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진다.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성골, 진골)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넘을 수가 없다." <삼국사기> 열전 제7 설계두전 中
신라는 주변국(고구려, 백제)에 비해 폐쇄적이고 왕족 숭배의 경향이 강한 사회였다. 신라 사람들은 고귀한 출신 성분에 대해 종교적 숭배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왕과 진골 귀족을 조상 받들 듯 존경하였고, 하늘이 내려준 그 지위를 감히 엿보려 하지 않았다.
6두품이었던 청년 설계두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서기 621년 밀항하여 당나라로 건너갔다. 설계두의 꿈은 당나라의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계두는 당나라에서 군인으로 출세하기 어려웠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하기 위해 전투력이 강한 기마병이 많이 필요했다. 전장이었던 요동과 만주는 넓은 평원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목민족 '동돌궐'이 몰락하여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수많은 돌궐기병들이 당나라군에 편입되었다.

<돌궐기병>
하지만 설계두는 보병중심의 농경민족 국가 신라에서 태어났기에 기마술에 서툴렀다. 이로인해 기병이 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보병부대에 편입되게 된다. 10년 동안(630~640)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고 후방에서 예비대로 대기하기만 했다.
- 제1차 고당전쟁에 참전하다
서기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이때 설계두도 당의 보병부대에 편입되어 베이징을 거쳐 요동으로 진군하였다. 설계두는 비로소 출세의 길이 열렸다고 기뻐하면서 반드시 군공을 세우겠다고 다짐하였다.
요택을 건넌 당나라군은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북부 욕살 고연수 등이 이끄는 고구려군 15만이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고연수의 고구려군이 안시성으로 들어가서 성의 지원을 받으면서 당나라군을 협공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때문에 어떻게든 고구려군을 주필산 쪽으로 유인하려고 했다.
당나라 장군 이세적은 보병 및 기병 1만5천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 서쪽 산 고개로 가서 진을 쳤다. 이 부대의 보병으로 설계두가 속해있었다.

이세적의 부대는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던져졌다. 고구려군을 유인하려면 처음에 고구려군의 진중에 깊이 들어가 싸우다가 밀려 퇴각하는 연기가 필요하다. 아주 위험한 임무였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고구려군을 당군의 포위망에 들어오게 해야 했다.
설계두가 속한 당나라 선봉부대가 고구려 진영 깊숙히 들어가자, 고구려 개마무사가 돌격하여 당나라 보병부대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설계두는 고구려 기병의 창과 화살에 맞아 피가 낭자한 상태로 전투 초반에 전사하였다.
이에 당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나라 사람도 죽음이 두려워 뒤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지만 외국인으로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무엇으로 그의 공을 갚겠냐"고 했다.
당태종이 종자에게 설계두의 소원을 듣고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으며, 설계두를 대장군의 관직에 제수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당태종 이세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