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는 거병한지 36년째인 1619년 8월 마침내 여진어(퉁구스어)를 쓰는 부족들(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을 모두 통일하게 된다. 여진족은 금나라 멸망 후 385년 만에 누르하치에 의해 다시 통일된 것이다. 

이때 여진족(만주족) 총인구는 13만 ~ 14만명이었다. 군인으로 복무할 수 있는 16세 ~ 60세 남성의 인구(남정, 男丁)가 6만명이었다. 

당시 조선의 총인구는 513만명이었고, 남정(男丁)은 226만명이었다고 한다. 인구로 산출한 국력면에서 조선은 후금보다 36배 더 강한나라였다. 하지만 후금은 조선과 전쟁을 벌이면 언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은 문치주의와 부정부패로 워낙 군사력이 약해서 그렇다치더라도 후금군은 동아시아 최강국 명나라군 그리고 강력한 기병을 보유했던 몽골군과의 기병전에서도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후금군이 강했던 3가지 이유가 있다. 

1. 철저히 능력과 실력 위주로 선발한 우수한 군지휘관
2. 포상제도(평민이라도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장수가 될수 있음)
3. 연전연승으로 높은 군사기 
4. 강력한 군마로 이루어진 정예기병

하지만 인구 1억6천만명의 명나라를 상대하려면 군대의 양적 증가가 필수적이었다. 이때문에 후금은 중국 한족과 몽골족을 군대에 편입시켰다. 

1648년 후금(청)의 팔기군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만주족(기병): 55,000명
몽골족(기병): 29,000명
한족(보병위주): 46,000명
도합: 13만명

1633년부터는 홍이포(불랑기포)라는 서양의 대포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후금의 포병부대> 



1633년 4월에는 명나라의 경중명과 공유덕이 수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여 해군력까지 생겼다. 

 
                                                                              <명나라의 전함 '사선'>



1636년 겨울 병자호란때 후금(청)은 만주족(기병) + 몽골족(기병) + 한족(보병)으로 이루어진 12만명의 군대와 포병부대 그리고 해군까지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후금(청)은 조선의 영토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외교만 잘했어도 전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조선의 인조정권이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청)을 배척하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쳐들어왔다. 경직된 성리학 사상이 전쟁을 불러온 것이다. 

조선군은 최소 5만명이 전사했고, 전쟁 후 60만명이 포로(노예)가 되어 후금(청)으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