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글에서 상당히 겉만 훑은게 많은데 어찌된게 아무도 지적을 안해서 간단히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함. (만쭈리 글이 그렇지 뭐..)


 우선 조선후기의 통신사는 조선 초중기의 조선 국왕사와 다르게 일본을 성리학적으로 보기 시작함.


조선 초기에는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는데, 16세기부터 점점 성리학적 평가를 내리더니,  조선 후기에는 일본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으로 글을 써내려가는게 주류였음. (조선과 명청, 기시모토 미오, 미야지마 히로시) 


해당 글에서 인용한 여러 글들도 사실 해석을 가미한 뒷 내용을 보면 매우 다른 얘기를 하고 있음.


시작으로 원중거의 승사록을 읽어보자



10월 17일 경자
동북풍이 밤에 크게 불어 그로 인해 대포(大浦)에 머물렀다...........(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 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 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우리) 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 (숫자는 많아지는데) 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12월 21일 계묘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무사의 문화만 판을 치던 에도에서 상인의 문화로 바뀌어가며 화려함이 피크를 찍던 18세기 중반 에도, 

동시에 시골에서 거주하던 비숙련 일차산업 종사자들은 조선인의 눈에도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어 원중거는 "얘네들이 배를 만들어 모조리 조선으로 넘어오면 어떻게 하지?" 라 걱정하고 있을 정도로 농민들간의 삶의 질 차이는 어마어마했음.


또한 일베를 간 만쭈리를 쳐배낀 글에서도 인용한 조선통신사 신유한의 해유록은 번영한 오사카에 대해 매우 놀라고 있음은 사실임.


이렇게 이 나라의 번화함과 풍부함, 지리의 이로움과 풍경의 기이함은 아마 천하에 드물 것이니, 옛날 문헌에 기록된 인도 계빈국이나 페르시아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근데 그 뒷장에는 이러한 도시의 부유함을 시골 농민들을 등쳐먹던 국법의 폐단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 


실제로 당대 일본인들의 일인당 생산량은 조선에 비해 약 1.2배 높았지만, 매우 높은 세율로 인해 조선인보다 소비할수 있는 곡물양은 매우 적었음.(한국경제통사, 이헌창)

(일본) 시골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아로 들어가고 풍년이 들어도 콩 반쪽도 잇기 어려워 스스로 처자를 팔아먹기까지 하니 ....빈부가 균등치 않음이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즉 도시의 번화 뒤에는 그들을 위해 수탈당하던 농민들의 고생이 있던것임. 작은 재정을 추구하던 조선의 눈에는 이것이 화려하면서도 한심스럽게 보였던것이고. 



그리고 글에서는 일본의 상업의 번화를 빨고 있는데, 착각하지 말자. 에도막부는 절때 중상주의를 표방하는 정부가 아니였음. 일본도 어디까지나 타 동아시아국가처럼 소농들이 소규모 개인 경영을 통해 삶을 유지하던 중농주의 국가였음. 

일본의 부 또한 상업이 차지하던 비율은 적고, 상당수 부유함은 17세기에 발생하였던 폭발적 농업생산력 증가에 기인했음. 

(그 이후 조금씩 정체를 하는건 안타깝지만). 

참고로 상인의 인구는 기껏해야 당대 일본인의 10%정도를 차지했던것으로 추계되는데, 더 큰 문제점은 에도시대의 중소상인들은 정치적 자유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것임. 심지어 재산을 막부에 의해 강탈당하는 황당한 사건도 종종 발생하고 있었음.


"막부도 지방 다이묘의 행정부에 국내무역에 대한 조세제도를 확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유가의 경제이념에 따라 막부와 다이묘들은 상업에 대한 세금부과가 단지 가격을 상승시킬뿐이고 마땅히 농업이 총수입의 주요원천이 되어야한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경우에 있어서 군주들이나 지방영주들이 상업으로부터 새로운 원천을 찾았던 결과로 누렸던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일본의 상인들은 전혀 누리지 못햇던 것이다. 가장 부유한 상인들도 자신들의 상업활동이 쇼군,다이묘, 그리고 이들의 관리들의 관용에 대해서 의존하고 있다고 여긴것이었다.

1705년 막부에 의해 부를 몰수당한 요도야(淀屋)가문의 몰락은 상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봉건제

물론 에도시대의 수도 에도에 상인들의 문화가 매우 번영하고, 상업에 적응한 이들이 훗날 근대화 과정에서 중상주의의 바람에 쉽게 적응한 덕은 크게 있음. 근데 에도시대 에도의 화려함은 순전히 이들 덕이 아니라 오히려 폭발적인 농업 생산력의 성장에 기반한 통한 경제성장 덕으로 봐야 한다는것. 




뭐 더 쓸건 많은데 여기서 끝내도록 함. 나도 더 공부해야지.


1. 에도는 중상주의 국가가 절대 아니였음

2. 에도의 화려함은 불쌍한 농민들을 수탈하며 나온 화려함이였음 ㅠㅠ 그래서 일인당 생산량은 조선보다 20%가량 높은데, 일인당 소비량은 조선에 훨씬 못미치는 불상사가 발생.

3. 조선통신사도 이걸 간파해서 농민들 불쌍하다고 까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