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지위를 계승받았다. 연개소문은 무예가 뛰어났으며 칼(비도)을 5자루나 차고 다녔다. 일부에서는 연개소문이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칼을 다섯자루나 차고 다녔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고구려의 풍습이었다. 고구려의 남자들은 전쟁에 대비해서 누구나 다섯 자루의 칼과 숫돌까지 차고 다녔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비도술에 능했다고 한다. 칼 하나를 던져서 적군 여러명을 살상했다고 한다. 
 
 
 



서기 618년 고구려 제27대 국왕 영류왕이 즉위하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에 당 고조 이연은 "중국인 포로들을 송환하고 경관(수나라 군사들의 시신으로 만든 탑)을 허물라"고 하였다. 이후 당 황제가 봉역도(고구려 지도)를 바치라고 하자 영류왕과 온건파는 봉역도까지 당나라에게 바쳤다. 영류왕 굴욕외교의 원인은 온건파 속에 친중파들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야심이 큰 인물이어서 화친을 맺어도 쳐들어 올 것이다. 그런데 왕과 대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연개소문의 걱정은 사실이었다. 서기 640년 사신으로 위장한 당나라 스파이 진대덕이 고구려에 들어와서 곳곳을 정탐하고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 당 태종 이세민에게 보고하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투력이 강한 북방민족(몽골족, 말갈족)들이 고구려를 이탈해서 당나라에게 붙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몽골과 만주에 거주하던 거란족(몽고계)과 말갈족(퉁구스계)이 고구려의 속민(번병)이었는데 고구려(영류왕)가 중국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자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붙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요동과 만주가 위험해졌다. 

 



연개소문은 642년 10월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온건파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정권을 잡았다.   
 




- 1차 고당전쟁
이후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강경책을 펼치며 2차례 큰전쟁을 벌였다. 1차 고당전쟁은 당 태종 이세민이 3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참전하였다. 당나라군 외에도 동돌궐, 실위, 습족, 해족 등 다국적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전쟁 초반 당 태종이 뛰어난 전술로 요동성, 신성, 백암성 등 요동방어선을 일부 무너뜨렸지만 안시성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후퇴하게 된다. 때마침 겨울이 되었고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을 추격하며 요격하자 수많은 당군이 요택과 요서에서 죽게 된다. 연개소문은 외교공작으로 설연타(서돌궐)를 움직여서 당의 수도권을 공격하게 하여 당 태종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당 태종이 도읍으로 돌아가서 이정(李靖)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 



- 2차 고당전쟁 '사수전투'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고구려는 남북으로 양면전선에 직면하여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듬해 661년 당나라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나라는 이전의 패배를 교훈삼아서 요동 방어선에서의 전면전을 피하고, 이를 우회하여 압록강을 거쳐 고구려 중심부(평양)를 직접 공격하였다. 하지만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평양성의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이에 패강도행군과 옥저도행군이 평양도행군을 돕기 위해 평양으로 진군하다가 사수 근처(평양 서남쪽 대동강변)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공격당했다.

투석기로 사수의 얼음을 깨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을 꼼짝 못하게 한 뒤, 연개소문은 패강도행군을 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후 연개소문은 옥저도행군을 공격하여 역시 전멸시켰다. 옥저도행군 총사령관 방효태는 자신이 끌고 온 군사들이 모두 전멸했는데 혼자만 살 수 없다고 이를 거부하며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 3만이 당나라군 20만을 섬멸한 전투가 사수전투이다. 연개소문의 군사적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도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신라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고구려군 포위망에서 벗어나서 해상으로 철수하게 된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신라와의 양면전선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고구려 영웅 연개소문은 원맨쇼를 펼치며 당나라군을 가볍게 제압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연개소문 사후 내분이 일어나서 고구려는 허무하게 멸망하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독재정권을 만든 것은 국가의 힘을 결집시켜 당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남생, 남건, 남산 세아들들에 의해 권력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특히 남생(장남)과 남건(차남)은 각각 수천리의 강토와 수십개의 성들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었다. 남건은 성격이 거칠고 야심만만한 인물이어서 형을 배신할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형인 남생을 태막리지로 삼았으면 나라를 위해 성질을 죽이고 충성해야 했지만 남건은 그렇지 하지 못했다. 

 



즉 나당연합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전쟁을 지속하려면 남건과 남산의 권력을 없애고 남생에게 권력을 몰아주었어야 했지만 연개소문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분열되어 멸망한 것이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동시에 쳐들어오는데 고구려의 주요성들은 남생편과 남건편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었으니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