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근대시대 일본의 세율은 한반도 보다 높았다. 특히 15세기 이후 전국시대가 되면 세율이 최소 50% ~ 67% 였다고 한다. 각 지역의 영주들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율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일본 백성들은 굶어죽지 않았고 생활수준을 유지하였다. 덕분에 일본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임진왜란 직전 인구가 1500만명이나 되어 조선보다 약 2배나 더 많았다.
세율이 가혹할 정도로 높았는데 인구와 국력이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농업생산력 자체가 높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1336년 무로마치 막부시대부터 1년에 3번(3모작)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쌀 → 메밀 → 보리의 3모작 이었다.
가을에 쌀을 추수한 뒤 생육기간이 70일로 가장 짧은 메밀을 심어서 겨울에 추수하고 이후 보리를 심어서 늦봄에 추수했던 것이다.

<일본 메밀국수 '소바'>
1420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사신 송희경은 오사카 인근의 아마가사키에서 3모작을 목격하였고 『일본행록』에 기록을 남겼다.
일본은 1년에 3번이나 농사를 지을 정도로 천혜의 기후조건(온난 습윤)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기후조건 덕분에 산과 들에 사시사철 나물도 풍부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쌀생산량의 7할을 세금으로 뜯어가도 조선백성들보다 잘먹고 살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일본을 방문했던 통신사들은 일본백성들이 조선백성들 보다 잘 먹고 잘 산다고 평가하였다. 심지어 변방지역인 대마도 백성들도 조선백성들보다 훨씬 부유하다고 평가했다.
"대마도의 시장에는 각종 물건들이 산같이 쌓였으며, 백성들의 살림집에는 곡식이 널려 있으니, 백성의 부유함과 풍성함이 조선과 비교가 안 되었다. 이렇게 물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질서가 있어서 도둑과 난동꾼이 없으며 거리가 깨끗하니, 일본 섬오랑캐의 질서와 법령이 대단한것 같다. - 조선 통신사 강홍중-
한반도의 농업생산력이 일본보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은 후기에 가서도 일부지역에서만 겨우 2모작이 가능하였고 대부분 지역은 밭농사 위주로 1년에 한번만 농사가 가능하였기에 백성들이 아주 가난하였다. 겨울이 춥고 봄에 비가 안와서 건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도 겨울이 추운 북쪽지역은 3모작이 불가능 하여 식량이 부족했다. 니가타현 에치고국의 영주였던 우에스기 겐신(1530~1578)은 봄철만 되면 식량이 떨어졌다. 이에 매년 군사를 일으켜 관동 지역으로 쳐들어가서 보리를 약탈했다고 한다.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
- 고율의 세금과 기근으로 발생한 마비키
마비키(間引き)는 에도 시대 일본의 영아 살해 악습으로 아이가 3명을 초과하면 식량부족 때문에 죽이는 일이 많았다. 일본 전역에서 일어났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했던 일이다. 겨울이 추워서 식량이 부족했던 도호쿠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다고 한다. 에도 시대 당대의 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저서「경제요록」에 의하면 무츠국(후쿠시마현, 미야기현, 이와테현, 아오모리현과 아키타현 북동부 지역)과 데와국(야마가타현과 아키타현)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도호쿠가 아닌 지역은 가즈사국(치바현)에서만 발생하였다. 에도 시대 전반적으로 기온이 낮아지는 소빙하기로 인해 도호쿠 지방에 기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 일본기후의 단점
일본의 덥고 습한 기후가 농사짓기에는 좋았지만 안좋은 점도 있었다. 1420년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사신 송희경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모기는 조선 남쪽 지방 모기보다 몇배나 크고 훨씬 독하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 모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일본에는 몸이 검은 큰 모기가 많다. 아침에 해가 이미 나온 뒤에도 오히려 발 곁에 있고, 저녁에는 아직 해도 지기 전에 이미 공중에 어지럽게 날고 마루와 방에 가득하여, 사람이 눈을 뜰 수가 없다. 비록 모기장 속에 들어가 누워도 모기 한 마리만 숨어 들어오면 문득 잠을 잘 수 없다."
검은 모기 조선 남쪽 고을보다 배나 심하여 / 黑身蚊子倍南州
날마다 발 옆과 방머리에 가득하이 / 日傍簾鉤滿屋頭
긴 부리로 살을 무니 잠잘 수 없어 / 長喙噬膚眠不得
방장 속에 꿇어앉아 쫓고 있다네 / 帳中危坐使人驅
조선사신 송희경의 일본 행록, 1420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