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천대(國府遷臺)는 1949년 12월 7일 제2차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에게 패배한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이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섬(타이완섬)으로 옮긴 사건을 말한다.

1948년 랴오선 전역에서 중국공산당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내준 장개석은 슬슬 중국본토에서 밀려났을때의 대비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정부를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비밀리에 논의했는데 중일전쟁 때 정부를 이전한 적이 있었던 사천성 등 중국 서남부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사천 지방도 공산당의 내부공작과 사보타주가 꽤 있었기에 주저하였다. 또한 최악의 경우 패배하여 내륙에 갇히면 고립되어 빠져나올 방법도 없기에 이 의견은 각하되었다.



<사천성의 잔도>


그리고 최남단 남중국해의 하이난섬도 후보지에 올랐는데 영국령 홍콩같은 중립지역과 가깝고 해상으로 연결도 쉬웠다. 그리고 하이난섬 자체도 면적이 34,300㎢ 정도로 대만섬과 비슷할 정도로 큰 섬이고 농사짓기에 좋은 기후이며 레이저우 반도를 통해 중국남부로 진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장개석은 사천성이나 하이난섬 중에서 한 곳을 골라서 정부를 이전시켜려고 했다.



<하이난섬과 레이저우 반도>


이때 지리학자 장치윈(張其昀)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1945년 반환받은 대만섬으로 가자고 주장하였다. 장치윈에 따르면 대만해협(130 ~ 180km)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하는 대만섬은 해군과 공군이 전무한 중공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고 전략적 요충지로서 유사시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시설도 있으며, 일제의 공산당 탄압으로 인해 토착 공산당 세력이 뿌리가 뽑힌 상태였다. 게다가 장개석에 반항적인 군벌세력이 없다는 점도 장개석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이에 장개석은 1948년 8월부터 유사시를 대비해 정부기관과 군을 대만섬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해군과 공군의 주도로 매일 수송기 수십 대와 수천 척의 선박들이 중국 본토와 대만섬을 오가며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실어나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대만섬으로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 1950년 5월 중공군에게 함락당한 하이난섬
하이난섬은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바이충시와 쉐웨 휘하의 잔존병력인 10만명이 하이난섬으로 후퇴하여 1950년까지도 중화민국이 통치했다. 대만섬도 그렇지만 당시 중공군의 빈약한 해공군 전력으로 바다 건너의 섬을 공략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하이난섬의 면적이 넓고 내륙의 산악지대에 공산당 게릴라가 엄청나게 있는 상황에서 10만 명이라는 병력은 대군이긴 하지만 섬 전체를 지키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하이난섬과 레이저우 반도 사이의 충저우 해협은 고작 30km 수준의 폭을 가지고 있어서 튼튼한 자연방벽이 될수 없었다. 

결국 중공군이 1950년 4월 16일에 민간어선 4백 척을 동원하여 제40군과 제43군 휘하 8개 연대 2만 5천 명이 하이난섬에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잔존한 국부군 해군 전력이 필사적으로 방어전을 시작했으나 워낙 많은 숫자의 선박이 인해전술로 일제히 밀고 내려오며 30km 정도의 좁은 해협을 건너는 것을 막지는 못했으며 곧바로 교두보를 확보한 중공군은 섬 중앙의 산악지대에 있는 공산당 게릴라와 연합하여 국부군을 각 지역별로 고립시켰다. 

지휘관인 바이충시도 장개석의 권유로 이미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친 지 오래며 쉐웨만 남아서 북부 해안선을 강화하고 건너편인 레이저우 반도와 광저우를 공습하는 등 최대한 저항했으나 보급 두절과 병력들의 사기 저하를 해결할 수 없었다. 






원래 장개석이 생각했던 국부천대 후보지 두 곳(사천성, 하이난섬)이 모두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함락당한 것을 고려하면, 장치윈(張其昀)의 안목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수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장치윈은 이후 대만의 교육부장, 국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계 및 관계에서 활약했고 오늘날 대만의 유력 대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중국문화대학을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