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마궁수로 싸웠으며 질 좋은 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진족은 생각보다 야만스럽지 않았다. 이들은 만주를 성공적으로 통치했던 발해의 제도를 상당부분 계승하였고, 거란의 간접지배를 받으면서도 국가체제를 이루기 시작했다.
금나라는 1125년 거란을 멸망시키고 북방(만주, 요동, 내몽골)을 차지했고 2년 뒤인 1127년 북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금나라는 거란과 달리 몽골초원 지대를 직접 통치하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만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여진족은 유목생활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여 초원지대를 직접 통치할 수 없었다. 대신 복속해 오는 일부 유목민 족장을 지원하여 유목민들끼리 서로 분쟁하게 함으로써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나라가 칭기즈칸의 경쟁부족을 지원하자 칭기즈칸은 1206년 몽골을 통일하고 1209년부터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금나라가 중원을 정복하여 직접 통치한것도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여진족은 우선 인구가 적은데다가 문화수준과 콧대가 높은 중국인을 통치할 능력이 부족했으며, 중국생활에 익숙해지자 기병 위주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중국 사대부들의 문치주의 가치관을 받아들인 귀족층이 군사문제를 경시하여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금나라는 초원의 유목민족들을 대상으로 중국식 제국주의를 실시하면서 억압하였다. 이러한 억압정책은 칭기즈칸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켜 몽골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연합체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금나라는 강대해진 몽골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거란이 200년 이상 제국을 유지한 반면 금나라가 100년만에 멸망한 것을 볼때 금나라의 동북아시아 통제력이 불안정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몽골초원에 대한 통치실패 그리고 중원을 직접 정복하여 한화(漢化) 된것이 멸망의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