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경제.경영부문의 저명한 더난출판사에서 [위험한 정치경제학: 정치와 경제의 은밀한 거래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한 이후 종북좌파가 떠들어대던 '김대중이 IMF사태를 해결했다'는 소리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아래 그림은 [위험한 정치경제학] p.38에서 가져온 것인데,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박사의 1999년 연구 "정치적 불안의 경제적 영향"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정치불안 관련지수에 외환시장 압력지수가 후행했다. 정치불안 관련지수가 증가하면 며칠 후 외환시장 압력지수가 증가했고 정치불안 관련지수가 감소하면 며칠 후 외환시장 압력지수가 감소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정치과 금융은 동전의 양면이다. 1712년 런던에서 금융시장이 발생한 것은 의회가 동인도회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발행하는 금융상품에 대한 지불보증을 했기 때문이다. 금융상품은 토지와 달리 구체적(concrete)이지 않고 추상적(abstract)이어서 정치권의 지불보증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정치권의 지불보증이 없으면 금융시장이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결론은  노벨경제학 수상자 Douglass C. North와 그의 제자 Barry R. Weingast의 논문("
Constitutions and Commitment: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Governing Public Choice in Seventeenth-Century England" Journal of Economic History. 1989. Vol.49: 803-32) 그리고 프린스턴대학교의 경제사회학자 Bruce G. Carruthers의 저서(City of Capital: Politics and Markets in the English Financial Revolut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에서 도출해낸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1997년 1-4월 한보그룹, 삼미그룹 그리고 진로그룹이 부도를 냈고 정치권 관련설이 언론을 대대적으로 장식해서 정치관련 불안지수가 급등했다. 그 후 외환시장 압력지수가 증가했다. 

그런데 1997년 5월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가 '신자유주의 금융개혁법안'을 발표하자마자 정치불안 관련지수가 급락했고 그 후 외환시장 압력지수가 감소했다.

이로써 금융불안이 사라졌고 금융위기를 설명하는 모든 경제이론이 설득력을 잃었다. 금융시장이 국회에서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면 금융불안이 해소된다고 믿은 것이다. 금융시장은 국회가 금융개협법안을 거부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1997년 7-9월 기아그룹 부도사태가 진행되었으나 정치권 관련설이 없었고 정치관련 불안지수가 약간 증가했으나 1-4월 수준보다 낮았고 외환시장 압력지수도 낮았다. 1997년 10월 동남아에 투자된 네델란드계 자본과 일본계 자금이 금융위기를 피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현상은 1997년 봄 동남아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기아그룹 부도사태로 인해 그해 11월 한국으로 전염되었다는 김대중 세력의 전염이론(contagion theory)을 완벽하게 부인한다. 

그런데 1997년 10월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대중 비자금 640억원(일본의 거물정객 우스노미야 도쿠마를 통해 김일성이 김대중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4천만 달러)이 들었다는 통장 사본을 공개하면서 DJ비자금 공방이 발생했고, 국회가 금융개혁법안을 거부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면서 정치불안 관련지수가 급등했고 며칠 후 외환시장 압력지수도 급등하기 시작했다.  

1997년 11월 그해 12월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했던 김대중이 국회 내 자신의 추종세력에게 표를 떨어뜨리는 신자유주의 금융개혁법안 거부를 지시했고 국회가 금융개혁법안을 거부하자마자 즉각 금융위기가 터졌고 IMF사태가 발생했다. 1997년 11월은 위 그림에서 정치불안 관련지수가 정점을 찍은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