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3zRxE








시리즈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1탄. 조선의 군편제와 군사력

http://www.ilbe.com/1856638141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 2-1탄. 명나라의 행정제도와 경제,재정,조세제도

http://www.ilbe.com/1871293859


[정보/캐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 2-2탄. 명나라의 군 전략

http://www.ilbe.com/1874898566





외전 


[정보/BGM] 포방부의 정신적, 육체적 스승인

동아시아 화력덕후 조선의 화포를 알아보자

http://www.ilbe.com/1866916083















조선 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대해 시리즈로 쓰고 있는 게이다ㅇㅇ

2-2 명나라의 군전략 편이 묻혀 아쉽지만 뭐 이렇게 링크 걸면 나중에라도 게이들이 볼수 있을거니 상관없盧!? ㅋㅋㅋ



무튼 이번편은 전편에서 예고했듯 초기 명나라 군의 군사력과 군 편제에 관하여 써볼까해ㅇㅇ

이번글은 전편에서 군 전략을 써서 짧게 정리할거야ㅇㅇ

이글의 배경은 명나라 3대 황제인 태종 영락제 연간이야. 이때가 조선 전기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하니까ㅋ



무튼 이번 글도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한다ㅋ







- 아, 그리고 궁금한 점이나 심도있는 토론을 할거면 내가 쓴 글이나 댓글에 댓글을 달아주면 언제든지 댓글 남길께ㅇㅇ

요즘 공부하느라 일베이용시간이 짧아져서 빠르게 댓글은 못남길거같다;; 동,서양 시대 막론하고 다 받아줄께ㅇㅇ;

좆문가라서 틀리면 따끔한 일침과 함께 팩트로 날 교화시켜줘라 밀게이들아ㅋㅋ




- 쓰고나니 너무 부족한거같다; 명군의 진법이나 부대 편제에 대해선 아무것도 안쓰고 마무리를 하다니

내가 ㅄ이였다!! 



































자금성.jpg






명나라의 군사력과 군편제를 쓰기전에 먼저 고려사 우왕편에서 언급된 구절을 써볼까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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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崔瑩 兼海道都統使 

瑩白禑曰 臣任事旣多 又都統海道 臣恐不堪

且今戰艦纔百艘 戍卒僅三千 臣若行師 當用兵萬餘 倉廩匱竭 何以供億


禑曰 備禦事劇 不獲已 以卿兼之 其無固辭 且以吾國軍需 餉萬餘兵誠難矣 請卿用三千 使一當百



최영에게 해도 도통사를 겸하게 하였다.

영이 우(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을 맡은것이 이미 많은데 또 해도를 도통(都統)하면 신이 감당하지 못할듯 합니다.

또 지금 전함이 겨우 1백척 밖에 안되며 수졸이 겨우 3천명입니다. 만일 군사를 출동시켜야 된다면 1만명은 동원해야 돼는데 창고가 비었으니 어찌 공급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우(왕)가 이르기를

"방비하고 막는 일이 급하므로 부득이 경으로 겸하게 하는것이니 굳이 사야하지 말라. 또한 우리나라의 군수(軍需)로서 1만여명의 군사를 먹이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경은 3천명의 군사를 써서 한명이 백명을 감당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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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1차 요동정벌에 관한 이야기인데 
원정군 이야기도 아니라 내지에서 병력을 동원하는데 왕이 일대백으로 싸우라고 발언하는거 보면 요동정벌이 바위에 계란치기란 생각이 드는구만 쩝






초기 명나라군을 이해하려면 주원장과 영락제를 빼면 팥없는 찐빵이라 다름없어ㅇㅇ
그중 주원장의 일생을 짧게나마 2-1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이번편의 배경이 되는 영락제에 대해 써볼께





영락제,  아니 황제에 오르기 전 주체는 홍무제 주원장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연왕에 봉해져있었어ㅇㅇ
연왕이 다스리는 봉토는 지금의 북경일대야ㅇㅇ  저번편인 2-2의 명나라 군전략편을 봤으면 감이 올거야

이곳은 명나라 군사전략의 핵심인 북변사령부가 있는 최전방 지역으로 홍무제의 북진으로 인해 쫓겨난 북원의 침입로였지ㅇㅇ

주체는 몽골족의 침입을 수차례 격파하면서 주원장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내심 후계자 자리를 염두했지만 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장남인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지

이때까지는 주체는 별다른 황위에 욕심이 없었나봐ㅇㅇ



하지만 큰형인 주표가 단명하면서 사후 차기 황위인 황태손인 주윤문이 거론되면서 은근 반발심이 생겼나봐ㅇㅇ
이러한 증거는 明史에 기록되어 있어


주윤문이 제2대 명나라 황제인 건문제에 오르면서 그의 측근들은 주체를 비롯한 번왕들이 막강한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것은 곧, 황제의 권위를 무너트릴수 있다는걸 우려하여 삭번(削番)정책을 펼치게 돼ㅇㅇ

문제는 주체가 눈치가 빨라 조카와 그 측근들이 자신을 노리는걸 알아 차렸다는게 문제였지ㅇㅇ


결국 건문 2년인 1399년 영지인 북경(北京)에서 거병하여 1402년까지 조카와 내전을 벌이는데 이게 바로 정난의 변이야ㅇㅇ
주체의 북변군은 숫적으로 조카인 건문제의 중앙군에 비해 크게 열세였는데 주체의 능력이 뛰어난점이 흠이였고 또한 건문제 휘하 장수들 중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던 장수들이 전무하다 싶이 했어. 이는 주원장의 숙청으로 인해 초기 명나라 군 공신들이 싸그리 도륙된 결과라고 할수 있지ㅇㅇ;

또한 건문제는 자신의 숙부를 공격하는것에 대해 우유부단함을 가지고 있었어ㅇㅇ
초반 정변의 난을 살펴보면 황제군이 주체가 있는 북평을 공격하였어. 철현,성용과 같은 뛰어난 장수들이 주체의 군을 두번이나 격파하여 사로잡을 뻔 했으나 건문제가 직접 칙령으로 "내 숙부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라는 교지를 내리는걸 보면 참;;;
결국 주체는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군을 정비하여 수도 남경으로 쳐들어가ㅇㅇ

건문제는 궁에 불을 지른후 행방불명이 되고 남경은 함락되면서 정변의 난은 막을 내려.
야사로 건문제는 승려가 되 전국각지를 떠돌아 다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측근들이 영락제에게 건의해서 죽이라고 했지만 "내 조카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라는 말로서 이런 건의들을 묵살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지ㅋ



무튼 황위에 오르게 된 주체, 영락제는 연왕으로서 북변사령부를 맡았을때 몽골군의 침입에 대해 매우 우려스러운 나머지 수도를 남경(南京)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였던 북경(北京)으로 옮겨ㅇㅇ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큰 결정이였어.
반란으로 황위를 차지한 자신이였기에 다른 번왕(番王)들도 마찬가지로 할 경우를 생각해서 자신의 세력기반인 북변으로 수도를 옮기는건 신의 한수였지.

그결과 황권은 안정되고 명나라 치세 전반에 걸쳐 나오는 대 북방 정책의 전초기지 역활을 하게 돼ㅇㅇ

그러면서 군사편제를 재 조정하게 되는데 아래와 같은 짤이야





명나라의 군 편제는 아주 방대하기 때문에 이렇게 축약을 해봤어.

명나라 중앙군jpg.jpg


명나라의 군편제는 오호도독부를 통한 5개의 군관구로 나뉘어ㅇㅇ
그중 가장 중요한 북변을 제외한 5개의 군관구 소속 주둔군은 

좌호 도독부에 감숙,하투,사천주둔군 전호 도독부에 요동군, 중호 도독부에 허난주둔군 , 후호 도독부에 운남,광동주둔군 우호 도독부엔 절강군이 편제되어있어

이 밑으로 360개에 달하는 주둔군이 편제되어 있지만 이건 너무 방대하니 생략할께ㅇㅇ;


또한 우호 도독부와 후호 도독부에는 명나라 해군사령부가 존재하였으며 특히 우호도독부는 산둥,절강 해군이 편제되어 있었으며
정화의 원정 당시 산둥 해군사령부가 그 역활을 했어ㅇㅇ


특히 주목해야 될 점은 명나라는 12개에 달하는 금위군이 있었는데 2-1편에서 설명한 창위 소속의 금의위에 편재된 남진무사,북진무사를 봐야돼.
이 남진무사와 북진무사는 군 감찰기관으로서 역활을 수행하였고 명 황제의 친정에는 어림군과 친위군과 같이 명나라 황제의 직속부대로서 활동해ㅇㅇ



이 금위군에 편재된 부대중 시위상직군도 주목해야돼.
명나라의 중장기병은 거의 이 시위상직군 소속으로 되어 있었어. 명나라의 원정에서는 이 시위상직군이 돌격병과를 담당했는데 이 모습은 당시 그림에서도 나와



시위상직군.png

시위상직군2.png

명나라 중장보병.png





또한 각 군관구에 대규모 중기병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명대의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약 1:6~1:8에 이르는데 
숫자가 숫자인 만큼 대규모로 기병을 운용한건 분명해ㅇㅇ





명나라 중기병.jpg




이러한 대규모 중장기병을 운용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오이라트와의 전투와 관련돼ㅇㅇ;
이점은 2-2편에서 대 북방 정책에 대해 소개했으니 그길 읽는편이 좋을거야.






명나라 초기엔 화약병기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는데 대표적인 화포로는 장성에 설치하여 발포한 신위대장군포를 들 수 있어ㅇㅇ

신위대장군포.png

(여기서 더 발전된게 청나라 강희연간의 신위무적대장군포야ㅇㅇ)






중국의 화포 역사를 살펴보면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상당한 발전을 보이게 되는데
철을 사용한 철포가 등장하고 포신의 소재는 청동 뿐만 아니라 철,나무,대나무 등 여러가지 소재가 사용되었어.

재질 뿐만 아니라 용도에 있어서도 그 범위가 넓어져 원나라군의 대포는 주로 공성용으로 사용되었지만 명나라군은 야전과 해전에서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원나라의 화포를 물려받은 명나라는 고정식 외에도 공융포(攻絨砲),신총자포(神銃車砲)와 같이 바퀴가 달려있는 포차에 실어서 기동성을 높인것들도 등장하게되. 특히 이 신총자포는 천자,지자,원자 세종류로 구성되어있어.

또한 포탄에 대해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웠는데 명 초기에는 공심작열탄(空心炸裂彈),백자연주포(百子連珠砲)등을 개발하여 사용하기도 하는 ㅎㄷㄷ한 능력을 보이기도해. 특히 위원포(威遠砲)는 대형탄환을 사용 할 경우 최대 사정거리 3.4km 소형산탄의 경우에는 1.4km나 달했다고 하니 당시 명군의 화포체계의 우수성을 증명해.

단지 서양화포에 이쓴 조문(照門)과 조성(照星)과 같은 조준장치가 없어서 명중률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으나 명군의 화력체계는 조준이 아닌 지역제압용으로 쓰는 전략이였기에 명나라 초기에는 그럭저럭 좋은 효과를 내기도해. 하지만 나중에 유럽에 의해 조문과 조성이 있는 대포나 총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포와 총을 개량하여 명중률을 올리는데 이건 먼 훗날의 이야기.....



또한 신전(神箭)과 신총(神銃 [다른말로 화총])을 보유하기도 하였는데
이 구체적인 수치는 明史 경태제(景泰)에 보면 자세하게 기록 되어있는데 토목보 변으로 인해 당장 북변과 하투의 방어가 급해져 남경에 보관중인 무기 2/3과
토목보에 버려진 신총과,신전를 회수하라고 했는데 토목보에서 회수된 수치가 신총 2만정 , 신전 44만개, 화포 800문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토목의 변 당시 정통제가 이끈 50만의 정병이 북변사령부 휘하에서 나온거랑 실제 회수량의 2/3밖에 회수 못했다는걸 생각하면 ㅎㄷㄷ 하지 않盧?
당대에 어느 나라가 화포 최대 1만 문을 보유한 국가가 어디 있었盧?! 


말이 나왔으니 명나라의 화기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볼께.



신전은 통안에 화약통을 매단 화살을 집어넣고 발사하는 무기야 



明朝的神機箭.jpg

(명나라의 신전(神箭)은 조선의 신기전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신기전을 올려봤음ㅋ )




참고로 신총의 경우 핸드캐논의 일종으로 추측되고 있어.



神銃.jpg

( 신총(神銃)의 추측도 )




또한 삼열총도 개발하였는데 아래의 짤과 같아.




삼열총.jpg







명군의 비장의 수단은 이 화기전력이라고 생각하면 편할거같아.
그만큼 영락제 치세 후반에 들어서면 이 화기전력을 극대화 시키려고 노력을 했단 기록이 남아있거든ㅇㅇ;
이점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당대에 어느 나라도 이만큼의 화기전력을 보유하지 않았고 명나라만이 보유했어.
그만큼 국력이 월등하게 뛰어나야 되겠지?






또한 영락연간에는 대규모 수군(해군)을 육성하는데 정화의 원정이 가장 큰 이유가 돼ㅇㅇ






명나라 전기 군선으로 쓰인건 크게 3가지로 분류되는데 보선과 사선,호선이였어ㅇㅇ


정화의 대함대.jpg



보선은 병력 100명을 탑승시킬수 있으며 대포 1문에 소형대포 6문 소총10정과 신창 60개를 탑재한 군선이야.
이중 가장 큰 보선은 정화의 기함으로서 길이 44.4장(약 126m)에 총 톤수 17,000톤에 이르며 무장병력이 27,770명이 탑승 가능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이건 현실적인 제반여건을 비교해볼때 어불성설이야.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기와 영애승람,객좌채어,곡각에 나오는 길이 44장 폭 18장에 근거하여 계산한건데 
요근래 발견된 유물의 크기도 17,000톤 설을 부정하고 있어.
남경 삼차하명대 보선창에서 11.01m 길이의 타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선박의 배수량을 1251톤으로 추정했어
17,000톤이면 타간의 길이는 최소 22m는 되야 돼거든;

11미터의 타간에 적합한 배는 5872료(840톤),길이 220척,폭41척,높이14,8척으로 추측되어져.
아마 정화의 대원정에서 사용된 보선들은 거의 840~1251톤급 보선이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ㅇㅇ;



명나라 사선.jpg

( 명나라 400료선(사선) )



명나라의 사선(400료선)이야

적재량 28톤에 배수량이 총 56톤에 이르러ㅇㅇ 병력은 40~60명이 탑승 가능했으며 명나라 수군의 중추역활을 했어ㅇㅇ
무장으로는 소형대포(호준포) 2문에 소총 20정 신창 10개를 탑재했어.

명사 영락제편을 보면 산둥수군에 400료선이 총 1300척에 달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는걸 보면 확실히 정화의 대원정 기간 내내 명나라 수군이 증강되었다는 사실을 추측 할 수 있어ㅇㅇ (홍무제 당시 명나라 총 군선은 1000척이였다는 기록이 있어ㅇㅇ;)






명나라 중장보병.png



짤중복이지만 이게 바로 호선이야ㅇㅇ

호선은 탑승인원이 15~20명에 이르는 소형군선이야.
크기는 왜 군선 세키부네보다 작으니 감이 오겠지?


명나라 수군은 총 3개의 사령부로 나뉘는데 그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건 영락연간에는 산둥 수군이였어.
후대에 들어서면 절강 수군이 규모가 커지긴 했으나 정화의 대원정이 마무리 되면서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수립하며 셀프운지하게 되지만 이건 먼 훗날의 이야기......









이로서 간단하게 나마 명나라 병종과 군사 편제에 대해 알아봤어ㅇㅇ
그럼 이제 명나라 군의 군사력에 대해 알아봐야 돼겠지?
당시 군사력의 가장 큰 척도인 병력수에 대해 알아보자ㅇㅇ








영락제는 정난의 변 이후 홍무제 주원장이 나눈 군 방어지역을 더욱 세분화 시켰는데 밑의 짤이 바로 그걸 나타낸거야ㅇㅇ


 


영락연간  세력권.jpg
( 짤에 하투를 허투로 쓴점 양해 바란다; 수정하기가 귀찮盧;;;;)



짤을 보면 알겠지만 2-2에서 나오는 굵직굵직한 군은 다 북방에 주둔하는걸 눈치챘을거야

명나라 군의 역사는 이 대 북방 정책의 역사와 다름이 없어.  명의 사활을 쥐고 흔들었던건 몽골족이였거든ㅇㅇ

영락제의 북경천도로 인해 구변(九邊)의 방어선은 근접한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훨씬 빠르게 후방의 지원을 받을수 있는 체계로 전환걸 2-2에서 이야기 했지?


明史에 나타난 영락연간 주둔군을 살펴보면  북변사령부(北邊使令部) 소속 병사는 총 932,571 명으로 군적에 기록되어 있으며 
요동군(遼東軍)은 총 110,230 명, 허투(河套) 주둔군은 총 519,788 명 감숙주둔군(甘肃駐屯軍)은 총 427,913 명 
사천주둔군(四川駐屯軍) 총 154,350  운남주둔군(雲南駐屯軍) 338,517  광동주둔군(廣東駐屯軍) 293,426명 절강군(浙江軍)  383,614 명

약 320만에 육박하는 군대를 보유했어ㅇㅇ


하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돼. 명나라의 병력차출의 신뢰도가 문제가 있어;
주위의 명,청 시대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기록상의 수치를 관대하게 인정한다고 해도 1/3~2/3 정도로 보는것이 설득력있는 수치라고 해





왜 이런 뻥튀기 같은 기록이 나오는걸까?




내 생각을 정리해 볼께.



근본적으로는 역사적 기록의 '역사적'이 갖는 의미에 있어, 전근대사학과 현대사학이 필연적으로 충돌 할 수 밖에 없는 '실증성'의 문제인거같아.

역사서술이 현대와 같이 계량적인 성격을 갖게된건 19c 랑케 사학 이후의 일로, 그 앞 시기의 사학에서는 '역사적'인 것이 '과거에 실재했던 실제 그자체'의 의미에 견주어지지 않았어. 특히 중국 전 근대사학의 역사서술은 감계주의에 기반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사실'을 전하기보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지향하였기 때문이지. 따라서 당대의 기록이 과시적인 목적의 과장이 아니라 할지라도 실측에 따른 서술이 아닌 경우가 흔하다는거지.

그러한 이유로 전근대 사료비판은 여러 자료의 교차검증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 경제적 구조와 같은 맥락과 더불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것이 바람직하고, 동일한 논리의 성상에서 당대 기록의 수치를 비판적으로 이해해야되는거같아.








그러므로 내생각에는 영락연간의 명나라 군의 총 병력은 기껏 1,000,000~2,300,000 으로 결론이 나는거 같아.


왜 이런 결론이 나오냐. 이건 우리측 사료에 의해 추측 될 수 있어. 


우리측 사료 또한 앞서 내가 말했지만 실측이 없기에 문제되지만
홍건적의 침입 당시 홍건적은 패잔병은 극소수의 무리인데도 10만명에 육박하는 군세로 고려를 침입하게 되. 이러한 수치를 생각해 볼때 어림잡아 1/3~2/3라는 내 주관적인 측정법을 약간이라도 옹호할수 있을거 같아ㅇㅇ;



약간의 과장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국력에 비해 월등한 징병의 예는 고려사를 보면 나와ㅇㅇ
예로든 홍건적의 침입때 고려군 30만이 어떻게 징병되었느냐는 고려사에 그 징집 방법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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募兵榜曰 凡應募者 除私賤外 士人鄕吏
官之 宮司奴隷 良之 或賞錢帛 隨其所願

모병하는 방에는 
"모집에 응하는 자 중에 사삿집 노비를 제외하고
선비나 향리에게는 벼슬을 주고 궁,사의 노예는
양민으로 삼든지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그들의 소원에 따르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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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국력에 비해 오버되는 징집수치가 나올수 있다는 예의 가장 좋은 기록이야.


그러므로 난 영락연간 최소 100만에서 최대 23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있었다고 생각이 들어.
최소 100만명의 병력을 운용했다고 쳐도 동시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명나라만큼의 병력운용을 보여주는 나라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제국의 방어를 위해 군을 여러방면에 주둔시켰기 때문에 홍무제가 조선의 30만 강병을 경계했다고 하는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거 같아.
2-2편 명나라의 군전략에서도 서술했지만 명 초기 요동방어에 투입된 병력은 약 11만명밖에 안 돼었어.
특히 북원에 대해 방비를 해야 됬기 때문에 만약 조선이 북원세력과 결탁을 하고 요동으로 들어오게 되면 북변사령부에서 병력을 차출해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이렇게 되버리면 감숙-하투-북변에 이르는 주요 방어선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그런거 같아.


뭐 영락제가 즉위하고 조선에서는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는 마치 현재 미국과 우리나라와 같은 사이가 되고 
이러한 정세에 마음껏 영락제가 북벌을 단행했다고 난 생각해.









마지막으로 명나라의 진법인 육화진법과 편제에 대해 알아볼께.

명나라때 사용된 육화진법은 사실 당나라때 완성된 진법이야.
사실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춘추전국시대로 올라가지만 당대에 완성된 육화진법이 명나라군의 진법으로 연결되기에 일단 당대의 육화진법에 대해 써볼께.




위국공 이정.jpg


육화진법은 당의 개국공신이자 명장중의 하나인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이 창안한 전술이야. 이정은 원래 수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당 고조 이연이 아직 반란군중의 하나였을 시절 이세민의 심복이 되지. 그는 당나라의 개국 과정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에 모두 참전하였고 당 개창 후에는 돌궐과 토욕혼 정벌을 성공리에 완수해. 이 과정에서 그가 창안한 전술이 바로 육화진법으로 당이 세계제국으로 발돋움 한 데에는 이정과 육화진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또한 이위공이 비록 이세민의 고구려 침략 시 병석에 누워 참전을 못했다고는 하나 그의 전술은 당시 당군의 표준 전술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그만큼 완성도가 높은 대 기병 전술진법이야.

참고로 재미있는 점은 이 위국공이란 칭호를 명대의 기병전술의 명장인 서달이 받아. 그만큼 서달 또한 이정과 함께 중국사의 뛰어난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이지ㅋㅋ









당의 원정 시 설치되는 원정군 단위부대는 행군(行軍)이야. 오늘날의 사단격인 이 행군은 사단장 격인 행군총관(行軍總管)이 지휘하며 휘하에 2만 명이 배치돼. 이정의 육화진법에 의하면 이 행군은 6개의 꽃(六花)이라는 이름처럼 6개의 예하 부대와 지휘관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中軍)를 합쳐 모두 7개의 부대로 이루어져. 부대 명칭은 각각 중군(中軍), 전(前), 후(後), 좌(左), 우(右) 4군에 좌우후군(左虞候軍) 우우후군(右虞候軍)이야. 각 부대는 노수(弩手), 궁수(弓手), 마군(馬軍), 도탕(跳蕩), 기병(奇兵), 치중병(輜重兵)으로 구성되어 있었지.

하지만 명대에는 이러한 계급명칭은 똑같지만 병종에 차이를 보여
각부대에는 포병(砲兵),포수(砲手),궁수(弓手),중장기병(重裝機兵),중기병(中騎兵),경기병(輕騎兵),중장보병(重裝步兵),장창병(長槍兵),창병(槍兵), 치중병(輜重兵) 등등 여러 병과들이 분화되어 있었지.


명대의 군편제는 대략 2만명을 기본 전략 편제로 사용하였으며
이중 수송부대 격인 치중병을 빼면 순수 전투병력은 대략 14,000명이야. 이중 발사무기인 화기병과와 궁수는 대략 3할인 4,200명. 기병의 경우 3할에 미치지 못하는 4,000명 정도야. (명 초기 홍무~영락연간)






명나라때의 육화진은  50명의 병사가 모여 대(隊)를 이루어. 이 대가 육화진 운용상의 가장 기본 편제야.당나라때의 육화진과 매우 유사했으므로 당대의 육화진에 명대의 육화진의 정보를 첨가해서 써볼께.


1대 50명은 앞뒤 20보(약 30m) 정도의 땅에 정렬을 하게 되는데, 5열 횡대로 늘어서게 되. 맨 앞에는 대의 지휘관인 대두(隊頭)가 서서 대를 이끌게 되고 그 뒤에 기수인 집기(執旗)가 군기를 들고 서. 집기 뒤에는 2명의 겸기(傔旗)가 서는데 이들은 군기 호위병이야. 이들 겸기 뒤로 병사들을 5열로 배치시켜. 제 1열은 7명, 2열은 8명, 3열 9명, 4열 10명, 5열 11명이 서게 되. 대열의 최후미에는 이탈하는 병사를 참수하기 위해 대의 부대장 격인 대부(隊副)가 큰칼(長刀)을 들고 서 있어. 결국 대의 전체적인 진형은 50명이 쐐기꼴 대형을 이루게 되는 거지.

 

 육화진을 구성하고 있는 7개의 부대인 7군(軍)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3열 구조로 되어 있어. 일단 최전열인 제 1열에는 3개 대가 모인 대대(大隊)가 위치해. 7군 중 지휘관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에는 모두 5개 대대가 제 1열을 구성하고, 대대의 배치는 하나의 대가 앞에, 나머지 2개 대가 뒤에 서 있어. 쐐기꼴 대형인 대로 다시 큰 쐐기꼴 대형인 대대를 만드는 것이지. 이 때 대와 대 사이의 간격은 10보 였어. 대대 최선두 대를 전봉대(戰鋒隊)라 부르고 후미의 2개 대를 전대(戰隊)라고 불러. 이런 대대가 5개 나란히 늘어서서 제 1열을 구성해. 

[전략전술병기사전]에는 이들 전봉대와 전대가 모두 보병대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위공문대]에는 “기병과 보병이 반반으로 구성된 부대를 전봉대라 한다.“ 라고 쓰여 있으므로 최소한 전봉대는 기보 혼합군일 가능성이 높아. 명대에도 마찬가지였지. 


육화진모식도.jpg
(당대의 육화진/ 명대에도 매우 비슷하게 운용되었어)



육화진 편제에 도탕병이 잡혀 있는데 이들이 배치되는 장소가 특별히 언급되지 않고 있으므로 기보 혼합인 전봉대 중 기병을 따로 도탕병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어. 명대에는 이런 도탕병의 역활을 중기병(中騎兵)이 맡아서 했어.  제 1열 20보 뒤에는 11개의 대가 1열 횡대로 배치되었고, 이들이 형성하는 제 2열을 주대(駐隊)라고 불렀어. 

역시 [이위공문대]에 의하면 “수레를 갖춘 부대를 주대라 한다.” 라고 하였으므로 이들 주대의 보병들은 수레를 중심으로 편제되었던 것 같은데. 명대에는 이 칭중병 대신 포병(砲兵)과 포수(砲手)들이 이 역활을 했지. 이 주대의 양 측면에는 기병(騎兵) 각 10대가 배치되었어. 

 제 2열 20보 뒤에는 마지막 열인 경기병(輕奇兵)이 배치되었는데, 이들 기병은 일종의 예비대 격으로 운용되었으며 10개 대로 구성되었어.
 이상이 7군 중 중군의 배치였으며 나머지 6군도 중군보다 규모는 작지만 대동소이한 배치를 했을 거야.





초기 명군의 기본 전투방식에 대해 써볼께.

위에 설명한 방식대로 포진한 각 군은 다음과 같은 전투방식으로 전투를 벌였어.

일단 적병이 1700보(2.6km)에 다다르면 일단 포병(砲兵)이 화포를 발사하고 150보(약 220m)까지 접근한 경우 포수(砲手)가 노를 발사하기 시작했어. 적이 60보(약 90m)까지 접근하면 궁수(弓手)가 사격전에 가담하기 시작하고, 적이 20보(약 30m)까지 접근하면 포병과 포수, 궁수는 사격을 멈추고 전열 뒤로 후퇴해. 궁수는 주로 제 2열인 주대로 재배치 되고 포수는 총포를 버리고 칼이나 곤봉을 들고 전봉대의 뒤에 서서 백병전에 참가하기도 하고 아니면 제3열로 후퇴해서 계속 사격하는 방식을 사용했어. 


제 1열의 전봉대와 전대가 적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다가 피로한 기색을 보이게 되면 제 2열 주대의 양측면에 배치되어 있는 중장기병이나 주대 후방에 있던 제 3열의 중기병(中騎兵)이 전진, 제 1열과 교대하여 백병전을 벌여. 중장기병과 중기병의 엄호하에 후퇴한 전봉대나 전대는 안전한 주대 후방까지 내려가서 대대의 대오를 정비하거나 휴식을 취해. 마군이나 기병이 다시 피로를 보이면 휴식을 취한 전봉대, 전대가 전진, 중장기병이나 중기병을 대신하여 전투를 속행해.

제 2열인 주대는 제 1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활로 엄호를 하거나 제 1열을 돌파하여 침입하는 적을 격멸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제 1열이나 제 3열처럼 전투중에 교대를 위해 이동하지는 않았어. 이 주대가 있음으로 해서 군의 전체적인 전열이 유지되며 피해를 입은 부대가 주대 후방에서 안전하게 재편성을 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거지.

적진을 향하여 전진 공격시에는 50보 전진시마다 나팔을 울려서 대오를 정비하고 북을 울리면 제 1열 공격, 두 번째 북을 울리면 제 3열이 1열과 교대하여 공격하였어. 


적이 지친 기색이 역력하면 예비대로 있던 중장기병을 우회하여 측면 공격을 하며 후위에 있는 적들을 쓸기 시작하면서 전위에 있는 적을 압박하기 시작해.
그런 후 중기병과 경기병을 이용한 틈새 메꾸기 작전을 통해 완전하게 포위를 해서 제 3열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중장보병대를 투입하여 전멸시키는 방식이 명대의 회전 전략이였어.

단지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선 이러한 전법에서 좀더 유기적으로 기병을 활용하였지만 그것까지 쓰기엔 너무 길어질거 같으니 여기에서 마무리 할께.




7군은 행군 시 먼저 우우후군(右虞候軍)이 출발하고 다음 우군(右軍), 다음 중군(中軍), 이하 후군(後軍), 좌군(左軍), 좌우후군(左虞候軍)의 순서로 행군해. 적을 만나서 가장 기본적으로 7군을 횡대로 배치할 때 위의 순서대로 횡으로 배치하는데, 7군을 모두 횡으로 벌렸을 때 전투정면은 1700보(약 2600m)에 달했어.


사방에서 적이 공격해 올 때 방어를 위해 7군을 둥근 원형으로 배치했는데 이때의 특징적인 모양으로 인해 육화진(六花陣) 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지. 통전에 이르기를 “평원의 넓은 곳에서 적과 조우하였을 때,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 아닐 때...방영(方營)을 만드는데...중군이 중앙에 위치하고 육군이 사방에 고정되어 6개의 꽃잎 모양을 이룬다.” 라고 하였어. 6개의 꽃잎 모양이기 때문에 육화진(六花陣)이라고 하는 것이지. 각 군은 방진을 만들고 전체적인 모양은 원진이 되는데, 중군과 예하 6군을 어떻게 배치시키는가에 따라 육화진은 다양한 전술적 변용을 가지게 되는 유기적인 전술진법이야.


1. 육화방진(六花方陣)
육군을 전후에 2개씩, 좌우에 1개씩 배치하여 완전한 방진을 형성해.

2. 육화원진(六花圓陣)
각 군의 방진을 구부려서 완전한 원진 형태를 이루어.

3. 안행진(雁行陣) 또는 곡진(曲陣)
전후에 3개 군씩 팔자나 역팔자를 두 개 겹쳐놓은 모양으로 6군을 배치하고 중군은 예비군으로 사용합니다. 방어용 진으로 주로 쓰였어.

4. 수진(竪陣) 또는 직진(直陣)
통전에 이르기를 “적도가 견고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거나 산간(山間)에 포진해야 할 때, 횡대를 만들기 어려운 경우 병사를 나누어 배치시켜 수진을 만든다. 진법은 포병,포수, 궁수와 전봉대를 간격을 벌려서 앞에 배치시키고 그 양익에 두 개의 주대를 둔다...호령이 있으면 포병,포수, 궁수, 전봉대의 전군이 말고삐를 당기고 무기를 들고 크게 소리지르며 전진한다.” 라고 되어 있어. 이는 험난한 지형이가 군대가 횡대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 종대(竪陣)을 만들어 적과 싸우는 것을 설명한 것이지.






육화진.jpg



육화진도에 대한 짤이야.
중앙에 보면 원진 기병이 보이지? 이 원진은 기병의 화전 활동을 위해 원형이 된거야.
특히 이 육화진은 이정이 돌궐과 토욕혼 등 기마유목민족에 대한 원정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명대의 오이라트 간의 대규모 원정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 전술진형이지.


이러한 진형보다 좀더 기병에 대한 방어형 진법이 있는데 이게 바로 녹각거영(鹿角車營)이란 진법이야




녹각거영.jpg


육화진이나 녹각거영은 중국 고대의 전술진형을 채용한것이야.
그만큼 중국인들은 유목민들을 정벌할때 사방에서 우세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는 유목민족들과 싸우기 위해 일찍이 이러한 방어진을 고안했지. 짤을 보면 가장 가에 위치한것이 수레인데 명 초기에는 이 위치에 포병과 포수,장창병이 위치했어. 그 뒤로 보병과 기병들이 위치했지.



육화진의 응용도.jpg


육화진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7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상황에 따른 전술 변용을 가할 수 있었어. 탁 트인 공간에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때는 육화진을 짜고 적의 전면공격을 방어할때는 종심을 강화한 안행진, 지형요건이 나쁘거나 협소할때에는 종대 대형인 직진으로 공격해 나아갈수 있었지.

또한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게 되면 포위전술을 극대화 하기 위해 학익진을 사용했으며 명 중기에는 대규모 화력을 살리기 위해 어린진과 장사진으로 변형되는 모습도 보여.


그만큼 당대에 완성된 육화진은 명 초기 군사 전략에 까지 영향을 미치지ㅇㅇ
당 또한 명나라와 같이 대 북방정책을 유지한 왕조였으니까ㅋ


이러한 육화진은 명 중기에 가서 화력이 증대되므로서 점점 산개진형으로 바뀌게 되지만 기본적인 전술 응용은 당대의 육화진과 비슷했어. 단지 중기에 일어나는 대규모 왜구로 인해 척계광(戚繼光)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와 절강병법을 완성시키면서 명군의 기본 전술전략은 2가지로 분리되지만 명 초에는 이 육화진을 사용했어.













이로서 명나라 군사력과 군편제에 대해 알아봤어.
다 쓰고 보니 너무 부족한 감이 없지않아 있다;

사실. 2-2편 쓰느라 힘 다 빼서 급하게 마무리해버렸다;; 
부족한 점이 많다보니 궁금한게 많을거야; 최대한 아는 한도내에서 댓글 달아줄께;;


무튼 재미있게 읽었기를 바래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