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아산 배암밭 동네에 들어가 충무공 이순신의 기념비를 우러러 구경하였고, 광주 역말이란 동네에 들어가니 시골 동네에 몇백 호인지는 모르나 동장이 7명이나 일을 본다 하는데, 이는 서북에서는 보지 못하던 일이다. 

광주, 나주, 순천, 대명 도처에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이 역시 서북지역에는 없는 특산이었다. 나는 열 살 남짓 될 때까지 대나무가 1년에 한 마디씩 자라는 줄 알았고, 실제로 대나무를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장흥, 보성 등 각 군에서는 여름철에 콩잎을 따서 바로 국도 끓여 먹고 또 뜯어 말려서 그것을 삼동(三冬)에 먹기도 하고, 소나 말에 실어서 내다 팔아 장터의 주요 상품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해남 이진사 집 사랑에 며칠 계속해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함께 지내던 객이 대여섯 명 되었다. 그중에는 그 집에서 손님 노릇한 지가 8, 9년 된 자도 있었다. 손님이 일을 하면 주인이 가난해진다는 미신이 있어, 손가락 하나 쓰지 않고 주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 삼남지방의 엄격한 유교 신분질서
양반이 아니고는 아무리 대재산가라도 감히 밖으로 사랑문을 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과객이 주인을 찾아 숙박을 청하면 첫 대면에 묻는 말이 "긴밤에는 어디서 유숙하였소?" 하는 말이다.
만일 유숙한 집이 양반의 집이면 두말없지만, 중인(中人)의 집에서 잔 것 같으면 그 손을 타이르고, 반면에 상인(常人)이 과객을 맞아 재워주게 되면 양반이 사사로이 잡아다가 형벌을 주는 등 별별 괴악한 습속이 많다. 





전라도 해남은 윤(尹)과 이(李) 두 성이 가장 큰 양반으로 세력을 점유하고 있었다. 윤씨 집안의 사랑에서 유숙하노라니, 밤이 저물었는데 사랑문 앞 말뚝에 어떤 사람을 묶어놓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고 있었다. 주인의 추상 같은 호령이 들려왔다.

"너 이놈, 죽일 놈, 양반이 작정하여 준 품삯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대로 올려받느냐?"

벌을 받는 사람은 극구 사죄를 청했다. 나는 주인에게 물었다.

"양반이 작정한 품삯은 얼마이고 상놈이 제 마음대로 올려받은 것은 얼마나되오?"

"내가 금년에는 동네 품삯을, 년은 두 푼, 놈은 서 푼씩 정하였는데, 저놈이 어느 댁 일을 하고 한 푼 더 받았기 때문에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오."

나는 다시 물었다.

"노상의 행인들이 주막에서 먹는 음식값도 한 끼에 최하가 5, 6푼인데, 하루 품삯이 밥 한 상 값의 반액에도 못 미치면 혼자 살림도 유지해 나가기 어렵거든 하물며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어찌 생활을 하겠소?"

주인은 그래도 할 말이 있다.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상놈으로 황해도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海西)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경상도 지방의 반상(班常) 간에는 다른 지방에 없는 특수한 풍습이 있다. 삼남에서는 소 잡는 백정이 망건을 쓰지 못하는 것이 상례로 맨머리에 패랭이를 쓰고 드나들게 되어 있다. 패랭이 밑에 대테를 둘러대고 거기다가 끈을 맨 것이 백정놈이다. 백정이 길을 가다가 길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길 아래로 내려서서 "소인 문안드리오" 하고 인사하여야 한다. 행인이 지나가고 나면 그제서야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당시 삼남지방이 양반의 위엄이나 속박이 유난히 심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갑오개혁 이후 4년이나 지난 1898년에도 이러했으니 이전에는 유교의 폐해가 더 심했을 것이다. 조선의 체제 특성상 스스로 근대화는 불가능했다. 



<1894년 갑오개혁 내용>



삼남지방은 성리학자(중국철학)들이 지역의 지도층이었기에 유교 신분질서가 엄격하였다. 반면에 서북지방의 유교적 신분질서가 약했던 이유는 지역의 지도층들이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상업세력들(개성상인, 평양상인, 의주상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