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대신라 구원군을 파견한 이래 수십년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으로 내정간섭을 받았다. 

이때 신라에 주둔하던 고구려군에 의해 선진군사기술들이 도입되었고, 고구려에 인질로 가있던 왕족과 귀족들에 의해 고구려 선진문물들이 신라에 들어왔다. 

선진문물외에도 고구려 지배층들의 솔선수범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리고 실력 및 능력위주의 인재등용을 배워서 신라는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서기 545년 고구려 양원왕이 즉위하자 왕위계승 분쟁으로 인한 내부갈등 그리고 돌궐의 침공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이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는 북진하여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된다. 

 



신라는 무리하게 북진하여 함경도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함경도는 고구려의 영토이기는 했지만 말갈족(퉁구스계)이 살고 있던 벽지(僻地)였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라야 네가 많이 컸구나. 내가 죽령 이북땅으로는 절대로 넘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어겼구나. 나는 이제 돌궐과 전쟁을 해야하니 적당히 하고 내려가거라!"

신라는 "네 형님! "하고 안변 이남으로 군사들을 곧바로 철수시켰다." '사자는 늙어도 그 위엄을 잃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고구려가 잠시 쇠퇴기를 맞이했어도 그 위엄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북방의 돌궐과 전쟁을 하느라 남쪽땅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니 이제 한강유역을 두고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신라군이 백제군을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진흥왕은 553년 7월 군사를 파병하여 한강 이남까지 확보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으며 그 예하에 신주정(新州停)을 두었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분개하였고 나제동맹은 파기되었다. 한강유역은 원래 백제의 고토였기에 성왕은 즉시 일본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전쟁준비에 착수했다. 

백제 성왕은 백제-일본-가야 3개국 연합군 4만명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554년 7월 백제군이 진성(珎城, 충남 금산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으면서 기세를 올렸다. 







554년 12월에는 관산성(충북 옥천군)을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시켰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백제는 일본에 관산성으로부터 약탈한 비단 2필, 탑등(毾㲪) 1필, 도끼 300자루와 포로 다섯 명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 일본은 백제계 소가 씨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바로 배편으로 승전보를 전한 것이다. 비단 백제계 뿐만 아니라 일본 토착세력(모노노베 씨)도 백제하고 굉장히 친했던 것 같다. 관산성 전투에 참가했던 백제 장수 중에 '모노노베노 마가무'라는 일본계 백제인 장군이 있었다. 즉 백제군의 승리소식에 일본열도도 동시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후 백제의 태자 부여창은 현재의 청성면 굴현성으로 비정되는 구타모라까지 쳐들어가 보루를 구축하고 신라 본토 깊숙하게 칼을 들이밀었다. 이 공세로 인해 신라의 핵심 전략 요충지였던 삼년산성이 위험에 처했고, 이후 추풍령만 넘으면 소백산맥이라는 자연방벽을 넘어 신라 본토로 침공이 가능해졌다. 






- 신라군의 역습과 백제 성왕의 전사
이때 한강유역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장군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동시에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던 가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에 백제는 가야를 지키기 위해 급히 1만의 군사를 남하시키고 신라군과의 교전을 위해 군사를 재배치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백제의 아킬레스건을 자르게 된다. 백제 성왕이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백제 본영에 합류하기 위해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을때 신라군의 역습을 받고 잡히게 된다. 

삼년산군(三年山郡, 충남 보은군)의 비장, 고간(高干) 도도(都刀)를 위시한 병력이 성왕을 추격하여 잡았다.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성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명왕(성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성왕은 신라군에 참수된 후 그 머리뼈가 신라의 궁궐(북청) 계단 밑에 묻혀 백관들이 그 위를 지나가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군 최고통수권자를 어이없게 잃은 백제군은 사기를 잃고 신라군에게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백제-일본-가야 연합군 3만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백제의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대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넷과 사졸 29,600인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였다. 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삼국사기 권제4신라본기 제4 진흥왕 15년 7월자기사>

태자 부여창도 신라군에게 포위당하여 포로로 잡힐뻔 했지만 일본군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탈출하게 된다.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가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간신히 뚫고, 태자가 이 샛길로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전하는데 이후 부여창(위덕왕)은 탈출한 뒤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를 칭찬해 '쿠라지노키미(鞍橋君)'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관산성 전투의 승리로 신라는 한강유역을 영토화하는데 성공했고 가야도 정복하게 된다. 한강유역을 차지하자 서해를 통해 중국과 독자적으로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백제가 몰락하고 신라가 흥기하는 분기점이라고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