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648년 3월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로 가서 당태종 이세민을 만났다. 김춘추는 신라의 문화와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당태종에게 요청해 국학(당나라 국자감) 견학을 요청한데서도 드러난다. 당태종은 기뻐하며 직접 국학을 참관시켜 주었고, 자신이 직접 지었던 <온탕비문>(溫湯碑文)과 <진사비문>(晉祠碑文), 직전에 본인이 직접 편찬에 관여해 완성한 역사서인 《진서》(晉書)를 김춘추에게 선물로 주었다.
김춘추는 귀국한 뒤 신라왕에게 요청해 신라의 관복 양식을 당나라의 복식과 같게 하였으며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으로 신라는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점을 보여준 상징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스타일의 관복>
- 대일외교 실패
김춘추는 일본과도 우호관계를 맺어서 고구려와 백제를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서기 651년 신라에서 사찬 관등에 있는 지만(知萬)이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일본에 보내는데 지만 사찬은 당연히 당나라 스타일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일본 조정은 당나라식 복식을 핑계로 사신을 꾸짖어 쫓아보내고 신라 공격 논의까지 벌어지는데 고구려와 백제처럼 나당동맹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은 고구려-백제의 남북 세력에 확실히 가세하게 된다.

김춘추가 중국식 복식을 도입한 이후 한반도 왕조들은 이 전통을 유지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중국을 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1719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신유한은 일본인들에게 "귀국은 왜 우리 조선인을 당인(唐人)이라 부르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조선의 복식과 문물이 중국(중화)과 비슷하여 당인(당나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관복>
정작 중국에서는 청나라부터 복식을 만주족 스타일로 교체해서 오히려 한국이 중국보다 더 오랫동안 중국식 관복을 입게 되었다. 청나라 한족들이 조선에 사신으로 오면 관복이 부럽다고 울었을 정도였다.

<청나라의 만주족 스타일 관복>
오늘날 한국 정치인들이 쉽게 친중파가 되는 것도 중국을 섬겼던 한반도 왕조들의 전통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특히 남한은 신라와 조선 중심의 역사관을 가져서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하다. 주변지역(몽골, 만주, 일본)보다 한반도의 삼한(三韓)이 유난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더 강했던것 같다. 특히 한국은 좌파건 우파건 정치인들이 중국과 너무 깊숙히 관계를 맺어와서 중국을 포위하려는 트럼프 정부와의 외교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북한 김정은 정권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 만나기 위해 내가 북한으로 갈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