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에서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은 "우산도"임.

조선왕조 각종 사료에서 등장하는 우산도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됨.

비교적 장문이니까 바쁘면 4. 조선말기부터 읽어봐도 됨.





0. 울릉도 지도


우선 울릉도와 독도의 정확한 위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





많은 한국인들이 울릉도 주변 섬이라곤 독도를 전부로 알고있는데, 울릉도 주변에는 죽도와 관음도라는 섬이 있음.








독도는 울릉도에서 91키로 떨어진 섬임.

직선거리로 대구에서 부산보다 좀 더 먼 섬이라는 것.




참고로 "우산도"라는 섬이름은 삼국시대 울릉도에 거점을 둔 나라인 "우산국"에서 그 기원을 찾아.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울릉도에 거점을 둔 나라가 우산국이라면 울릉도를 우산도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잖아?

삼국시대 일반 어부들의 선박으로 대구에서 부산거리를 배로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할테니까.





1. 조선전기

조선시대는 울릉도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했음.

당시 선박 기술로 울릉도까지 정부 관리를 보내서 통치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독도는 커녕 울릉도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었음.



(1) 태종실록(1425년)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 물소가죽, 생모시, 목화솜, 떡갈나무 등을 바쳤다. 또한 거주하던 사람 3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 섬은 호(戶)가 무릇 15가구이고 남녀 아울러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듭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태종실록에서 우산도는 15가구, 86명이 살고 있는 섬으로 기록돼있다. 울릉도를 우산도로 표기한 것으로 보임.



(2) 고려사(1451년)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縣)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于山國)이라 칭하고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이라고도 하였다. 넓이가 100리(里)이며 지증왕(智證王) 12년에 항복하여 왔다. <중략> 일설에 의하면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는 우산도와 울릉도를 하나의 섬으로 작성한뒤, 일설에 의하면 실은 두개의 섬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하나의 섬인지 두개의 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임.



(3) 세종실록(1454년)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우산도와 무릉도(울릉도)가 두개의 섬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대구에서 부산 거리의 뱃길을 "멀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나 울릉도에서 맑을때만 보이는 섬은 독도 뿐이라는 이유로, 우산도=독도설을 지지하는 중요 근거중 하나



(4) 동국여지승람(1531년)

우산도는 무릉도(武陵島)를 말하고, 울릉도는 우릉도(羽陵島)를 말한다. 두 섬이 고을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 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땅의 둘레는 백 리 라고 한다.

우산도와 울릉도는 두개의 섬이랬다가, 마지막엔 또다시 "일설에 의하면 원래 하나의 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또다시 우산도와 울릉도가 두 섬인지 하나의 섬인지 파악이 안되는 모습을 보임.



(5) 조선전기 고지도에서의 우산도





조선전기 우산도 지도를 보면, 울릉도 서쪽에 우산도를 그리고 섬의 크기도 울릉도와 비슷함.

각종 지리서에 동해바다에 두개의 섬이 있다고 하니, 그 인식을 반영한것으로 보임




(6) 조선전기까지의 인식 정리

조선전기까지 우산도의 인식을 살펴보면 하나의 섬이랬다가 두개의 섬이랬다가 오락가락하는 것으로 보이며, 

경우에 따라 울릉도를 우산도로 묘사한 경우도 존재한다.





2. 조선중기

조선이 울릉도를 무인도로 비워놓자, 일본어부들이 울릉도에 거주하기 시작함

그래서 울릉도가 누구땅인지 소유권을 놓고 조선과 일본이 한판 붙게 되지.

그 과정에서 그 유명한 안용복 사건이 발생하며, 우산도에 대한 인식 변화를 겪게됨.



(1) 숙종실록(1693년)

 제가 앞장 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당시 독도의 일본식 명칭)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당시 독도의 일본식 명칭)는 우산도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우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울릉도에 일본인이 거주하는 것에 빡친 안용복은 왜 남의 땅에서 사냐고 야단쳤다고 함.

그러자 일본인은 자기들은 원래 송도(당시 독도의 일본식 명칭)에 살며 곧 돌아갈것이라 얘기했다고 한다

빡친 안용복은 "송도는 우산도로 거기도 우리나라 섬이다"고 하며 담날 새벽에 배를 몰아 송도에 가서 일본인들을 몰아냈다고 한다.

송도가 우산도라는 안용복의 주장은 우산도=독도설에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지.(그래서 안용복을 독도지킴이라 부름)


다만 일본인들이 우산도에 본가를 두고 있었으며, 울릉도에서 새벽에 배를 몰아 아침먹기 전에 우산도에 도착했다는 주장,

일본인이 우산도에서 밥을 해먹었다는 주장을 보면, 안용복이 간 섬은 독도가 아니라 "죽도"라는 주장도 존재함







(2) 울릉도사적(1694년)


안용복 사건을 겪은 후, 조선정부는 비로소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해 울릉도 상태를 조사하게 됨.

이 때 파견 관리는 울릉도 주변 지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관측기록을 남김


비가 개이고 구름이 걷힌 날 중봉에 올라보니 남쪽과 북쪽에 두 봉우리가 우뚝솟아 마주보고 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삼봉이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보니 남동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1/3이 안되고 거리는 300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동남쪽, 300리라는 관측 기록을 보면 분명히 독도를 기재한 것으로 보임.

만약 우산도=독도라는 것을 인지했다면 이 섬을 우산도라고 기재했을 것인데, 아무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장한상은 저 섬을 우산도로 생각안한것으로 보임.




(3) 승정원일기(1735년)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하니, 취로가 말하기를 정축-무인년간에 조정에서 장한상을 보내어 (울릉도를) 보고 형상을 그려온 이래 울릉도가 넓고 윤택하며 토질이 비옥하다고 들었으며, 더하여 사람이 살았던 자리가 있고, 혹은 배가 왕래하였던 흔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서쪽에는 또 우산도가 있는데 또한 역시 넓고 기름지다고 말하였습니다.


장한상의 보고서를 근거로 임금에게 보고하는데 장한상은 우산도를 넓고 기름지다고 말하였다고함.

즉 장한상은 현재의 죽도를 우산도로 보고한 것임. 아마도 울릉도 주변에 우산도로 불릴만한 섬은 죽도밖에 없다고 생각했던것같음
(우산도가 서쪽에 있다고 기술한 것은 단순 오기라고 보는 설이 다수설)




(4) 조선 중기 고지도







장한상이 울릉도를 방문한 후 대부분의 지도에서 우산도는 현재의 죽도 위치에 그림을 그림



(5) 조선 중기 인식 결론

장한상이 울릉도를 직접 방문해본 뒤 우산도 = 현재의 죽도로 인식하게 된 것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음.





3. 조선말기

고종때 다시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와서 살게됨

이를 우려한 고종은, 감찰 이규원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함


(1) 고종실록(1882년)

고종이 하교하기를,

"울릉도에는 근래에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무때나 왕래하면서 제멋대로 편리를 도모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송죽도와 우산도는 울릉도의 곁에 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또 무슨 물건이 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번에 그대가 가게 된 것은 특별히 가려 차임한 것이니 각별히 검찰하라. 그리고 앞으로 읍(邑)을 세울 생각이니, 반드시 지도와 함께 별단(別單)에 자세히 적어 보고하라."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우산도는 바로 울릉도이며 우산이란 바로 옛날의 우산국의 국도이름입니다.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떨어진 거리는 30리쯤 됩니다. 여기서 나는 물건은 단향과 간죽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고종이 하교하기를,


"우산도라고도 하고 송죽도라고도 하는데 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그리고 또 혹은 송도·죽도라고도 하는데 우산도와 함께 이 세 섬을 통칭 울릉도라고 하였다. 그 형세에 대하여 함께 알아보라. 울릉도는 본래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가 돌려가면서 수검하던 곳인데 거의 다 소홀히 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저 외부만 살펴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었다. 그대는 반드시 상세히 살펴보라."



고종은 송죽도, 우산도가 울릉도 곁에 있다고하는데 서로 거리가 얼마나 되며 무슨 물건이 나는지도 알수 없다고 얘기함ㅋㅋㅋ

19세기까지 독도는 커녕 울릉도에 대해서도 잘 몰랐던것이 현실이었음 ㅋㅋ

거디다대고 이규원은 우산도와 울릉도는 같은 섬이라고 함.




(2) 이규원 감찰일기(1882년)

 울릉도를 직접 방문해서 조사한 이규원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함

청명한 날이면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라봄에 일천리를 바라볼 수 있지만, 울릉도 외에 다시 한 주먹의 돌이나 한 움큼의 흙(다른 섬)도 없습니다. 우산도를 울릉도라 칭하는 것은 마치 탐라를 제주도라고 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산도는 울릉도와 같은 섬이라고 최종결론냄.

이 후 우산도라는 지명은 역사에서 사라짐




4. 결론

우리는 세종실록과 숙종실록을 근거로 우산도=독도라고 주장하며 과거 사료에서 우산도만 등장하면 무조건 독도 영유권 증거로 들이미는데,

실제 조선은 안용복 전까지는 우산도가 두 섬인지 한섬인지도 몰랐다가

안용복사건 후에는 죽도를 우산도로 인식하였으며

고종때까지도 울릉도에 대해 자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다가 우산도는 울릉도의 별칭으로 결론냄


이영훈교수가 "조선왕조는 독도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는 주장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