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 8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자, 몽골이 시비를 걸어왔다. 이해 가을부터 몽골이 후금의 북서쪽 변경지역에 침략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고 한다. 

이에 누르하치는 몽골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종논과 상아르자이 등 너희 몽고 부족이 나의 예허 땅에 쳐들어 와서 양식을 운반하는 예허 사람을 반이나 죽였다. 너희 몽고가 나와의 약조를 깨고 개원성에 쌓아 놓은 갑옷과 물품도 모두 가져갔다. 나와 내 군대가 피 흘리며 싸워서 취한 개원, 철령, 예허 땅의 양식, 사람, 말, 소 모든 물건을 너희 몽고는 무엇 때문에 가져갔느냐? 내가 공성을 할때 너희 몽고가 지원군을 파견했느냐? 너희 몽고가 밭을 가는데 도움을 주었느냐? 너희 몽고국은 가축을 돌보며 고기를 먹으며 가죽을 입으며 살았느니라. 우리 나라는 밭에 씨뿌리며 양식을 먹으며 살았느니라. 우리 둘은 다른 말을 쓰는 다른나라이다. 너희 몽고국이 이렇게 동맹관계를 깨며 죄를 짓는 것을 몽고 지도자들이 아느냐? 너희 몽고가 가져간 양식 1천 석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만약 가져간 양식을 이미 먹었다면 그 대신 양 천마리, 소 백마리를 보내라! 그렇게 하면 포로로 잡고 있는 몽고인 30명을 보내주겠다. 또한 너희 몽고가 잡아간 여진인, 말, 소를 모두 조사하여 보내고 너희가 죽인 사람들을 위해 위패를 세워라!" <만문노당 1619년 11월 기사>



이 기록을 통해 여진족은 농경민이었고 몽골족은 유목민족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진족이 농경민이었다는 것은 조선의 기록을 통해서도 검증이 된다. 1595년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기록에 건주여진 사람들의 생활상이 나타나있다. 


"서(墅) 가운데 일구지 않은 곳이 없고, 산 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많이 개간했다." 

"토지는 비요(肥饒)하고, 화곡(禾穀)은 심히 무성하다." 

"밭이 비옥한 곳이면 1두의 조를 파종하여 8 ~ 9석은 수확할 수 있고 척박한 곳이면 1석도 겨우 수확한다." 

"추수한 후에는 즉시 실어 들이지 않고 밭머리에 묻어 두었다가 얼음이 언 후에 가서야 실어들인다."

"건주여진인들은 모두 물을 따라 살기 때문에 집은 냇가에 많고 산골짜기에는 적었다."

"건주여진인들의 집은 옥상 및 사면을 모두 진흙으로 두텁게 바르기 때문에 비록 화재가 발생해도 개초(초가지붕)만 탄다."

"집집마다 모두 닭, 돼지, 오리, 염소 등의 짐승을 길렀다." 

"육축(六畜)은 오로지 말이 가장 성하다. 장호(將胡, 상급 여진족)의 집에는 1천 필, 100필의 말떼를 이룬다. 졸호(卒胡)의 집도 10여 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건주여진은 정착농경민으로 밭농사를 주로 지었고 닭, 돼지, 오리, 염소고기를 먹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소와 개는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가축 중에서 말을 가장 중요시했는데 귀족집에서는 100필 ~ 1천필의 말을 키웠고, 일반백성집에서도 최소 말을 10필 이상 키웠다. 그만큼 기병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건주여진이 밭농사를 짓고 돼지고기를 즐겨먹었기에 한반도 북쪽 사람들(평안도, 함경도)과 생활상이 유사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반면에 몽골족은 유목생활을 하고 양고기와 유제품(우유, 치즈, 버터)을 주로 먹었기에 생활상에 차이가 있었다. 

 




- 고구려, 발해와의 관련성
후금은 고구려, 발해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읍루)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挹婁)편

12세기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울때도 언어가 다른 발해사람들은 철저히 이민족 취급하였다. 누르하치도 조선의 임금을 고려의 임금이라고 부르면서 조선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여겼고 자신은 금나라의 후손이라고 구분을 지었다. 금나라어(퉁구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옛날 금 황제의 대에 흩어진 와르카 부족민(야인여진)이 고려에 들어가서 고려의 경계에 늘어서서 살던 와르카를 수러 쿤두런 한(누르가치)이 조사하며 모두 가져오라! 하며 대명국의 만력제에 글 올려 고소한 후에 만력제는 고려의 임금(광해군)에 말하며 조사하게 하고...." <만문노당 1609년 2월 기사> 


비록 건주여진이 고구려의 옛땅에 거주해서 생활상은 유사했지만 민족과 언어는 분명히 달랐던 것이다. 


- 조선의 함경도를 후금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누르하치
누르하치가 조선의 함경도를 후금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이유도 여진족의 옛땅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고려시대때 함경도지역에는 퉁구스어를 쓰는 여진족(말갈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함경도가 조선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보고 포기하게 된다. 만약 후금이 고구려의 후손이었다면 중심지였던 평안도(평양)를 편입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함경도만 편입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손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