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불교라고 하면서 정말로 불교인 사람 몇 보지도 못했다.
소원 빌 때에 부처님 찾으면 그게 불교인가?
조사 밑에서 참선한다는 사람들도 시기와 질투를 하고 모함과 헌담을 하는 세상에
일반인 중에서 누가 정말로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심이 있을 턱이 있겠나.
출가해서 머리 밀고 수행한다는 사람들도 몸으로만 수행하지 마음으로는 메너리즘에 빠져 있고
유명하다는 비구나 비구니들 모두 깨달음은 뒷전이고 거짓 설법으로 유명세 타려 애쓰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그래도 혹시라도 82억분의 1이라고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말해준다.
깨달음이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바로 '너'가 무엇인지 깨치는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길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알라는 말인가?"이러겠지?
아니, 그건 너가 아니다.
너의 육신은 딱히 너라고 할만하지 않고
너의 감정도 딱히 너라고 할만하지 않고
너의 생각도 딱히 너라고 할만하지 않고
너의 기억도 딱히 너라고 할만하지 않고
저 모든 것의 총합도 따라서 딱히 너라고 할만하지 않다.
따져보면 딱히 너라고 할 것이 없는데
그런데 그런 줄로 아는 것은 무엇이냐?
모르겠나?
그럼 모르겠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무엇이냐?
이는 모양도 없고 부피도 없어서 처소가 없다.
그러니 이것을 있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그렇다고 감히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럼 이런 줄로 이해하면 깨달음이냐? 아니 천만에.
이 모양도 없고 부피도 없어 딱히 있다 할 수 없게 없지 않은 이것!
이것을 온전히 둘 아니게 깨쳐야 그것을 돈오라고 한다.
그럼 '둘 아니게 깨친다'란 것은 무엇이냐?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주객이 나뉘기 이전의 불이문 안에 든다는 것을 말한다.
깊고 깊은 선정에 들어 한 생각조차도 일어나기 이전의 깊은 선정에서
맑고 밝은 옛 거울이 드러나고 그 거울이 제 스스로를 돌이켜 비춰 들 때에
없고 없고 없다는 것도 다시 없는 본각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찾고 보면 본래 내 것이라 얻은 것도 찾은 것도 아니며
이루거나 성취한 것도 아니며
따라서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릴 것도 아니며
성불은 니기미, 세상이 나기도 이전에 모두 성불해 마쳤고
길거리에 개똥도 부처님의 성물이다.
오로지 이 하나라고 할 수도 없는 하나에서
만물이라는 그림자세상이 찰나 찰나 생멸 변화해가는 이치를
지식이 아닌 그저 바다에 도장을 찍듯 그렇게 묘하게 알게 되면
그 무엇보다 스스로 안다.
"이로서 다 마쳤다"
성불이라고 하니 이뤄야 할 부처가 따로 있는 줄 잘못 알지 말 것이며
견성이라고 하니 봐야 할 무언가가 따로 있는 줄 잘못 알지 말아야 한다.
모든 곳이 문인데 딱히 따로 문이 어디 있을 것이며
모든 곳이 길인데 딱히 길이 어디 있을 것이냐.
무엇이 없이 있어서 모르는 줄을 아는가? 이 무엇인가?
단지 이 뿐이다.
간절하고 간절해야 목숨을 던질만큼 간절하고 간절해야
비로소 그것이 수행이 되는 것이다.
간절함이 지극해서 목숨줄도 던질만큼이 되어야 공포도 넘어서는 것이다.
단지 간절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 참으로 간절하다면
길이 어디 따로 있으며 문이 어디 따로 있나.
모든 곳이 길이요 문이다.
따로 어디 가서 깨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깨칠 것이다.
먼저 걸어 마친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그런 간절함이 없거든 불교 하지 말고 기독교 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