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국군에 청렴하고 능력있는 장군들이 여럿 있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김석원, 김홍일 장군 그리고 명석한 판단력을 가진 이형근 장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성격이 곧고 강직하여 아첨을 못했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안위가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 전쟁위험
6.25 전쟁 직전까지 북한은 약 847회의 대남도발을 자행하였다. 이같은 도발은 38선 부근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국군 수뇌부는 이같은 도발이 북한의 계산된 술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북한군의 패턴은 일정했다. 38선을 침범했다가 일부러 져주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국군 수뇌부는 매번 북한군을 격퇴하자 승리에 도취되어 북진통일이 가능하다는 망상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군을 얕잡아 본 국군의 방비태세는 갈수록 허술해지고 있었다.
"38도선상에서 인민군의 도발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영용한 우리 국군은 인민군을 모조리 격퇴시켰다. 지금의 국군 전투력은 극동지역 최상이다. 이 견해는 미 고문관들도 같다. 따라서 우리 국군에게 북진명령만 내린다면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다. 간혹 우리의 방어태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험담하는 불평불만자가 있지만 그들은 이적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그러던 중 명태사건이 터지게 된다.
1946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 협의에 따라 1949년 3월까지 남북교역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남측에서는 통제기구도 없이 의약품, 전기제품을 비롯한 군수물자가 북으로 보내졌으며, 북측에서는 교역통제기구를 만들어 명태, 오징어, 염장 고등어 등 식료품만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1949년 1월 육군 제1사단장에 취임한 김석원 준장은 이에 분개하여 남북 교역장에서의 교역을 중단시킨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채병덕 총참모장의 묵인하에 교역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4월 중순 어느 날 김석원 준장은 이북에서 토성 쪽으로 넘어오는 명태가 실린 트럭 20여 대를 압류한다. 이를 보고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압류물자를 화주에게 돌려주라는 명령을 수차례에 걸쳐 하달하나, 김석원 준장은 이에 불복종하였다. 오히려 명태를 팔아 식품, 음료수, 과일, 사탕 등 장병들의 부식을 구매해 1사단 병사와 노무자들에게 배급하였다.

<부상당한 장병과 노무자들을 위로하는 김석원 장군>
이에 놀란 채병덕 총참모장은 일본 육사 대선배인 김석원 장군을 대놓고 꾸짖지는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그를 괴롭혔다. 이에 화가 난 김석원 장군이 "북한과 교역하는 총참모장이 어디 있어?"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당시 남북 교역은 정치적 배려에 의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일선 군인 간에는 불만이 많았다. 더욱이 채병덕 총참모장이 북쪽과 명태 장사를 한다는 말이 퍼지고 그 이익금 일부를 경무대(청와대)에 상납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채병덕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김석원 장군의 명태 압수와 부식 충당 행위는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김석원 장군은 정작 자신의 식탁에는 명태를 일절 올려 놓지 않고 오로지 장병과 노무자들한테만 먹이게 했다고 한다. 김석원 장군은 경무대(청와대)에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해서 마침내 두 사람의 싸움은 경무대로 옮겨진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석원과 채병덕을 모두 보직 해임시켰다.
명태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때쯤 되자 1950년 4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은 슬그머니 채병덕을 다시 기용했다. 불과 8개월 만에 다시 육군 총참모장에 임명된 것이다.
반면에 김석원 장군은 현역으로 복귀시키지 않고 예비역에 그대로 두었다. 이같은 불공정한 인사는 2달 뒤 북한의 기습 남침때 참사를 불러오게 된다.
사실 채병덕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인물이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북진통일을 하겠다면서 수시로 북한을 자극해놓고서는 정작 전쟁준비는 소홀히 했다. 전쟁 준비는커녕 육군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 그것도 전방 부대를 포함한 모든 지휘관들을 장교 클럽에 모두 모아놓고 술파티나 했다. 더욱이 군사 능력의 부재로 예비전력(호국군 2만명)을 자기 마음대로 해체해 버렸다. 그 대신 신설한 것이 정치조직인 청년방위대였다. 이승만 정권만 수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전쟁이 발발하자 경악한 채병덕이 국방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에 채병덕은 가회동에 살고 있던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신성모의 소재를 물었는데, 이때 신동우 중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은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해놓고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 퇴역 육군 장성들에 의하면 신성모가 전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경도 안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신성모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문민통제를 추진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실제로 문민통제를 반대하는 측에서 자주 예시로 드는 인물이다. 문민통제를 지지하는 측에서도 신성모를 언급하며 "문민통제는 필요하지만 이런 자가 등장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할 필요 또한 있다"면서 신중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소련제 T-34 탱크를 동원해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에게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남쪽으로 계속 밀리자 육참총장 채병덕은 죄책감을 느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채병덕을 영남편선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서울을 잃은 귀관의 책임은 막대하다. 죽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에게 속죄해야 한다. 선두에 서서 병력을 통솔하라." 하지만 해당 직책은 허울만 좋은 직책이었고, 말이 사령관이지 실제 휘하병력도 마산과 부산을 돌아다니며 겨우 모은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채병덕은 이 편지내용을 전선에 나가서 전사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게 된다.
큰 책임감을 느낀 채병덕은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7월 24일 전선으로 나갔다. 당시 대규모 인민군들이 호남을 통해 영남지역으로 침공하고 있었다. 채병덕은 신편 5사단 예하 15연대의 소수 병력만을 지휘하여 호남과 경계지역인 경남 하동군으로 진격했다. 7월 27일 오후 11시, 육본에서 작전명령 72호가 하달되어 장갑차를 앞세워 하동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1개 대대를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채병덕은 이를 위해 휘하 병력을 이끌고 무어 대령이 지휘하는 미군 19연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다가 7월 27일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채병덕은 전사하던 당일 피난민들을 구호한 후, 하동고개로 이동하여 적정을 살피다가 저격병에게 당해서 턱이 관통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전속부관(이상국) 등 다른 장교들도 다 없어서 김영혁 대위 혼자서 채병덕의 시신을 미군 차량으로 20미터 정도 끌고 가서 진주로 후송했다고 증언했다. 국방부의 채병덕 평전에서도 채병덕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즉사한 것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채병덕의 죽음은 전사로 인정되어 정부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중 하동 전투에서 전사한 채병덕 장군을 기리기 위해 2002년 6월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공원(호국공원)에 세워진 비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