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일본군은 용맹했지만 사납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이종찬 장군은 일본군 출신이었지만 인품이 좋았다.
이종찬 장군은 1933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채병덕 장군과 함께 일본육사 예과에 입학해 1935년 3월 졸업했다. 일본 육군 보병 제3사단 아이치현(愛知縣) 도요하시(豊橋)의 공병대대에서 6개월간 대부(隊部)실습을 거친 후 같은 해 9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해 1937년 6월 제49기로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하던 해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제2차 상하이 사변에 파견되어 일선 공병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이후 난징으로 진격했다가 그 일대에서 벌어지는 난징대학살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았으며, 범죄를 자행하는 일본군 병력들을 제지하다가 오히려 의심을 산 일까지 있었다.

중일전쟁에 참전 중이던 1938년 중위로 진급했으며 약 3년간을 중국전선에 있다가 1940년 겨울 후방으로 복귀한 후 1941년 3월 대위로 진급했으며 훈 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어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공(功)5급 욱(旭)등의 금치훈장을 받았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강점기를 통틀어 이종찬과 김석원, 두 명뿐이었다.

1942년 초 도쿄(東京)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敎)에서 수학했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군과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뉴기니에 파견되었다. 1942년 12월 독립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는 일본 육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했다. 소속 부대가 동부 뉴기니에 파견되었는데 작전목표는 오웬 스텐리 산맥을 통과하여 남단의 포트 모르즈비(Port Moresby)를 공격하여 점령한 뒤 호주를 침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3년 10월 전황 악화로 뉴기니 서부로 퇴각한 이래 종전할 때까지 남태평양 일대에서 미군과 싸웠으며, 12월에 공병 소좌로 진급했다. 1944년부터는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했고 종전을 맞는다.
그는 육사 생활에서도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귀족 출신들이 가지 않았던 공병을 지원하여 육사 동기들은 졸업식 때에 가서야 그가 귀족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종찬 장군은 인품이 좋고 매우 곧고 강직한 인물로, 뉴기니에서는 예쁜 원주민 처녀를 데려와서 차 심부름(사실상 성적 노리개 역할)을 시키려 한 일본군 사령관의 명령에 이렇게 답하였다고 한다.
"상관의 명령은 천황 폐하의 명령으로 알고 따르라고 배웠지만, 천황 폐하라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리라 봅니다."
결국 사령관의 눈 밖에 나서 위험한 최전방 요새 섬으로 전출당하여 죽을 위험을 여러번 겪었지만 워낙 성품이 강직하여 자신의 곧은 신념과 도덕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 6.25 전쟁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이종찬 장군은 수도경비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그는 서울 사수 및 한강 이북에서의 결전을 주장했으나 북한군의 공세에 남쪽으로 밀리자, 포항 철수작전 이후 김석원 준장이 담당하던 제3보병사단을 인계받았다. 서울 수복 직후인 10월 1일에는 그가 지휘하는 3사단(백골부대)이 국군 부대들 가운데 38선을 최초로 돌파했고, 이는 국군의 날로 기념되기도 했다.


그 후 이종찬 장군이 이끄는 3사단은 수도사단과 함께 원산에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6.25 전쟁에서도 이종찬 장군의 좋은 인품과 도덕성이 드러났다. 수원화성을 무너뜨려 북한군의 진격을 막자는 주장에 문화재를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된다며 무마하였다. 게다가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김백일 군단장이 영덕군을 공격하고 있던 그의 부대가 읍내 시가지에 틀어박힌 북한군의 저항에 의해 고전하고 있자 "읍내에 직접 포격도 하고, 불도 지르고 해서 빨리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종찬 장군은 민간인 피해를 우려하며 "그런 마적단 토벌 방식을 같은 동포가 사는 곳에 어떻게 쓸 수 있느냐"고 항명하였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1950년 9월에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북한 지역으로 북진하고 나서도 북한 내 공산당원이나 인민군에 앞장서 협력했던 자들에 대해 휘하 지휘관이 즉결처분을 하려고 하자 "아무리 그래도 비전투원을 그렇게 재판도 없이 처형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저들이 인민재판으로 우리 양민들을 마구 죽인 것을 어떻게 비판하겠는가? 즉시 경찰에 넘겨 법에 따라 처벌받게 하라" 고 명하여 학살을 막기도 했다. 또한 북한군 포로들을 끌고 다니기 귀찮게 되어 휘하 지휘관들이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하자 역시 이를 막아 포로에 관한 국제법 규정대로 수용소로 후송하도록 명령하기도 했을 정도로 원칙을 철저히 지켰던 인물이었다.
같은 일본군 출신이었던 송요찬 장군은 용맹한 맹장이었지만 잔인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이종찬은 송요찬을 싫어했다. 송요찬은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해 일본 육군 군조(상사)까지 진급했던 인물이다. 어찌나 용맹했던지 미군으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침없는 맹장이었다. 다른 별명으로는 돌머리라는 뜻의 석두(石頭)가 있다.
송요찬 장군은 1947년 제주 4.3사건때 학살자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제주 4.3사건을 초토화 작전으로 진압하였다. 해안선에서 거리가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을 비워서 공산유격대를 고립시킨다는 것이 초토화 개념의 작전인데 그의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을 불태워 버린 건 물론이고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공산당과 한편이라고 가정하고 주민들을 대량학살하는 작전을 펼쳤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는데 토벌대는 미처 내려오지 못한 주민들은 물론 소개령이 아직 안 내려졌거나 아직 내려받지 못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까지 모조리 살해했다.
산악지역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하는 공산괴뢰군을 상대로 할때 해당 지역의 민간인 마을을 모두 비우고 물자를 불태워서 공산게릴라부대의 보급을 끊는다는 초토화 작전(청야 전술)은 유용한 전략이지만 이때 민간인들은 모두 후방지역으로 이동시켜서 공산게릴라부대와 분리하는 것이 원칙이지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이다.
결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어 오늘날 후유증이 발생한 것이다. 만약 이종찬 장군이 투입되었다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사건을 진압했을 것이다.
1951년 6월 이종찬이 그보다 계급이 높은 장군들을 제치고 제6대 육참총장에 임명된 것은 그만큼 그의 인망과 능력에 대한 신임이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말 이승만 정권의 부패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이종찬 장군은 군사혁명의 필요성은 동감했지만, 그의 곧은 신념때문에 혁명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소장: "각하! 지금 각계각층은 마디마디가 다 썩어서 뜻이 있는 사람이면 그 누구든 세상이 한번쯤은 뒤집혀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부분은 고사하고, 우리군대만 보더라도 인사문제는 경무대와 서대문 비서들 손에서 놀아나고, 대공첩보비는 자유당 국회의원들의 교재비로, 군납은 정치자금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장성들은 트럭으로 해먹고, 장교는 지프차로, 하사관은 등유로, 사병들은 반합으로 날라다 해먹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며칠전에 폭로된 부정선거 계획을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날강도 같은 불한당들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각하께서는 청렴강직하시고 공정무사하신 지휘관이시기에 전군의 존경심을 한몸에 받고 계신 우리국군의 정신적인 대부이십니다. 각하께서 혁명의 선두에 서신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이종찬 장군: "박장군이나 나나 일본육사 출신에 중위고 소좌였소. 우리는 민족 앞에 죄인임은 분명하오. 광복후에 광복군이 우리군의 모체를 이루어야 마땅하지만 역량이 부족하여 어쩔수 없이 우리같은 일본군 출신들이 군의 핵심이 되고 말았소. 반면에 이승만 대통령은 찬란한 독립운동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낼 수 있단 말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