 즐기는 것)로써 유흥삼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들 귀에는 삼천만 민족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가?" 

김윤근 등 5명의 방위군 장교들은 사형(총살형)을 당했다.  

 

<국민들의 분노가 엄청났기에 공개총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