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와 당나라는 유목민족(기병)과 농경민족(보병)의 군사적 장점을 합쳐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기병을 적극 활용했던 당나라와 달리 송나라의 군대는 보병 위주였기 때문에 중국 외부 지역에서의 전투에서는 극히 불리했다. 따라서 명목상 중국을 통일하기는 했으나, 당나라처럼 전아시아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송나라 때의 중국은 대외적인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화폐경제의 발달과 기술혁신 등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하며 11세기 이후부터 세계의 선진국이 되었다.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화약을 비롯한 신무기가 개발되었다. 서기 1044년에 송나라 병법에서 화약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1125년에는 금속통에 화약을 채워 넣은 폭탄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폭탄은 땅에 묻는 지뢰나 물 속에서 터뜨리는 수뢰, 불을 뿜는 화염방사기, 성채를 공격하는 투척용으로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이와 함께 석궁과 투석기를 비롯한 발사무기도 사정거리와 파괴력이 한층 늘어난 형태로 개량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무기(화약무기)가 발전을 해도 송나라의 군사력은 약했다.
이것은 성리학 사상의 영향으로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풍조가 사회적 통념으로 굳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송나라의 군대는 징집된 농민 대신 장기복무를 하는 직업군인 위주로 구성되었으나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에 신무기(화약무기)가 있음에도 전투력은 저하되었다.
이로인해 송나라는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해 대외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수비 위주의 전략을 취하면서 거란과 서하에 많은 공물을 보내 화평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