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바다에 접하지 않은 내륙지역이어서 소금이 귀했다. 소금을 먹지 못하면 사람이 살수 없다. 게다가 냉장고가 없던 과거에는 음식을 오래 저장하는데 소금이 반드시 필요했다. 
 



건주여진은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소금을 구했다.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조선의 소금 및 쌀 그리고 건주여진의 토산물이 거래되었다. 

함경도도 마찬가지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야인여진과의 소금 및 담비 가죽 무역으로 먹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17세기 초 누르하치가 거병하여 명나라 와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명나라는 조선에게 누르하치와의 무역을 끊을 것을 요구했다. 조선은 상국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어서 여진과의 무역을 중단했다. 결국 여진족은 소금부족에 시달렸다. 

1619년 여진족을 모두 통일한 후금은 1620년부터 소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다. 야인여진(동해여진)을 정복하면서 동해바다와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니루에서 각각 4명씩 뽑아 해 뜨는 쪽 바다(동쪽 바다)에 가서 소금을 만들어라." 



당시 후금은 360니루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총 1,440명이 동해바다로 파견된 것이다. 

후금이 소금을 제조한 곳은 조선 국경(녹둔도)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이로인해 조선 국경수비대에게 목격되었고 이를 보고 받은 함경 감사가 조선 조정에 "후금이 국경 근처에서 소금을 굽고 있다"는 장계를 보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1620년 8월 19일 기사>


누르하치는 약 1,400명의 사람을 동해 바다에 보낸지 8개월 만에 엄청난 양의 소금을 제조하여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어서 민생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당시 후금이 생산한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자염(煮鹽)'이었다. 바닷물에 평균적으로 3.5%의 염분이 들어있기에 소금을 얻기 위해 96.5%의 물을 끓여 날려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땔감이 필요해서 염전소금보다 비쌌는데 당시 연해주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산에 나무가 풍부해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제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염은 염전소금보다 위생적이고 맛이 좋은 고급 소금이다. 오늘날 영국의 말돈(Maldon) 소금이 대표적이다. 질감과 맛이 좋아서 고기에 뿌려 먹으면 좋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