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1탄. 조선의 군편제와 군사력

http://www.ilbe.com/1856638141






외전 


[정보/BGM] 포방부의 정신적, 육체적 스승인

동아시아 화력덕후 조선의 화포를 알아보자

http://www.ilbe.com/1866916083










미력하나마 당시 동양과 서양의 군사력 비교를 위해 동아시아 군사력을

쓰고 있는 밀+역덕후 게이야.


전편인 '조선의 군사력과 군편제' 편은 일베에 처음쓰는 개스압의 정보글이라

가독성이 매우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어준 게이들에게 노무 미안하盧;


인터넷게이들만 생각하다보니 모바일게이들의 가독성을 생각못한점 미안하다고 

이자리를 빌어 말할께;;


일베구걸을 안한다고 했지만 막상 일베글과 잘 읽었다고 하는 댓글을 보면서 

왜 정보글게이들이 시간들여 정보글 싸지르는지 알거같더라...ㅋ














1392년 7월 17일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혼란했던 개국 당시 잘 정비된 상비군인 중앙군과 나름 건실한 지방군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였기에

'패황' 영락제의 철령 이북 지방의 월권행위를 막은거 같아

(패황에게 정면으로 개긴 갓태종의 클라스 ㄷㄷ하盧... 뭐 조선 초기 군사력이 상당했으니ㅋ)


이번글은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초강대국인 명나라에 대해서 써볼까 해


명나라가 왜 약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수 없지만 아마 후금(청)에게 개털린 것으로 인해 그런 이미지가 생긴거 같아;


영원성 전투.jpg


하지만 절대로 명은 후금에게 영혼까지 털릴때까지도 후금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보유했던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정복왕조야


이번편은 그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할수 있게 뒷받침한 명나라의 행정,경제,재정,조세제도에 대해 써볼까해

밀게 성격상 좀 안맞는 글이지만 2-2편에서 쓸 명나라 군사력과 외교전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점에 대해 꼭 알아야 될거 같아서 쓰는 거니 밀게이들의 양해 부탁할께. 재미있게 읽어주면 고맙겠어ㅋ













































역대 중국 왕조 중 가장 경제력이 막강했던 나라는 어딜까?

거의 모든 게이들이 송나라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거야ㅇㅇ  하지만 이건 틀려 송나라 또한 경제력이 매우 뛰어난 왕조중 하나였지만

(개인적으로 경제력은  당>>>>명>송>>>>>>>>>나머지 왕조인듯ㅇㅇ)



당나라 최대 강역도.png

(씹 넘사의 경제력과 국력을 보여주는 당나라 ㄷㄷ)





명나라는 더욱 넘사벽의 경제력을 지닌 정복왕조였어. 

(내가 정복왕조라고 하는건 이민족이 정복해서 세운 나라가 아닌 팽창적 정책을 계속 유지한 왕조라는 뜻으로 쓰는거니 오해하지 말길 바래ㅋ)



요즘 학계에서는 송과 비교하여 '폐쇄적이고 상업적으로 다소 쇠퇴하였다'라는 

기존 이론이 흔들리면서 명이 재조명 받고 있어.


뭐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모든 학자들이 연구하다가 도망갈 정도로 막장의 재정운용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이지만 14c 후반에서 15c 초중반까지는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줘






모든지 일에는 순서가 있는법 글도 마찬가지로 먼저 명나라를 알기전에 명태조 주원장을 알아봐야 되지 않겠盧?







이민족 왕조인 원에 대한 반란의 와중에서 분연히 일어나 명을 건국한 태조 주원장은 안휘성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탁발승으로 떠돌아 다니며 걸식을 하는 경험을 한 끝에 원말 백련교도의 반란군 중 하나인 홍건군 일파인 곽자흥 군에 투신해



4.jpg


수완이 좋았는지 얼마안가 곽자흥의 신임을 얻게되고 그결과 곽자흥이 죽은뒤 그 휘하의 부대를 장악하는 능력을 보여줘ㅇㅇ


근거지로 남경을 확보한 주원장은 백련교도 반란으로 인해 도망쳐온 학자와 지식인들을 받아들이면서 백련교로부터 유교로 돌아섰어.

학자들과 지식인들로부터 농민&거지 출신이였던 주원장은 중국어와 중국역사,각종 지식,유교경전을 배우면서 사실상 제왕수업을 받아. 


명이 원을 무너트렸으니 원과 많은 마찰이 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원장은 원과 큰 싸움을 벌이지 않았어


주원장의 주적은 다른 한족 세력이였기 때문이지ㅇㅇ

원나라는 다른 한족들에게 맡기면 되는거였어ㅋ


원나라를 전복시킬 정도로 강력한 세를 자랑했던 홍건군의 유복통이 차칸테무르에게 쳐발리면서 주원장의 세력이 원의 가시거리에 들게 되지만 운좋게도 차칸테무르는 갑자기 원 내부의 내분에 휘말려 남하하지 못했어ㅇㅇ



파양호 대전.jpg


그 결과 세력을 키우던 주원장은 파양호 대전에서 같은 홍건군 일파인 진우량을 격파하고 양자강 유역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한후 1364년 오왕(吳王)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이어 백련교와 무관한 반란군으로 역시 강남에서 오왕의 지위에 올라있던 장사성을 도륙해버리고 백련교의 지도자 격인 한산동의 아들로서 한산동의 사후 소명왕(小明王)에 올라있던 한림아가 원의 위협을 받자 보호를 한다는 명분으로 데려오다가 의도적으로 침몰사고로 위장해서 익사시켜서 백련교 뒷통수를 얼얼하게 후려치고 결별해


그후 휘하장수인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 대군을 주어 북벌을 단행하게 되고




원 순제(혜종) 토곤 테무르.jpg


1368년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 토곤 테무르가 '짱깨 개XX들아! 땅주면 먹고 실수도 하고 그러면 죽고, 그러면서도 중원에서 허벌나게 치욕적 비난받고 몽골로 갑니다. 몽골족을 살....' 이란 말을 남기며 북경에서 토끼게 되고 비어있는 북경을 차지한 주원장이 신하들의 추대로 명(明)나라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해ㅇㅇ


중국북부의 주요지역을 점령하였지만 실제적으로 1382년이 되서야 확장을 멈추고 수비로 돌아서면서 천하통일을 확정짓게되




명나라 건국 당시 강역도.jpg

























주원장이 건국의 기틀을 다진데에는 도망쳐온 지식인과 학자들,강남의 지주세력들이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 이들은 주원장과 같은 고향 출신의 휘하 장수들과 더불어 명나라 개국공신의 양대 집단을 이루었지



주원장의 성장과정에서 본 탐관오리와 부패한 관료로 인해 강력한 군주정을 실시했는데 바로 밑에서 볼 짤로 설명할수 있어ㅇㅇ



명나라 관리 조직도.jpg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행정체제를 정비하였는데 원래는 원의 행정제도를 답습했어 

하지만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3만여명의 권신들과 그 일족을 처형하는 사건으로 인해 승상제도를 폐지하고 황제중심의 행정체제를 구축해



황제 혼자만으로 거대한 제국을 다스릴 수 없는법.

황제를 위해 수족처럼 다룰수 있는 세력을 만드는데 바로 환관세력이야 


주원장은 역대 중국왕조의 황제중에서 가장 신하들에게 잔혹한 군주였어

특히 군주의 전제권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을 죽여버렸지

주로 초창기에는 개국공신들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고 말기로 가면 행정체제가 정상궤도에 오르자 권신들을 잡아다가 죽여버려.


얼마나 심했던지 어느 숙청땐 10,000명에 다다르게 죽이자 황태손이던 주문윤(훗날 건문제)이 직접 바지가랑이를 잡고 울면서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다고해ㅇㅇ




하지만 주원장은 이러한 말을 했다고 전해져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내 생전에 그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기 위해 이러는거다"





마치 아들 세종을 위해 모진짓을 많이 한 태종이 떠오르는건 나뿐이盧?











딱 정의를 내리자면 주원장의 국가경영철학은 '관료는 황제의 통치를 위해 쓰다가 버리는 도구'로 내릴수 있어


그만큼 권신들이 반발 했지만 죄다 죽여버렸고 또한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으니 주원장 살아생전 그런말을 놀리는 권신들은 없었지


이 모든 일을 주원장이 혼자서 한건 아니야  위에서 말한 환관을 이용했지ㅇㅇ







권신들을 감시하고 제대로 안하면 죽여버리기 위해 창위를 설치하여 환관들을 이용해 철저하게 억압시켰어ㅇㅇ 

이러한 창위가 발전해서 나중엔 동창이라는 특수조직까지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 동창이 조선이 개국 당시 가장 경계하던 집단중 하나였어 


조선왕이 하는짓을 3~4일 내로 북경에 있는 주원장이나 영락제가 봤다고 하니 동창의 정보력 ㅍㅌㅊ?



대왕 세종 中.jpg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도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창위가 내부첩보를 담당한다면 이 등창은 황제 직속의 해외 정보첩보단으로 생각하면 편해

그만큼 주원장은 이 환관세력을 이용해 신권을 눌러버리고 절대군주제의 대표적인 황제로 등극하게 되지ㅇㅇ



명나라의 행정제도는 딱 잘라 말하면 '행정업무가 상당히 원시적이며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았다.'라고 평할수 있어

이건 행정,사법,재정관사에 맞는 기능적 전문화가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런건데 기관의 전문화가 역대 황제 치세 전반에 걸처 계속 이루어졌고, 새로운 전문적 기구와 중앙정부의 기존 부서간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야.


이때문인지 명대의 행정제도는 당나라때 처럼 발전 형태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할수있어.

15세기 명대 행정사를 5단계로 내가 임의대로 나누어본다면



1. 이시기에는 북경의 지도력이 중앙정부에만 영향을 주었을뿐 지방행정기관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어. 이점은 15세기 중반서부터 서서히 보이기 시작해.


2. 선덕제의 제위 초기에 행정제도에 많은 혁신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 Fail.....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이건 15세기 중반서부터 영향을 줘.


3. 장기적인 위기는 계속 되었지만 그때마다 비 조직적인 재조정으로 그때마다 문제를 완화시켰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해.


4. 이시기는 명나라 치세 전반에 걸쳐 두번째로 성공적인 행정,재정 업무를 보였어. (첫번째로 꼽는건 16세기 후반에 장거정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타날때야)


5. 태조 홍무제 치세의 성과는 무조건 끔살에 의한것으로 업무 효율이 좋았으나 결과물은 그리 좋지가 않았어.




이렇게 해서 14세기 후반~15세기 초중반에 걸친 명나라의 행정제도와 업무에 대해서 알아봤어. 이제 이 글의 핵심 파트인 재정,조세제도로 넘어가볼께ㅇㅇ







 





















글 쓰기전에... 친구가 사학과를 다니길래 명나라의 재정사에 대해 쓴 글이나 주변에 연구하시는 분의 자료가 있으면 한번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한적이 있어. 

한번은 사학과 교수님 중 한분이 명나라 재정사에 대해 연구하시길래 물어봤는데 '정확한 수치의 자료는 거의 없다. 거의 추정치에 가깝다.'를 듣고 
이글을 쓰기전에 '찾아보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하다가 피봤다;;;

이글의 조세제도와 경제에 관해서는 Rey Hwang의 논문인 
'16c 명대 재정문제와 세금징수' 를 많이 참고하여 쓴 글이야. 학술적인 용도로만 쓰기는 하지만 문제가 되면 자삭할께.
(외국 또한 명대 재정에 관한 논문이 극히 드물고 중국 쪽에는 넘쳐나는데 왜 영문으로 된 논문과 자료들이 없는가가 이상하네.. 가지고 있거나 알고있는 게이 있으면 꼭 좀 댓글로 보내주면 감사천만이겠盧....)















명은 원의 가혹했던 통치로 인해 사회 전체가 받은 타격을 소박한 농촌공동체의 이상을 구축하여 회복하려고 하였으며 상당한 결과를 보여줬어.

이점은 태조 홍무제(주원장)이 농민 출신이였다는점이 큰 영향을 끼쳤을거라 생각되


특히 식량 생산량의 증가와 인구 증가가 상당했는데 인구 파악이 정확하게 안되어서 명확한 수치가 아닌 대충 어림잡아 추정한 수치로 나타내고있지만 확실히 명나라가 건국하면서 중원이 안정세에 접어들었다는건 확실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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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 의하면 1500년 이전 태창고의 직속관리하에 연간 銀 1,000,000 兩이 넘는 일이 매우 드물었어 아마 명이 건국되고 초반 내부수습으로 인해 그러했을 거란 추측이 들어. 아무리 그래도 초반 내부 수습에 100년이나 걸렸을거라 생각이 들겠지만, 사실 명대의 재정 상태는 1550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태창고에 연 銀 4,000,000 兩에 이르는 조세가 거두어지게 되지. 이는 제국 전체 세금의 약 12%를 차지할 만큼 큰 수입이였지







하지만 우리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14c후반~15c초반을 봐야되겠지?











명나라의 재정상태를 알기 위해선 태창고의 수입을 잘 봐야되

실제로 명나라의 초기 재정상태는 연간 銀 4,000,000 兩을 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대부분의 수입이 즉시 북변의 군사진지로 이송되었으며 남은 재정은 주로 관리들의 봉급이나 북경 주변의 군사들, 그리고 여러 궁전의 지출 유지비로 사용되었어ㅇㅇ. 그 결과 명 초반 태창고의 기록은 거의 거지나 다름이 없었지.


호부에서 관리하는 한정된 재정자원은 사실상 제도상 약점을 들어내었지만 이건 후대의 일이지만, 건국당시에도 이러한 문제점이 보였어ㅇㅇ


정부는 불필요한 자금 이동을 제안하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납세한 것들을 남쪽의 여러 지방에서 운송하여 북경으로 보내었고 다시 남쪽으로 모두 보내었으며, 호부는 재차 강제적으로 남쪽의 여러 지방정부에게 그들 스스로 걷은 세금을 유지하라고 권한을 주었어 

(Top of ㅄ의 재정통제를 보여주는 명나라 ㅍㅌㅊ?)



그로인해 결론적으로는 재정 통제의 효율성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약점이 보이는데 사실 방대한 영토에서 걷어지는 재정세입을 온전하게 거두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관료체제가 완성이 되야 되는데, 이러한 관료체제는 송나라의 재정악화를 초래한 예를 봐서 주원장과 학자,지식인들은 관료체제의 몸집을 최대한 억제하였지ㅇㅇ


하는수 없이 기존 호부에서 몇 백명 늘리는 선에서 해결 보았으며  초반에는 '없는돈도 아껴써보자'는 지침이 황후전에서 나올 만큼 황실의 주도하에 없는 살림을 이끌고 나라 재정을 이끌어내었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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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황후전의 입김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황후인 효자고황후 마씨는 주원장의 폭주를 막는 마지막 열쇠가 될 만큼 신하들을 주원장의 철퇴에서 보호하는 역활을 했어.  그 결과 신하들은 황후의 부탁을 절대 거절할 수도 없었으며 평소 마씨가 매우 어질며 현숙해서 따르는 신하들이 많았지ㅇㅇ


(뭐 나중에 마씨가 주원장 보다 먼저 떠나면서 컨트롤 할 수 있는 인물이 없어진 홍무제는 치세 말기 대규모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는데............)


그와 동시에 다른 부(部)들은 모두 그들만의 재정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어.

북변의 군사기지를 지원 할 때에 그 부서(兵部)는 주로 병참감 장군처럼 행동하였는데, 자금의 조달에 관한 병마나 무기 그리고 방어구등등 이런것들은 모두 그들의 소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야ㅇㅇ







사실 우리가 청대의 경제를 배우다 보면 나오는 지정은제는 명 초중반부터 보이기 시작해ㅇㅇ

지정은제가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은이나 기타 현물, 쌀 등을 수금 받았지ㅇㅇ


중국은 동아시아 최고의 은 생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은을 이용한 화폐가 송나라 말엽부터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ㅇㅇ



명,청대의 은괴.jpg



특히 쌀의 경우에는 주원장 본인이 양쯔강에서 세력을 키웠다는걸 유의할때 황제 등극 이후 양쯔강에 대규모 치수,관계공사가 벌여졌어. 아마 그가 양쯔강을 얻으면서 천하를 꿈꾸었을때 이 양쯔강 중하류 일대를 중국 제일의 곡창지대로 만들려는 계획이 머리속에 있었을거야ㅇㅇ


양주 삼각지대와 절강 해안의 방파제 조성 사업은 모두 성(省)행정기관과 지방 관리들이 유지하였어. 이 주요 두가지의 일 이외에 황하의 대운하 보수 사업도 있었지만 명 초반 시기에는 부족한 재원으로 인해 계획으로만 그쳤어ㅇㅇ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1528,1565,1578,1587,1595년에 걸처 대규모로 보수되면서 임진왜란에 들어가는 막대한 전비를 충당시킬수 있게 만들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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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농업의 발전으로 태창고의 수입량은 늘어나는데 명고은(明?銀)에 의하면 한해 수입량이 銀 2,125,355 兩에 이르며 꾸준히 銀 2,000,000 兩에 근접하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어ㅇㅇ 하지만 태창고의 지출 내역을 비교해 보았을때 균형이 안맞는것처럼 보여


매년 수취한 숫자는 명고은에 기록되어있는데 명 황제 열전에 보면 서로 다른 기록을 보이고 있긴해ㅇㅇ

(표를 올리고 싶지만 이건 허락을 맞지 않아서 올리지 못하는점 게이들에게 사과한다;;)


적자 기록에 대한 인용은 매우 적었는데 오직 1580년대의 기록이 보이는걸 보면 명 초반 재정은 적어도 흑자였을거라 판단이 되지만 이러한 수치들을 보면 그들 스스로 있는 그대로 적었을 리가 없잖아? 명나라 관료들의 일관된 회계제도는 매우 열악했으며 종종 돈을 받을수 있는 수입과 사실상 받은 수입을 혼란스러워 하는 ㅄ같은 능력을 보여줘. 


예를 들어 전년도에 밀린 세금을 현재 년도에 받았다면, 어쩌면 양쪽 년도에 기록이 되거나, 때때로 가끔은 두 회계장부에 모두 누락되는 경우가 보여.......;;;;

명나라 회계관리 ㅍㅌㅊ?






주된 유지비가 경사와 북변에 있는 군사기지에 집중되어 있어서 호부의 활동은 다른 지역에 표면적인 활동 밖에 할 수 없었어

또한 15세기 전반에 걸쳐 모든 재정절차의 엄격한 감시 때문에 이와 같이 많은 관청들에게 실현 가능하지 못한 일이였지ㅇㅇ



재정운영이 가능한 예산안이 있었는가 or 없었는가 또한  매우 어려운 문제이며 고정세금,운송절차,지불과 봉급에 대한 비율, 그리고 여러가지 관례적인 판례 등 모든 관청은 '일부 영구적인 예산'때문에 제한되어 있었던 점이 보여 



이러한 문제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명 조정에 있었어  위에 행정제도를 설명하면서 나타냈지만 황제가 독단적으로 세금감면 등의 명령을 내려 성정부나 지방정부가 큰 곤란을 겪기도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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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 들면 1534년 가정제가 징수 할 수 있는 모든 토지세를 반으로 감면하라는 아주 통 큰 명령을 내렸어.  그결과 불난 호부에 부채질 하는 격이 되버렸고 엄청난 예산적자가 일어날 것이라고 반박을 하였으나 가정제는 백성들을 위해 생각한 것이니 호부에게 가장 최적의 방안을 내놓으라고 할 뿐 모든 반발을 묵살시켜.

(사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관대함을 가진 명의 역대 황제들은 백성들에게 매우 큰 사랑을 받았지만 신하들에겐 드럽게 욕만 먹었어 ㅋㅋㅋ)


특히 1523년 남직현 송강촌에서 홍수가 발생하자 그 지방장관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자연 재해가 난 지역에서 세금을 50% 감하하였어. 그러나 그 뒤에 온 명령을 보면 이전 교서의 의미로 '세금 감면'이란 재해가 난 지역의 수입유지액에 적용 되는 것이고, 수입을 경사로 운송하는 것은 여전히 정해진 금액대로 보내는 거였지. 명 초반의 조세제도에서 따왔으므로 우리는 이런 기록을 보며 명 초반의 조세제도를 대충 추측할수 있게 되ㅇㅇ


앞에서 언급한 소규모 액수의 수입은 조정에서 긴급한 재정위기가 닥쳤을때 아주 요용하게 사용할수 있었어. 이런 것들은 불가피하게 다른곳에서 자금의 부족현살이 발생할때 사용하였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예산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비용 지출의 우선순위가 낮은 것부터 삭감시키거나 정지시켜 버리면 그만이였지ㅇㅇ



이런 재정운용방향은 지방정부의 호부에게는 운송된 수입에 대한 스트레스와 지방 정부에 남겨진 수입에 대한 적은 배려에 압박을 받을수 없었어. 개인적으로 한 관리가 세수물품을 운반하는데 지체없이 운송하고 손해없이 운송하면 표창장을 받지만 수익을 유지하고 관리하는데는 대수롭지 안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ㅇㅇ


명이 존속하는 동안 회계감사는 언제나 긴장단계에 있었는데 이는 주원장이 비리부패를 매우 싫어했던 점에서 그 이유를 들수 있어. 예산이 통일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행정업무의 정확성을 측정하는 핵심이 되었지. 


들어가는 인력에 비하여 회계감사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나봐ㅇㅇ; 16c 중반에 들어서면 여러명의 고위층 관료들이 남용과 착복,횡령등의 문제에 대해 질책을 받았으며 그들의 공공자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걸 보면 이러한 점은 초기 명대에 구축한 재정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줘ㅇㅇ



만리장성.jpg



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명 초기에는 부족한 재정에 북원과의 결전을 위해 장성 이남에 대규모 군 병영을 설치하면서 자금의 흐름이 빨랐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점은 들어나진 않았어ㅇㅇ




 



군수물자 또한 명 초기 경제력을 가늠할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되


전통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명 초기 국방예산에 대한 지출이 증가가 모든 군전(軍田)의 하락의 결과로 보고 있긴하나 현재는 15세기 초반 중국의 발전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시각은 더이상 유지되기 힘들며 많은 요인 때문에 설명이 필요해ㅇㅇ



명나라 군.JPG 



15세기 초반 정부는 기속적으로 군사들에게 식량 배급과 겨울 동복을 제공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국방의 의무는 군호(軍戶)들에게서 세습적으로 이어져 왔으며 조정에서 지급하는 이외의 기본 장비는 스스로 마련하라고 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병을 모집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으며, 그들의 모집 비용은 일년에 은 5냥이고 말과 옷을 기본적으로 제공하였어. 하지만 1550년대 들어서면서 왜구들의 침략으로 양쯔강 이남에서 대규모로 군사들이 징병되었고 이들이 1570년 북변으로 옮겨갈때쯤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였지만 명 초기에는 이런 징병는 하지 않았어ㅇㅇ



중국 남부의 왜구.jpg



1405년 전비에 소비된 명 재정은 銀 13,248,600 냥(兩)으로 제국 세금의 74.92%를 차지하는데 이토록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이유는 영락제의 대규모 팽창정책에 의한 결과물이라 할수 있어. 특히 이 해에는 영락제의 황명을 받은 환관 정화가 사상 초유의 해외 대원정을 할 시기였어.(명고은 26~28p에 나와있는 내용)




정화의 대항해.jpg




그 결과 1426년에 이르러 조공국에서 들어오는 조공만 해도 한해에 銀 9,870,000 兩에 육박할 정도로 영락제 치세 중반에 들어서면서 재정사정이 나아지게 되.

(하지만 조공세에 대한 반대급부인 감합무역으로 나가는 돈이 銀 4,713,869 兩 인걸 감안하면 그리 재정사정이 좋아지는것 처럼 보이진 않는군;;) 


이러한 정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7차에 걸친 대원정이 빛을 못보고 한해 銀 6,551,720 兩이 함대 원정이 들어가니 결국 영락제 사후 명나라 조정은 원정을 포기하고 해금정책을 발표하면서 재정문제에 심각한 타격이 벌어지게 되;












15세기 초반에 북변에는 겨우 7개의 사령부가 존재하였는데 1472년부터 처음으로 장성을 증축하기 시작하면서 영락제서부터 만력제까지 거의 170년간 이루워졌어. 영락제 치세에 대동지역에서 징집된 노동력에게 지불되지 않은 임금은 1마일 당 銀 6,000 兩이고 성벽수리에 동원된 후민들에 대한 비용은 1마일당 銀6,357 兩에 이르러ㅇㅇ


하지만 실제로 지불된 비용은 관리상의 문제로 7배나 더 나왔다고 해.  즉 실제 1마일당 銀 44,500 兩 이였던 거지.

계산해보면.... 어후;;; 이건 게이들에게 맡길께ㅋ





중국의 성.jpg



이러한 성의 증축으로 인해 군사예산이 증가하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화약병기의 사용이야. 15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대량의 화약병기를 운용하게 된 명은 보편적으로 대포알을 흙으로 만드는 공법을 사용하였지만 큰 파괴력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납을 사용하게 되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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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격으로 잠시 쓴 화력덕후 조선편을 보면 동아시아에는 대규모 주철,구리산지가 있지 않았어.  그결과 이러한 납 포탄의 대량 생산은 명 조정에게 큰 재정 부담을 주지만 안만들수도 없는 일......  1438년 북경 주둔군의 대포알은 총 100만개가 있었으며 화약은 2,000톤을 비축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에 들어가는 북경의 전비는 銀 862,600兩으로 막대한 전비가 이 화약병기에 의해 이루어진거라고 보면 참 ㅎㄷㄷ 하지 않盧?


이러한 납 포탄은 1568년에야 철로 주조된 포탄으로 대체되면서 막대한 양의 전비를 줄일수 있게 되지만 이건 훗날의 이야기.....






























이로서 간단하게나마 명나라의 행정제도와 경제,재정제도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봤어.

한국에서는 명대의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드며 서방권 또한 자세하게 연구한 논문들이 거의 없어서 자료를 전적으로 레이 황의 논문을 보고 내 임의대로 써본거야. 그래서 많이 틀리는 부분도 있을거고 애매한 부분도 있는점은 게이들에게 사과할께.


지루한 글이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었다고 생각이 들면 좋겠다. 

게이들아 좋은 밤 보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