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인들이 전해준 문명
1. 가축(소, 말)
2. 문자(한자)
3. 비단제조기술
4. 바늘제조기술
5. 제철기술
6. 건축기술(기와, 목조탑 등)
일본은 신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웠음에도 백제와 잘맞았고 신라와는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사이가 안좋았다.
6세기 초에는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지면서 일본 국력이 더 강해졌다. 불교를 통해 일본의 모든 부족들이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제계 '소가 씨'가 불교를 국교화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 토착세력이었던 '모노노베 씨'는 반대하였다.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백제계가 승리하면서 일본은 불교를 국교화하였다.

일본 야마토 정권은 백제계가 완전히 장악하였고 최고지도자였던 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국교화하고 일본사회를 개혁하였다.
쇼토쿠 태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족세력들을 약화시켰다. 호족세력들끼리 싸우지 말고 화합하라고 장려한 정신이 '와(和) 정신'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라는 정신으로 오늘날 일본인에게도 깊숙히 박혀 있다.
이후 쇼토쿠 태자는 관리들의 등급인 '관등제'를 실시하고 왕과 귀족들이 정사를 돌보는 '조정'이라는 기관도 만들었다. 또한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중국과도 교류하였다. 여기서 나온 정신이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 정신이다. "좋은 것은 무조건 취한다는 말이다." 상대가 강하고 유익하다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는 실용정신이었다. 이러한 실용정신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하게 된다. 반면에 중국과 조선은 유교의 정신승리(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근대화에 실패하였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수도도 정하였다. 나라현 아스카를 수도로 정하여 아스카 시대를 열었다. 아스카는 백제 이주민들이 정착한 지역이었다.

쇼토쿠 태자의 개혁 덕분에 연합왕국에 머물러 있던 일본은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였다.
일본의 정신과 문명발전에 기여했기에 1984년까지 일본 최고액권 지폐의 모델은 항상 쇼토쿠 태자였다.

- 대륙과 한반도의 정세변화
서기 645년 대륙과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당나라와 고구려간에 전쟁이 발발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일본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나카노오 태자가 규슈에 임시 정부를 설치하고 구원군 파견을 직접 지휘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병선 1,000척에 4만 대군을 파병하였다. 전국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서기 663년 8월 금강하류 지역에서 일어난 백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당나라군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당시 백제지역에 주둔하던 나당연합군의 정예병력은 당나라군이었고 신라군은 보급을 주로 담당하였다. 당나라군은 당시 세계최강의 군대였기에 이제 막 문명화된 일본군이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군들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아! 백제의 최후 거점인 주유성마저 무너졌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갈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인들에게 백제는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조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백강전투 대패로 인해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구원군을 지휘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하지만 서기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하자 당나라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중국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서기 900년경 견훤이 서남해로 가서 그곳 백성들에게 "의자왕의 원한을 풀기위해 왔다."라고 하면서 지지를 얻고 백제를 부활시켰다. 이후 신라의 수도 경주를 함락시키고 경애왕을 죽였다. 백제의 후손인 일본인들이 견훤에게 열광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볼수 있다.
백제왕족 출신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라는 장군이 있었다.

흑치(黑齒)란 검은이를 말한다.
일본의 흑치(黑齒) 풍습인 오하구로(お齒黑) 화장이랑 일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