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중국 북방을 점령하고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후예들은 16세기에도 여전히 만주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금나라어(퉁구스어)를 쓰고 있었기에 주변민족들(한족, 몽골, 조선)과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여진족은 명목상 명나라의 속국이었지만 워낙 거칠고 강맹한 민족이어서 함부로 할수 없었다. 명나라는 경제적 힘을 이용하여 여진족들을 분열시켜서 힘이 합쳐지지 못하도록 막았다. 

여진족들이 거주하는 만주는 춥고 척박하며 문명수준이 낮아서 물자가 항상 부족했다. 이에 명나라는 칙서(무역허가권)를 말을 잘듣는 유력부족들에게만 나누어 주었다. 칙서를 받은 여진족들은 만주에서 생산한 토산물(말, 모피, 산삼)을 가지고 명나라 상인과 교역하여 농산물, 비단, 옷감, 서적 등을 가져왔다. 칙서를 받은 부족만 물자가 풍부하였기에 여진족들끼리 서로 칙서를 확보하기 위해 또한 물자를 약탈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다. 

 

 
여진족 영웅 누르하치는 건주 좌위의 한 부족장 집에서 태어났다. 누르하치의 아버지 탁시는 1583년 경쟁 여진 부족장인 니칸 와일란과 명나라군의 공작으로 피살되었다. 칙서(무역허가권)를 둘러싼 여진족 내전때문이었다. 명나라 요동총병관 이성량은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온 누르하치에게 보상금으로 칙서 30통을 주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이일로 인해 명나라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갑옷 13벌과 병사 100명 그리고 명나라가 하사한 칙서 30통을 가지고 힘을 길러서 여러 여진부족들을 통합하여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는 1601년 유명한 팔기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이 제도는 과거 금나라의 맹안모극제와 같이 전체 인구를 군사편제 및 지원 가구로 조직한 제도였다.






1616년 누르하치는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1618년이 되자 누르하치는 해서여진의 엽혁부를 제외하고 여진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칠대한(七大恨, 명나라에 대한 7가지 원한)을 공표하고 명나라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 하였다.  

결국 명나라는 누르하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 해에 누르하치는 무순을 탈취하고, 무순 탈환을 위해 파견된 명나라 군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양호를 요동경략으로 임명하고 엽혁부와 조선군을 포함한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후금을 치도록 하였다. 

 
1619년 4월, 명나라의 원정군은 병력을 북로군, 서로군, 남로군, 동로군의 넷으로 나누어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했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명나라 군에 비해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여진족과 몽고족으로 구성된 기병이 주축이 되어 기동성이 우월했다. 누르하치는 병력을 집중시켜 사르후, 상간애, 우모채에서 명나라의 서로군, 북로군, 동로군을 각개격파 하였다. 이를 본 서남로군은 황급히 퇴각하였다. 

동로군에 속해있던 조선군의 종사관 이민환은 저서인 <<책중일록>>에서 후금 기병들의 진격모습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석양이 지는 가운데 적의 철기가 진격하는 모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심하전투 당시 파병된 조선군은 총 1만4천명이었다. 

벌판에 진을 쳐서 후금군의 공격을 받은 좌영과 우영의 조선군 7천명이 순식간에 전멸당했고, 벌판에 조선군의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겁에 질린 조선군 도원수 강홍립은 언덕에서 내려와서 곧바로 후금군에 항복하였다.

 



사르후 전투 당시 후금군은 약 8만명의 연합군을 냉병기(창, 칼, 활)만 가지고 순식간에 전멸시켰다.   



- 후금군이 명나라 최강의 사천 장창병 2만명을 무찌르다.
후금은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곧바로 요동 점령에 나섰다. 

 



1621년 후금군은 심양에서 사천(泗川)의 장창병(長槍兵) 2만명과 마주치게 되었다. 사천 장창병은 명나라 최강의 보병부대였고 기병을 상대하기에 적합했다. 명나라의 최신 군사기술을 모두 동원하여 강력한 무장과 장갑을 갖춘 부대였다. 




사천 장창병을 본 누르하치는 그대로 돌격했다가는 기병들의 피해가 막심할 것으로 생각하고 한족 팔기(조총 및 방패차 부대)를 이용하여 신중하게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후금의 정예기병이었던 우익 4기의 바야라 군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사천 장창병을 도륙하자, 누르하치는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려서 2만에 달하는 사천 장창부대를 모두 전멸시켰다. 물론 먼저 장창병에게 돌격했던 후금군 우익 4기의 장수 3명은 전사했다.
 



후금군은 기병들의 전투력, 용맹함, 실전경험 그 자체가 전술이었던 것이다. 패권국이었던 명나라는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군사기술과 서양의 군사기술(불랑기포, 망원경)까지 동원했지만 야전에서 후금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요동을 후금에게 빼앗긴 명나라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