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도 눈 덮인 산, 백두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를 소리쳐 흐르는 물, 압록에 용솟음친다.


혜산진에서는 압록강 건너편의 중국인 민가에서 개 짖는 소리까지 다 들렸고, 압록강도 걸어서 건너다녔다. 거기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서대령을 넘어서 간다 했다. 삼수군으로, 장진군으로, 후창군으로, 자성군 중강을 건너, 중국땅인 모아산에 도착하였다. 이상 여러 군을 지나는 길은 험산준령 아닌 곳이 없고, 어떤 곳은 70~80리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도 있어, 아침에 미리 점심밥을 싸 가지고 간 적도 있다. 산길이 극히 험악하였으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삼림이 빽빽하여 지척을 분별키 어려웠다.





나무들 중에 큰 것은 밑동 하나를 벤 그루터기 위에 7,8명이 돌아앉아 밥을 먹을 정도라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도 나무 한 개를 찍어 넘기고, 그 나무를 절단하여 곡식 저장하는 통을 파는데, 장정이 나무통 안에 서서 도끼질하는 것을 보았다. 또 이편 산꼭대기의 노목이 쓰러져 건너편 산꼭대기에 걸쳐 있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행인들이 그 나무다리를 타면 굳이 깊은 계곡으로 가지 않고도 건너갈 수 있었다. 우리도 나무를 타고 건너보았다. 마치 신선이 다니는 길인듯 싶었다. 






그 지방은 인심이 순후하고 먹을 것이 풍부해서 손님 오는 것을 매우 반가워하고 얼마든지 묵어가도록 해주었다. 양식으로 사용하는 곡식은 대개가 귀리와 감자고,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있는데 맛이 참 좋았다. 사람들이 짐승 가죽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는 것을 보면 원시시대 그대로 생활하는 것도 같았다. 삼수읍 성 안팎에는 민가가 30여 호 있다고 하였다. 

모아산에서 서북쪽으로 노인치라는 고개를 넘고 또 넘어, 서대령 가는 길로 접어들던 도중에 우리 동포를 100리에 두어 사람씩 만나게 됐다. 대부분 금 캐는 사람들이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백두산에는 가지 말라고 말린다. 이유는 서대령을 넘는 도중에 향마적(響馬賊)이라는 중국인 도적떼가 숲속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인 후에 시체를 뒤져서 소지품을 빼앗아 가는데, 요새도 우리 동포가 그같이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상의 끝에 백두산 가는 것을 그만두고 통화현성으로 갔다. 부근 10리쯤 되는 곳에 심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겨우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로, 정신 없이 아편을 피워대서 몸에 뼈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런 곳들을 두루 다니는 중에 가장 밉게 보이는 것은 호통사들이었다. 이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대개 갑오년 난리(청일전쟁)를 피해 낯설고 물설은 외국으로 넘어와 중국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속 험악한 곳만 택해서 화전을 일구고 조와 강냉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런데 호통사들은 중국어 몇 마디 배워가지고 중국사람에게 붙어서 동포들에게 별별 무리한 학대를 다하는데, 돈과 곡식을 억지로 빼앗는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행을 허다히 행하였다. 내가 돌아다닌 곳은 통화, 환인, 관전, 임강, 집안 등이었는데 어디서나 똑같이 호통사의 폐해가 심하였다. 

이곳은 무논이 없고 밭만 있다. 본래 땅이 비옥하여 잡곡은 무엇이나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잘 되었다. 한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열 사람이 먹어도 족할 정도였다. 단 한 가지 소금이 제일 귀한 물건이었다. 그 지역에 들어오는 소금은 다 의주 방면으로부터 물길로 수천 리씩 실려와서 판매되었다. 



<오늘날 압록강 북중국경지대>


곳곳에 두세 집 내지 여남은 집까지 모여 산림을 개척하고 오막살이를 짓고 거주하는데, 인심이 극히 순후하여 거기 말로 '앞대 나그네'가 왔다 하면 무척 반가워들 하였다. 한 동네에 들어가면 제각기 맞아들이고, 남녀노소가 모여서 고국 이야기를 하라고 조르기도 하며, 이집 저집에서 다투어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곳에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생활난을 피하여 간 사람들이 많았다. 갑오년 청일전쟁 때 피난하여 건너간 집이 많았고, 드물게 죄를 저지르고 도망한자들, 즉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던 주동자들, 공금을 유용한 평안, 함경 양도의 이속(吏屬, 하급관리)들도 간혹 있었다.

지세로 말하면 파저강 좌우에 설인귀, 연개소문의 관루 흔적이 남아 있고, 도처에 천연의 요새가 있었다. 그 천연 요새들은 한 사람이 막으면 만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므로 여진, 금, 고구려의 발원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