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저 콧수염으로 유명했던 김석원 장군도 일본 제국군 출신임에도 인품이 좋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제국 육군 대좌(대령)출신으로 당시 생존한 조선인 일본군으로 군 서열로 따지면 영친왕(중장), 홍사익(중장)에 이어 다음이었다.
김석원은 1909년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으나 7월 대한제국 군 해산으로 육군무관학교 재학생들을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위탁교육 보낸다는 방침에 따라 1909년 9월 일본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5월 본과를 마치고 1913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15년 5월에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병과는 보병으로, 제4사단 보병 제61연대(와카야마 연대)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1915년 12월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연대장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서 중기관총 교관으로 2년간 복무했다.
이후 김석원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웠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20사단 78연대 중기관총대 대장으로 만주에 출전하여 헤이룽장성 방면에서 마점산의 군대와 싸우면서 심양/장춘/치치하얼 일대 전투에서 세운 공적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700원의 상금을 받았다.

<중국 봉천군벌 원로 마점산>
1934년 3월에 소좌로 승진했으며 1936년 8월 보병 제78연대 3대대장으로 보임된 상태에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파병된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여단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선봉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베이징 부근 남원 전투에서 자신의 대대 병력을 이끌고 국부군 1개 사단을 격퇴하고 남원행궁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려 전쟁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김석원 대대장도 총상을 입고 톈진의 병원으로 후송될 정도였는데, 그의 곁에 있던 아이가와(相川) 군조가 그를 살리고 대신 총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옆에서 나를 따르고 있던 아이가와(相川) 군조(軍曹)가 나를 뒤로 떠밀면서 내 대신 자기가 앞으로 내닫는 것이었다. 그러자 순간 어딘가에 숨어있던 중국군의 일제사격이 가해지면서 아이가와가 쓰러졌다. 나 대신 쓰러진 것이었다.
-중략-
남원전투에서 나를 살려준 아이가와 군조는 입원한 지 10일 후 천진 육군병원에서 내 손을 꼭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김석원 회고록중.
이는 아사히 신문의 종군기자의 원고를 통해 조선은 물론 일본제국 전역과 중국에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938년 2월에는 산서성 동원고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하진/직산 등 산서성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며 한중일 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이종찬과 더불어 금치훈장 공3급을 수여받은 단 두 명의 조선인 중 한 명이다.

1938년 9월 중좌로 진급했고 1939년 3월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조선인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대환영을 받았다. 1939년 10월 훈3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1940년 1월 히로시마의 보병 제42연대(후쿠야마 연대)로 전속되었다가 1940년 12월 다시 중국전선으로 파견되어 산동성에 주둔한 독립혼성 제6여단을 거쳐 제남군사령부에서 간부교육대장을 역임했다. 1942년 2월에는 중일전쟁에서 세운 무공으로 수훈갑, 공3급 욱일중수장을 받았으며 1944년 8월 대좌로 승진하여 조선군사령부 평양병사부 제1과장으로 발령받았다.
- 6.25 전쟁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시영 부통령을 찾아가 의용군이라도 모집해서 공산군을 막겠다고 했고 이 부통령은 찬성하며 대전에서 신성모(국방부장관)의 위촉으로 수도사단의 사단장(준장)으로 복귀했다.
6.25 개전 당시 예비역이었던 김석원 준장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김홍일 소장에게 도와줄 일 없냐며 찾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 그가 수도사단장(준장)으로 복귀하자 1사단 시절 그의 예하에 있던 수많은 장교들이 김 장군 밑으로 가겠다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백선엽 회고록에 나온다.
6.25 전쟁기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저 콧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차고 다니며 최전선까지 나가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수도사단장에 임명돼 수도사단이 있는 충북 진천으로 가던 무렵 피난민 대열에 섞인 군경 장병들을 만났다. 이에 그는 군도를 뽑아들고 "군경들아! 나는 수도사단장이 될 김석원이다. 그대들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거늘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대들의 후퇴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늙으신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가! 돌아서라! 김석원이 앞장설 테니 북으로 가자!"라고 연설해 900여명을 규합해 진천으로 향했다. 이후 그가 지휘했던 진천 전투와 포항 철수작전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진천 전투
김석원 장군은 진천 전투에 참전하여 잣고개 일대의 고지 쟁탈전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김석원은 격전지 중 하나인 문안산으로 사단 지휘소(CP)를 옮긴 뒤 일본도를 들고 일선으로 나가 "사단장이 여기 있는데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저버릴 텐가?" 라며 18연대 장병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반면 미군 군사고문관은 위험하다며 2km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저들은) 나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 못했소. 병사들이 쓰러지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순 없소."라며 고문관의 건의를 거절했다. 덕분에 북한군 2사단의 남진을 7일간 저지해 냈으며, 이는 서부전선에서 국군 사단급 부대의 첫 승리(목적 달성)이기도 했다. 한미 연합군의 전선 조정을 위해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을 3일간만 진천에서 저지해 줄 것을 희망했고, 김석원과 부하 장병들은 진천을 7일간 사수해 필요 이상의 시간을 벌었다. 김석원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은 후속 전투에서도 계속 시간을 벌어줘 낙동강 방어선을 충분히 구축할 수 있었다.
포항 철수작전
3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모든 보급을 선박 수송에 의존하고 있는 어려움과 북한군이 사단 방어지역을 남북 양편에서 협공하려는 징후가 포착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해상철수의 시기가 임박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를 위해 사단 참모진을 동원해 해안선을 답사한 뒤 독석동-조사동 간의 1km 해안이 선박 접안에 적합하고 승선을 위한 해안 교두보 확보에도 용이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아울러 지역 내의 이용 가능한 어선을 은밀하게 파악하면서 우발사태에 대비하였다. 안강-기계지구의 전황이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더러 3사단이 구계동, 월포동에 고립되자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미8군과 협조 후 3사단에 해상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포항 철수작전은 군관민 합동으로 단 1명의 잔류자 없이 모든 민간인과 송아지까지 모두 대피시켰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모두 진이 빠져버렸는데, 그의 회고록에서도 작전 종료 후 참모장 공국진 대령, 통신부장 동홍욱 대위 등이 모두 병상에 누웠고, 그 또한 지병인 위경련으로 병상 위에서 링겔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나타나 이 모습을 보더니 노장군 안위가 염려스럽다며 얘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김석원 장군>
김석원 장군은 미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2가지라고 한다.
1. 아들(차남) 김영수가 일본제국 육군 중위였는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과 전투중에 전사했다고 한다. 미군의 필리핀 탈환전 와중인 1945년 4월 16일 레이테 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2. 영어와 미국문화를 배워서 미군들과 소통을 할수 있었던 젊은 장교들과 달리 당시 김석원 장군은 연배와 계급이 높아서 미군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는 한국군 사단장이 위관급 미군 고문관을 상석에 모시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김석원 장군은 미군을 그저 고문관으로 대했으며, 잘못되었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불호령을 내리던 사람이라 미군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다. 당시 김석원을 싫어했던 고문관 제임스 하우스만이 김석원에 대한 비방과 중상모략을 주도했는데, 이승만이 김석원 장군을 참모총장에 임명하려는 것도 제임스 하우스만이 강력히 반대했으며, 김석원을 임명한다면 미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1956년 김석원 장군은 군에서 물러나고 성남고등학교 교장, 제5대 국회의원(무소속.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으로 활동했고, 1961년부터 원석학원 이사장을 지냈으며 1978년 8월 6일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예우
김석원 장군이 4월 28일 충무공 탄신에 아산 현충원에서 헌화할 때는 박정희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김석원은 군의 대선배이기도 하였지만 김석원의 차남(김영수)이 박정희의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 김석원은 친구의 부친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 교육사업
1932년 조선으로 잠시 개선한 김석원은 출퇴근길에 보이는 아이들이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고, 이태원의 유일한 사설학원 '조양학원'의 이홍순을 찾아가 만주사변에서 희사받은 상금 700원 중 500원을 기부하면서 육영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어 김석원의 맹렬한 운동으로 일본제국에서 용산의 일본육군 용지 600여 평을 조양학원에 무료로 영구임대하도록 하여 1936년 6월 조양학원이 총독부로부터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받아 이태원보통학교(서울이태원초등학교)로 승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1937년 7월 31일에는 이태원보통학교 교장을 맡은 광산 재벌 원윤수와 함께 원석학원과 사립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신청하여, 1938년 1월 10일 재단법인 원석학원 인가를 받고, 동년 2월 25일 오늘날 성남중학교(서울)와 성남고등학교(서울)의 전신인 성남중학교(성남고등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4월 개교하였다.
김석원은 일본군에 투신한 조선군인들에게서 엿보이는 복잡한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잘 보여준 인물이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동료들의 가족을 돌보면서, 조선인 민족주의 운동가들을 대놓고 후원했고, 해방 후 일제 부역 전력에 공개적으로 반성하였다. 일본군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 기수 선배 김경천과 지청천의 가족을 보살펴주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반송장이 되어 돌아온 육사동기 이종혁을 보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도왔다. 윤봉길 의사의 손자도 성남학교에서 보살펴주었다. 1944년 평양에서 강제 징집된 학생들이 무기를 탈취해 무장투쟁을 벌이려다 체포된 평양 학병의거 재판 때는 맨 마지막까지 재판정에 남아 지켜보다 형이 확정되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훗날 회고록에서 일본군 복무 경험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식민지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