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초 요나라(거란)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금나라(여진)는 몽골고원의 몽골족들을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통치하였다. 부족들끼리 이간질 시켜서 힘을 합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정책은 처음에는 몽골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있어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몽골 부족들이 금나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후 칭기즈칸이라는 영웅이 등장하자 복수를 위해 금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1211년 칭기즈칸은 10만명의 몽골군을 이끌고 금나라를 침공하였다. 

 


당시 금나라는 장군 완안승유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몽골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이때 금나라 군대는 여진족과 거란족 기병 및 대규모의 한족 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완안승유는 고비사막을 넘어 온 몽골군이 말에게 풀을 뜯기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기병대로 급습을 가하자는 부장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보병이 따라 붙을 수 있도록 천천히 진군하는 쪽을 택했다. 이러한 작전에 불안해하던 부장들은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조언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 

- 오사보 전투
1211년 3월 칭기즈칸은 3남인 오고타이를 시켜서 서경(산시성 다퉁)을 공격하도록 하고, 칭기즈 칸 자신은 본대를 이끌며 국경 근처의 요새인 오사보에 도착했다. 오사보에는 금나라군 기병 3만~5만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다. 6월까지의 전투 끝에 금나라군을 전멸시키고 오사보를 함락시켰다. 







- 야호령 전투: 금나라 주력군이 궤멸되다
양군은 중도(베이징)로 가는 관문인 야호령(장자커우)에서 격돌하였다. 금나라군(30만)이 몽골군(10만) 보다 병력수가 3배나 더 많았다.

 
<1211년 야호령 전투가 벌어졌던 허베이성 장자커우 산악지대: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설상종목 경기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기후가 건조해서 나무는 거의 없고 낮은 관목과 초지로 이루어져 있다.>



야호령의 산악 지형은 기병이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서 보병처럼 싸워야 했다. 이는 경기병 위주로 구성된 몽골군에게 불리하였지만, 금나라 입장에서도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각 부대가 이동하거나 다른 부대와 연계 작전을 펼치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수적인 우세를 활용할 수 없었다. 이에 몽골군은 병력을 집중시켜 지형을 따라 흩어져 배치된 금나라 군대를 각개격파하기로 했다.

칭기즈 칸은 잘라이르 무칼리에게 결사대를 주어 환아취(獾兒嘴)로 보내 기습 공격을 시켰다. 무칼리는 이때 "금군을 격파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약속하였다.

 
                                                                     <칭기즈칸의 왼팔 귀왕 '무칼리'>



무칼리의 군대가 금나라 진영을 우회하여 배후를 공격하는 사이, 몽골군의 주력은 결사적으로 싸워 금나라군의 정면을 돌파하고, 완안승유의 중앙 군영에까지 도달했다. 완안승유는 기병을 보병 앞에 일렬로 배치하였다. 몽골군은 먼저 금나라 기병을 화살로 공격한 후 좌익에서 돌격을 감행하였다. 화살공격이 시작되자 금나라 기병들이 후퇴하면서 보병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병과 보병 모두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대혼란에 빠져 사람과 말이 서로를 짓밟으며, 죽어 넘어진 자가 셀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설상가상 험한 지형 때문에 부대 간 연락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금나라군의 좌익과 우익은 제때 중앙을 구원하러 오지 못했고, 무칼리에 의해 후방까지 교란당하면서 금나라군은 수적인 우위를 살리지 못한채 각개격파 당하고 무너져 내렸다.

좁고 험한 지형에 지휘 체계까지 붕괴된 금나라군은 수백리나 정신없이 후퇴해야 했고, 결국 이 야호령 전투에서 20만명이 전사하게 된다. 


- 회하보 전투
이후 완안승유는 5만명의 패잔병을 회하보(澮河堡)에서 수습했다. 그러나 곧바로 추격해온 몽골군과 1211년 10월, 회하보 전투가 벌어졌다. 3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몽골군은 칭기즈 칸이 직접 3,000기의 기병을 이끌고 돌격해올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고, 사방을 포위한 몽골군의 이러한 집요한 공격에 마침내 금나라군은 전멸했다. 이때 총사령관 완안승유는 목숨만 건져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 전쟁결과
금나라 주력군이 완전히 궤멸되었고 화북과 내몽골의 목초지를 상실하면서 기병전력이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야전에서 몽골군과 전투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비록 당시 금나라의 인구가 3500만명이나 되어서 수십만 병력을 다시 징집할 수 있었지만 전투력이 떨어지는 보병이 중심이 되었기에 방어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공성전에 미숙한 몽골군을 상대로 겨우 수성전을 펼치며 20년간 버티지만 결국 몽골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금나라 장군 완안승유의 허술한 작전이 문제였다.

당시 전세계에서 칭기즈칸의 몽골군을 유일하게 상대할 수 있는 나라가 강력한 기병과 막강한 국력(경제력+인구)을 동시에 보유한 강대국 금나라였다. 하지만 야호령 전투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몽골군은 마음껏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