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의 공로는 이승만이 99.9프로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945년 해방 직후 남한내 극도의 혼란 상태에서

1. 한국내 빨갱이, 좌파,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다. 반공 이론을 갖추고 체계적으로 단호하게 싸운 남한내 단 1인

2. 미국내 빨갱이, 좌파, 공산주의자들과도 싸웠다. 역시 반공 이론을 갖추고 체계적으로 단호하게 싸운 남한내 단 1인

3. 과거 청산이냐 반공이냐의 딜레마 상황에서 애국적인 결단으로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반민특위를 해산할 수 있었던 남한내 단 1인

4. 반공이 1945년 당시 세계의 시대 정신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남한내 단 1인

5. 당시의 국제 정세를 가장 잘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었던 남한내 단 1인

이 바로 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당대의 여러 필요와 상황들을 종합해서 봐야지 어느 한 필요나 희망사항에 몰입하여 감성적으로 바라 봐서는 안된다.

▶1. 당시 남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좌파, 공산주의에 대해 순진하게 동조하고 있거나 사상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이를 철저한 반공 이론과 단호한 대처로 바로 잡은 이가 바로 이승만이었으며,

▶2. 이는 당시 미국의 상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1945년 직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것이 마치 당시 누가 나서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던 것처럼 보는 시각들이 있다면 바꾸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이고 하니 1945년 당시에도 당연히 반공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을 거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게 좀 부실했다. 비록 전체 기조는 반공으로 나아갔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부실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에도 사회 각 분야 곳곳에 공산주의자들 내지 간첩도 많았고 그냥 반공에 대한 개념이 없는 정치인들도 많았으니 자칫 그런 미국내 간첩들의 방해 공작이나 무개념의 소치로 인해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큰 시기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경향이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런 미국내 빨갱이, 간첩들의 작용이 있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철저한 반공 이론과 단호한 대처로 미국 정치인들을 논리로 압박하고 미국의 정책 기조를 대한민국 반공 정부 수립에 유리하게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유도한 이가 바로 이승만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비록 과정은 험난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미국내 인맥과 영향력이 있었던 남한내 단 1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단 1인의 미국에 대한 외교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건국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오늘의 우리는 냉정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승만이라는 단 1인의 외교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가능케 한 것이다.

당시에는 미국의 영향력과 작용이 모든 면에서 절대적이었으니 그런 미국에 인맥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그 상황에서 남한내에 단 한 명도 없었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아예 불가능했고 남한은 1960--70년대의 월남의 상태처럼 혼란을 지속하다가 결국 미군도 손을 떼고 철수했을 것이니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고 마는 수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1970년대의 한강의 기적은 없었을 테고 오늘의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대한민국도 아예 없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미국내 빨갱이, 공산주의자들, 간첩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고 세력이 컸다는 사실은 1950년대의 소위 매카시즘 소동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당시 미국의 핵폭탄 제조 기술을 소련에 넘긴 인물은 바로 미국내에서 일하며 소련에 동조한 과학자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 정도였다.)

당시 미국의 상원 의원 매카시가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폭로한 것을 두고 마치 매카시가 무고한 사람들을 음해하여 공산주의자라고 덮어 씌웠다다는 뉘앙스로 만들어진 말이 바로 <매카시즘>이라는 말인데, 사실은 오늘날 매카시의 폭로가 근거없는 음해가 아니라 그 실체가 있는 폭로였다는 것이 연구에 의해 알려지고 재평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실수라는 걸 할 수 있어 매카시가 잘못 지목한 인물도 있겠지만 그 폭로의 전체적인 실체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매카시즘>이 아니라 <매카시즘 소동>이라고 불러야 옳다. 상원 의원 매카시의 정당하고 실체 있는 폭로와 고발을 마치 근거없는 음해인 것처럼 몰아 간 소동이라는 의미에서 <매카시즘 소동>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은 매카시의 정당하고 실체 있는 폭로를 마치 근거없는 음해인 것처럼 매도하고 몰아가는 거대한 소동이 당시 미국 사회에서 대대적으로 먹혔고 그 후 수십년 동안 미국 사회에서 그 것이 고착되었다는 것이고,

그런 거대한 소동은 일단 많은 정치인들이 동조해야 하고 대다수 메이저 언론들이 받아 써 줘야 하고 따라서 막대한 자금력이 있어야 하고 여러 다른 방식으로 선전도 해야 하니 보통의 세와 규모와 자금력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그 소동의 성공이야 말로 사실은 당시 미국내 빨갱이, 공산주의자들, 간첩들의 수와 규모와 세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고 지금도 그 후예들과 제자들이 대거 존재(PC주의, 글로벌리즘, 페미니즘 등으로 작전을 바꾸고 간판을 바꿔서, 불법 이민 등도 조장)한다는 사실을 역으로 알려 주는 시금석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우파들도 한미동맹 보강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미국내 빨갱이,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와 인맥에 대해 대대적으로 연구해야 할 때라고 본다. 전문 연구 기관까지 차려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공작에 두 번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반민특위는 그 취지는 좋았지만 시대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직후는 과거 청산과 반공을 동시에 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고 반공이 더 중요한 절대절명의 시기였기 때문이었고 양자 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우선 이승만의 1941년 6월 발매 저서인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 일본 내막기>이라는 책을 거론해야 한다. 이는 일본과의 전쟁을 전후한 상황에서 일본에 대해 쓴 책이며 그 해 12월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급이 되었으며 당연히 많은 미국 정치인들, 주요 인사들도 보았을 터이니 그들을 어느 정도 교육시킨 것이라고 봐야 한다. 

비록 아래와 같은 좀 다른 의견들도 있지만,

(가) "물론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상을 이승만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20세기 초부터 일본을 잠재적 적국으로 내정하고 일본의 기습공격을 포함하여 일본과의 전쟁상황을 대비한 오렌지 계획을 준비해왔다. 미 해군 제독 어니스트 킹 또한 전간기에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했었고 실제로 거의 그대로 일어났다." (나무위키에서)

(나) "또한 이승만의 저서는 2차대전 전후에 출판된 영어권의 주요 일본 관련 서적들을 분석, 인용하는 방식으로 집필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언급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일본 내막기를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관련 분야의 영미권 논문이나 서적 자체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일본 내막기가 정말 미국의 대일인식을 획기적으로 뒤바꾼 예언서였으며 돌풍을 일으켰다면 태평양전쟁과 전후 미군정이라는 시기상 다른 일본 관련 유명 서적들처럼 많이 인용되었을 것이다." (나무위키에서)

이에 대해 반론을 좀 하자면,

우선 (가)에 대해서는 이승만은 해당 책에서 단순히 일본의 침략만 예상한 게 아니라 미국내 평화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등 사상적인 측면에서 미국인들에게 설파하고 교육했다고 할 수 있으며이는 그냥 군사적인 예상을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기여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에 대해서는 당시 이승만과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인 이유, 여타 이유 등으로 척을 진 사람들도 미국내 학계나 언론계, 정치계에 있었을 터이고 (그들의 세력은 상상 이상으로 컸고 그들이 미국의 정상적인 정책 수립과 실행을 방해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국에 한 가지 세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미국도 사실은 내부적으로 답이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들이 고의적으로 각종 저술 과정에서 이승만의 책을 언급하고 인용하는 걸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저술되어 전쟁 당사자들인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시사성을 띠고 베스트셀러 급이 된 이승만의 책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 일본 내막기>를 당대에 가까운 시기에 저술된 책들의 저자들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알고도 고의적으로 인용을 회피하지 않았는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다. (이승만의 해당 책에 평화주의자들에 대해 비판하는 등의 사상적인 부분들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는 게 그 회피 이유를 알 수 있는 포인트 중 하나라고 본다. 이는 1945년 이전, 이후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상전과 관련있다고 본다.)

그리고 아래의 의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일본과 미국이 전쟁 전야로 치닫던 194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일본과 아시아에 대해 조예가 깊은 이들이 꾸준히 우려의 목소리를 내오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지만 과연 저 당시 한국인 중에 이 정도 식견을 가지고 책을 내며 한국인들의 독립의 의지와 당위성을 당당하게 세계 여론에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승만 말고 있었냐는 차원에서 대한민국 국민에겐 아주 가치있는 저서라고 볼 수 있겠다." (나무위키에서)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안다면, 이승만의 역량과 행적이 저 정도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 이승만이 큰 기여를 했다고 할만하다. 사상이 담긴 책은 국민의 정신 교육에 필수이고 마침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 급이 된 게 바로 이승만의 책이었으니 해당 책은 그 시대 미국인들의 필요성을 크게 관통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전쟁 상황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사상적으로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메우 큰 것이다. 그 책을 직접 읽지는 않더라도 "그런 책이 있더라" 하는 소문과 존재감만으로도 이미 당시 미국인들의 대일 결전 의지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미국에서의 인지도와 인맥과 영향력을 이미 1945년 이전에 갖추고 있었던 이가 바로 이승만이었으며 반일의 최전선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이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승만이 1945년 직후 남한에서 반민특위를 해산했다고 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건 당시의 시대 상황을 모르고 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일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승만이 과연 과거 청산에 대해 반대하는 마음으로 반민특위를 해산했겠는가? 국제 정세를 잘 아는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당시 남한에 반공 정부를 수립하여 가동하는 게 최우선으로 시급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그리 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정부만 수립한다고 해서 국가가 돌아 가는 게 아니라 행정 인력, 경찰 인력 등 국가의 세부를 움직일 인력들이 당장 있어야 하고 그래야 뻔히 보이는 북한의 공산 정권 수립에 대응할 수 있는데 당시의 당장 가용 가능 인력들은 일제 때 일제와 관련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들을 전부 내쳐 버리면 당장 가용 인력들이 없어지는 판국이었다. 그들을 다 내치고 일반인들을 새로 교육시켜서 뽑기에는 당장 북한의 공산 정권 수립에도 시급히 대응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상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즉, 과거 청산과 반공 정권 수립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당시의 국제 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반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반민특위를 해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2년 1월 6.25 전쟁의 급박한 와중에도 당시 일본 관련 조항들이 담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에 냉철하게 대비하여 동해 바다에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독도 훨씬 너머에까지 해역( 영해로서 선포된 것)을 확보하는 등 누구보다 일본에 강경한 정책을 펼쳤던 이승만이 과연 친일파여서 반민특위를 해산했겠는가 말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만든 불가피한 양자택일을 친일 행각으로 매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과거 청산이냐 반공이냐의 딜레마 상황에서 애국적인 결단으로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반민특위를 해산할 수 있었던 단 1인이 바로 이승만이었던 것이다. 애국자들의 큰 특징은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국가와 국민에게 필요한 일은 반드시 한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는 당시 이승만에게는 다음과 같은 계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국제 정세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승만으로서는 "어차피 앞으로 적어도 100년 간은 미국이 일본을 통제할 것이고 따라서 일본의 세력이 사그러진 이상 한반도 내에서 일본에 부역하는 자들이 발호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 우리가 과거 청산을 못하고 반민특위를 해산한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체 정화가 될 것이다" 라는 계산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1953년 6.25 전쟁 휴전과 더불어 <한미상호방위조약>까지 체결해 버렸는데 이는 그 체결 과정을 보면 그야 말로 이승만 단 1인이 미국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체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이며 그 혜택을 거의 70여년 간이나 보며 누리고 있는 게 바로 대한민국 국민들인 것이며 이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일본 제국주의와 그 부역자들의 발호를 막는데에도 큰 역할을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2025-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