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초반 신라는 가난하고 약한나라였다. 한반도 동남쪽 끝, 동해바다와 높은산맥에 둘러싸여 있어서 궁핍하였다. 신라왕성을 둘러싸고 있던 반월성은 흙과 목책으로 이루어진 토성에 불과했다. 이 반월성 아래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읍락이 신라였다. 
 



당시 북서쪽의 넓은 들판은 사벌국(상주)이 차지하고 있었고, 서쪽의 구릉지 분지는 골벌국(영천)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좁은 경주분지만 차지하고 있던 신라의 생산력은 보잘것 없었다. 

신라에는 부족 국가 시대의 관습, 기질, 사고방식 속에 폐쇄성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혈족을 중시한다. 이로인해 귀족과 예속민들이 씨족사회 속에서 뭉쳐서 살았기 때문에 넓은 외부세계를 파악할 수 없어서 발전이 느렸다. 

게다가 거듭된 일본의 침략에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규슈에 본거지를 둔 야마타이국은 약소국 신라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이때 일본은 백제이주민들이 건너가기 전에 살던 토착세력들로서 문명수준이 아주 낮았다. 제철기술이 없어서 철을 한반도에서 수입하였고 문자도 없었고 소와 말 등 가축도 없어서 기병도 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신라는 야마타이국의 침략에 시달렸다. 대마도에 군사기지를 두고 매년 신라에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경주 왕성도 여러차례 공격을 받았다.  

 
<일본 야마타이국 군사들의 갑옷과 무장>



이때 신라에 '석우로'라는 영웅이 나타났다. 우로는 신라왕족으로서 제10대 국왕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사도(沙島 ,영일)에 배를 정박하고 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의 지리를 잘알고 있던 우로는 화공(火攻)으로 일본군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우로가 이끄는 신라군이 접근하자 일본군은 밀집대형을 만들어서 대응하였다. 신라군이 더 높은지대에 위치하여 일본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처럼 생긴 불덩어리가 저녁때의 육풍과 내리막길을 타고 해안가의 일본군쪽으로 맹렬히 굴러왔고 일본군 배와 막사가 모조리 불에 탔다. 신라군들이 빽빽이 창을 든채 언덕위에 진을 치고 있었기에 일본군들이 올라오지 못했고 결국 동해바다로 뛰어들어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우로가 일본군을 섬멸하자 신라국의 국제적 지위가 올라갔다. 영천의 골벌국 왕 이음부가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신라에 병합되기를 자청했다. 멀리 서쪽에 위치한 고타(경남 거창군)에서도 조공을 바쳤다. 

244년 우로는 신라 최고의 관등인 서발한(舒發翰)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우로는 허세를 부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제12대 국왕 첨해왕 시기 일본국 사신 접대를 맡은 우로가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을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모욕하였다.


 



분개한 일본사신은 첨해왕에게 항의하였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본왕에게 그대로 전했다. 대노한 일본왕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로 쳐들어왔다.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첨해왕은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 귀족 회의를 열었다. 첨해왕은 우로가 자신의 친척(4촌)이기에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하였지만 신라귀족들은 아주 냉정하였다. 우로가 허세(말실수)를 부리다가 벌어진 일이기에 군사를 내줄수 없다고 하였다.

첨해왕은 하는 수 없이 우로와 함께 자신이 속한 씨족의 병력만 이끌고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는 동해안으로 갔다. 병력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기에 승산이 없었고 군사들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신라 병사들은 우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석우로는 첨해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환란은 저때문에 발생한 것이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고는 단신으로 일본군 진영으로 갔다. 아무리 우로가 자청했다고 하지만 그를 홀로 사지(일본군 진영)에 가도록 한 것은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었다.  

우로가 오자 일본군들은 그를 포박하여 바닷가로 끌고 갔다. 일본군이 추궁하자, 우로는 "그저 술자리에서 농담을 했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우로의 비명이 들렸다. 일본군은 우로의 다리를 포박하고 무릎 뼈를 빼냈다. 그가 포복한 돌 위에 피가 낭자했다. 잠시 후 우로는 참살되었다. 

목적을 달성한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신라왕과 귀족들은 왕족이 죽어가는 것을 알고도 방관했다. 일본군을 두려워하여 모두 거처에 숨어있었다. 

이후에도 일본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서기 400년에는 일본-백제-가야 3개국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신라는 멸망위기에 처했지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구원군을 보내면서 살아나게 되었다. 전투력이 강했던 일본군이었지만 고구려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이 되어 수십년 동안 내정간섭을 받게 되지만 외침이 줄어들었고 고구려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의 원동력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