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xgotc






 전쟁사 쓰면 ㅁㅈㅎ 주는거 아님?? 이라고 쓴 게이야

예전에 교양 레포트로 쓴거에 이것저것 추가하고 자세하게 쓰느라 너무 시간이 걸렸다;;;


글재주가 없지만 밀게에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기에 한번 전쟁사에 대해 써볼까 해


난 역사를 전공한 게이가 아니라 틀릴지도 모르지만 틀리면 가차없이 가르쳐주길 앙망해ㅋ


내 글에 달린 '조선초 군사력이 강하다고 하는데 왜 강한지 감이 안잡힌다'라는 댓글에 대해

답변으로 한번 자세하게 써볼까 하고 주제넘지만 얼마의 시리즈로 써볼까해 !!



일베나 짤게에 올라오는 전쟁사가 조금 부족한 감이 있는거같아서 좀 자세하게 쓰려고 해

그럼 개 ㅆ스압이 되겠지만 시간나면 천천히 봐주고 깔거 있으면 까주길 바래!


이틀에 걸쳐 써서 그런지 좀 두서가 없다;

미안하다. 걍 읽어줘라ㅋ



참고로 밀게에만 올릴텐데 무단펌은 하지말아줬으면 한다;

뭐 ㅎㅌㅊ 글이니 펌도 안하겠지만ㅋㅋㅋㅋ



ps. 너무 길다 싶으면 밑으로 내려가서 축약한 내용이 있으니 그거 읽어도 된다ㅋ























1.jpg

( 한국사 역대급 뒷통수인 위화도 회군.. )




조선초 군사력이 막강했다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명나라 역사서에 홍무제가 조선의 군사력을 두려워 한다는 대목이 적혀있다고

인터넷에 떠도는데 사실 홍무제가 진짜로 두려워 한것인지 아니면 제스쳐로 그리 한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빨간두건을 쓴 빨갱이 같은 홍건적새끠들과 반란군,섬숭이.원 군벌,여진족등을

몽둥이로 홍어를 치듯이 삼일에 한번 맛깔나게 패던 한국사를 통틀어 최강의 맹장 중 하나인걸 알고 있을거야.


사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 이씨지만 이성계의 할아비인 이춘이 의주에서 함경남도 함주로 이동하면서 이성계의 출신지는 함경도라고 볼수 있어.

이성계 집안은 고조할아비인 이인사 때부터 원나라의 관직이였던 다루치기를 하던 친원 집안이지만 이성계의 아비인 이자춘은 어린나이때부터 총명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다고 해.




2.jpg

( 히히힝 유럽 정벌하러 ㄱㄱㅆ 은 아 ㅆㅂ 옛날 꿈.... )



이자춘은 당시 동아시아의 중심이였던 원 제국이 쇠락하는걸 바로 알아차리고 고려의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고 하니까 

눈치빠르게 공민왕을 만나 원나라를 통수치는 하극상을 보여줘 역시 본관이 전주라서 전라도 종특이 나오는 한장면이 아닐까 해ㅋㅋㅋ

(전주 이씨라고 전라도라고 매도하는게 아니야 걍 재미라고 생각해줘ㅋㅋㅋ)


얼핏 보면 공민왕이 한낮 원나라 관리인 이자춘을 만나줬을까? 란 의문이 들수 있을거야

투항 당시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란 직책이였는데 함경도일대를 이자춘이 얼마나 꽉 잡고 있었는지를 가늠할수 있어



이자춘의 통수에 의해 쌍성총관부를 되찾게 된 고려 조정에서 이자춘은 여진족과 원나라의 침임을 고려하여 자신이 함경도 일대의 방비를 

일정부분 책임진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자신의 근거지인 함경도 함주 일대를 꽉 틀어 잡을수 있게 되.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함경도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을 삼일한을 시전하기도 하고 당근을 던져주기도 하며 회유하여 가병(家兵)으로서 

기마실력이 우수한 여진족들을 영입하게 되고 이자춘 세력은 고려 안에서도 ㅅㅌㅊ의 군벌세력이 되


너무 이자춘에 대해 이야기를 한거 같은데 당시 이성계는 청년때의 나이로 쌍성총관부가 원나라의 영향권이였을땐 

금오위상장군 겸 동북면상만호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어. 그의 능력때문인지 아비의 빽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게 원나라 군편제의 그 '만호장'이면 1만호를 다스리는 나름 능력 ㅅㅌㅊ의 남자라는걸 유추할수 있어ㅇㅇ




뭐 결국 이성계는 귀순 후 왕의 호위무사를 자청하며 수행하였는데, 그 결과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

제 1차 요동정벌 당시 그러한 왕의 신임에 보답하듯 신들린 실력을 발휘하면서 점점 일류무장으로 거듭나게 되고 

거침없는 승승장구로 시문하시중(오늘날로 따지면 국무총리에 해당됨)까지 올라가게 되면서 최영과 함께 고려무장 Top 2에 들어가

(이성계의 영웅담은 인터넷에서 찾아... 그거까지 쓰면 글이 산으로 갈듯..)

 

이러한 군사적인 승승장구에는 이자춘이 닦아놓은 가병들의 역활이 컸다고 해

특히 이성계 휘하의 가병들은 파쇄력과 기동력을 갖추어 그의 왜구토벌전에 크게 도움을 줬다는게 고려사에 나와ㅇㅇ

특히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이끌던 여진 기병의 활약으로 인해 밑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초기 조선군의 군 편제에 영향을 줘



이러한 이성계의 무장시절의 군 경력이 조선초 군사력에 큰 영향을 줬지만 가장 큰이유는 고려조의 잦은 외침을 들수 있어



4.jpg



1359년 홍건적이 고려군에게 의해 이북으로 밀려난 후 수군을 동원해 해안지대에서 노력질을 하면서 세력을 키우다가

1361년 10월에 10만의 군세로 재침입을 하게 되 이때 공민왕이 복주(현재 함경남도 단천)로 피신하면서 개경이 함락되

이듬해 12월 복주에서 군대를 재정비하여 홍건적을 막으면서 각 도에 파발을 띄워 20만의 병력을 모아 개경을 탈환하게 되


고려말 20만의 병력을 과연 고려가 모을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양계가 군사적 특수행정구역의 성격에서 점차 도의 성격으로 변하게되ㅇㅇ

또한 홍건적 침입 당시의 개경과 변방의 방어를 맡고 있던 3위가 대략 3만에 달했지만 외부세력이 이끌고오는 병력은 3만으로는 막기에는 턱없이 적지



이 예를 드는 이유는 조선 건국 당시 잘무장된 병사 20만이 튀어나오는 이유가 이 홍건적의 침입을 예로 들면서

시작하는게 좋을거 같아서 써봤어 


살짝 고려의 군사 조직을 보면 중앙의 2군 6위와 지방의 주현,주진군으로 나뉘어 있어.

몽골침입과 외부의 잦은 외침으로 고려말에는 지방의 주현군의 징집방법을 포괄적으로 바꾸어서 병력동원이 원할하게 만들면서

그 결과 잦은 외침으로 인해 주현군은 점차 실전도가 높은 농민들로 넉넉하게 꾸릴수 있었으며 

평시에 농사에 종사하면서 전시땐 ㅍㅌㅊ하는 군사로 탈바꿈하게 되


고려말 군벌 세력들의 가병들과 중앙 소속 군사들이 중앙군을 이루며 실전을 겪으며 베테랑으로 거듭난 주현군을 

그대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얻게 되는게 가장 큰 이유라고 들고싶어.








그렇다고 대충 이렇게 쓴다고 55me!! 그렇구만? 할 게이들이 아니잖아?

조선초 군사 편제와 역량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볼께








고려조 이전부터 한반도 고대국가의 중앙군은 전,후,좌,우,중 5개의 조직이 되어있었는데 이것은 중심을 방어하는 방어전투개념이야.

태종 이전에는 이를 간소화 하여 중군,좌군, 우군으로 편제되는 의흥삼군부로 만들었는데 삼군부에 속했던 고려시대의 10위에 해당되는

10사가 12사로 변화되었다가 1451년 5사로 개편되고 또 다시 세종때 상왕이였던 태종이 변계량에게 지시하여 이를 5진으로 개편하게되

조선 전기 군편제인 오위편제가 완성이 되는건 문종 원년인 1451년 완전하게 정착되.


이것이 바로 조선의 중앙군이야

우린 조선 전기 중앙군과 지방군을 알아보기 때문에 일단 조선 전기의 중앙군 편제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고려시대의 중앙군 편제에 대해 알아봐야되 

그래야 매끄럽게 물 흐르듯 볼수 있을거같으니까 ㅋㅋ




고려때의 2군 6위군은 무관의 관료체제에 불과한데 



15.jpg 

(천추태후가 거란군을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2군6위 편제/ 그림판으로 만들어서 발퀼이라 미안하盧;;)



2군은 왕실호위대이며 나며지 6위는 각 지방에 주둔했어

이 2군 6위의 지휘관과 부지휘관 각각 1명씩 모두 18명이 중요 군사업무를 논의하는 중방을 만들어서 활동했지만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도병마사를 제치고 최고 권력기구가 되었다가 무신정권이 몰락하면서 2군6위 체제가 유명무실해져 

사실상 무신정권이 대몽항쟁으로 인해 몰락하면서 고려의 중앙군은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공민왕이 집권하면서 무너진 중앙군을 추스리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공민왕 치세 후반 되면

게이들도 알다시피 나가리 되는 상황이 발생해버리면서 고려는 재기불능의 상황에 처하게 되지..

그 결과 무리하게 제1차 요동정벌을 감행하였고 제2차 요동정벌 때 조선의 창시자가 되는 이성계에게 뒷통수를 쳐맞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고려는 결국 운지하게 되지 ㅇㅇ





조선 개국.jpg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개국된 조선왕조는 고려를 옛 취급하며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이였어.

물론 그 이전에도 건국 초기의 약한 왕권을 강화하는 노력은 계속되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왕권보호를 위한 시위패의 개편과

수도방위에 주력할 중앙군을 강화,육성하는걸로 귀결 될 수 밖에 없었어.



그리하여 개국한지 9일만에 문,무관제를 정하여 반포하였고, 국가의 정치적 기틀을 다지는데 필요한 군사적 배경이 될 수 있는 중앙군제는

이름뿐이던 고려조의 2군 6위의 8군에 이성계가 친히 거느리고 있던 의흥친군좌위와 의흥친군우위 이 2개를 합쳐 10위 제도로 개편해

각위에는 중,좌,우,전,후령을 두어 모두 50령(!)으로 조직하여 일단 엉성하게나마 중앙군의 성립을 보여주게 되었어

(!! 1령은 1000명의 편제단위이므로 50령이니 5만명이야, 조선건국당시 조선 중앙군은 대략 5만명)



19.jpg

( 개국 당시의 조선 중앙군 )




중앙군 정비를 마치자 얼마 안있어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 등이 상서하기를



---------------------------------------------------------------------------------------------------------------------------------------------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 양직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에서 이미 백사 서부가 있고, 또 제위 각 영이 있으니 문무의 관직을 구비하게 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병의 제도는 대개 전조의 옛 것을 계승하였습니다.…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동반의 관명과 직호는 일체 모두 개정하여 명칭에 따라 실상을 책임지우니, 백관이 일에 나아가고 공을 힘쓰게 되는데, 유독 부위의 칭호만은 그전대로 그냥 있으며, 폐단도 또한 전과 같습니다.

신 등은 직책이 삼군을 관장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삼가 부위의 당연히 행해야 될 사건을 조목별로 말미에 갖추어 올립니다. 


1. 의흥친군좌위는 의흥시위사로 고치고, 우위는 충좌시위사로 고치고, 응양위는 웅무시위사로 고치고, 금오위는 신무시위사로 고쳐서

매 1사마다 각기 중ㆍ좌ㆍ우ㆍ전ㆍ후의 5영을 두어 중군에 속하게 하고 좌우위는 용양순위사로 고치고, 신호위는 용기순위사로 고치고, 흥위위는 

용무순위사로 고쳐서, 매 1사마다 또한 각기 5영을 두어 좌군에 속하게 하고, 비순위는 호분순위사로 고치고, 천우위는 호익순위사로 고치고 

감문위는 호용순위사로 고쳐서, 매 1사마다 또한 각기 5영을 두어 우군에 속하게 하고, 우시위ㆍ순위 등 십사는 매 1사마다 인신 1과를 주조하여 주고

도위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할 것이며, 1. 상장군은 도위사로 고치고, 대장군은 도위첨사로 고치소서.…” 




[태조실록 권제5, 12장 앞쪽~14장 앞쪽, 태조 3년 2월 29일(기해)]

-----------------------------------------------------------------------------------------------------------------------------------------------



결국 이성계는 이름을 바꾸기는 하지만 난 편의상 위의 짤 처럼 부를께 

이와같은 조직편제는 실질적인 면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 단일의 군사체제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어;


또한 실제 군사조직과는 많이 달라 유명무실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국에 공로가 있는

종친,훈신들이 각기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병권을 왕권에게로 종속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위의 정도전이 상서로 말한것 처럼 2군6위의 폐단이 전과 똑같다는점이 나타나는걸 들면

 실질적인 중앙군사력은 이성계의 친위부대인 의흥친위군위에 집중되어 있음은 당연한 말이겠지?

이러한 8위의 문제점으로 인해 10위와 함께 대표적인 독자적 부대를 만들게되

 크게 7개로 나뉘는데 각각 별사위,갑사,친군위,시위,대졸,파적위,장용위로 나뉘어



별시위는 태종 즉위년인 1400년에 신설된 부대로 국왕시위로서 친위대 역활을 맡아 했으며 

밑의 갑사들 중에서 무예실력이 출중한 사람들 중 양반자제들로만 선발해서 엄격한 취재시험을 거처 들어들어가는 부대야

주로 왕의 친위대 역활을 하였지만 왕의 비밀지령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고 전해져.

세종 1년 1419년에 200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조4년인 1458년엔 5,000명으로 늘어났다가 경국대전에서는

1,500명으로 감소, 조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21.jpg 


갑사는 중앙군의 핵심으로서 무반직이였으며 대다수가 중기병의 편제였어

갑사는 스스로 기마와 복마(짐말),군장은 물론이고 종자까지 거느리고 왕성의 시위와 궁걸의 숙위를 담당하며

유사시 변방 방어임무에도 동원되었어.

그러므로 웬만한 경제력이 아니고서는 그 임무 수행이 불가능 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노비 5~6구,토지 5~6결 이상의 소유자로 입대를 제한했어.

하지만 세종 치세 후반대에 접어들면서 증가된 병력 숫자를 채우기 위해 경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의 입대도 허락하게 되ㅇㅇ

이때문에 조선 중기에 일어나는 군사력약화의 시발점이 되는 양반들의 군역 회피가 이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야ㅇㅇ


세종 이후에는 서반 체아직을 받아 근무했으며 양인의 의무 군역인 정병과 수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명실상부한 조선의 대표병종이야. 경국대전이 반포될 무렵에는 이 갑사들이 14,800명에 이르렀다니 

당시 조선이 동아시아 기병전력의 탑클래스였다고 생각이 되지 않盧?!


특히 갑사들중 일부는 중앙군으로서 북방에 파견되어 괴랄한 여진기병들과 자웅을 겨누며 무예을 쌓아 올려

수령이나 만호,군관등으로 진출하였으며 군공을 세우면 당상관으로도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어.

조선 중,후기에 비해 조선초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고위급 무관이 되는것도 가능했어


이 갑사출신으로 고위 공직자가 된 유명한 사람은 예종 때 영의정을 지낸 강순,유자광들이야


중앙군 편제에 갑사를 집어 넣었지만 갑사가 중앙군에 많아서 집어넣은것뿐이야.

사실 갑사는 시위패,영진유방군,기선군 등등 지방군에도 들어갈 수 있었으며 

지방군 또한 능력만 있으면 중앙군 소속 갑사에 들어갈수 있었어


시간이 지나면서 갑사는 부대로서의 의미 보다는 녹봉을 먹는 군인이라는 의미로 변질되ㅇㅇ





갑사들이 선호한 전술로는 

전투에 들어가면 100보 앞에서 활로 기사를 한 후 적이 50보 앞에 이르면 환도나 기창을 들고 돌격하는 

돌격형 기병전술을 자주 썼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난 잘 모르겠어


이건 따로 파트를 내서 쓸까 하다가 그래도 조선 전기 대표적인 중기병인 갑사에 넣어야 될거같아서 

써보는건데 가독성이 매우 떨어지는거 같아서 미리 양해를 구할께;;









야전에서 이상적인 궁기병(조선 기병은 대체적으로 궁기병 성향이 짙어서 내 임의대로 정의했는데 반론해도 좋아ㅇㅇ) 운용은

아무래도 로마군을  카라이 전투에서 박살낸 파르티아가 대표적일거야

하지만 조선의 궁기병의 기사방식은 몽골이나 외국 궁기병 처럼 중(원)거리에서 적을 상대하며 치고 빠지는 스타일로 운용하기엔 한계였을거야

(외국 궁기병에 비해 조선 기병은 비교적 중무장을 하였으므로 난 그리 생각하는데 다른게이들은 어떠盧?)


물론 과거 시험과 실전 운용은 차이가 있겠지만 완전 무관하지는 않을거야

조선 후기 평양감영에서 편찬한 궁술교본인 '사법비전하공'에서도 

'기사 시에는 십보 내지 이십보 안에서 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걸 봐도 조선의 궁기병의 운용스타일을 엿볼수 있어ㅇㅇ


그러나 우리는 조선 전기를 살펴보고 있으니 조선 전기의 운용스타일을 봐야되겠지만....

조선 전기 창기병 전술에 관한 자료를 내가 ㅄ인지 찾을수가 없었盧....ㅠㅠㅠ


그나마 창기병 훈련방식을 찾을수 있긴 했는데

창기병 훈련으로는 두사람이 짝이 되어 교전하는 방식인 갑을창(甲乙槍)과 세 사람 혹은 세 대오가 서로 겨누는 삼갑창(三甲槍) 등등이 

조선 전기 대표적인 창기병 훈련이란걸 찾아냈어


갑을창 훈련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기창세 연습에 관한 실록 기록은 아래와 같아










-----------------------------------------------------------------------------------------------------------------------------------------------


세종 13년(1431) 시험에 나갈 갑사 등에게 기창세와 보창세를 익히게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기창세(騎槍勢)는, 두 기군(騎軍)이 마주 서서 상거하기를 1백 50보(步)로 하여 북소리를 듣고 말을 달려 각각 좌우로 창을 휘두르는 형세를 짓고

말 채찍을 휘둘러 착창세(着槍勢)를 짓는다. 모두 앞으로 빨리 달려 3, 40보를 격하여 서로 창을 부딪치는 형세를 짓습니다. 

서로 말을 머뭇거리면서 서로 보고 서로 부딪쳐 혹 물리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되, 3회(回)에 지나지 아니하며, 한 기병이 먼저 달아나서 

배창세(背槍勢)1675) 를 지으면, 한 기병이 쫓아 달려서 창을 부딪치는 형세를 짓습니다. 


달아나는 자는 혹 왼쪽으로 혹 오른쪽으로 가며, 쫓는 자는 좌우로 번갈아 창을 부딪치는 형세를 짓는데, 부딪친 뒤에 잘못 부딪쳐서 옆으로 나가면

달아나던 자가 빼앗아 도로 쫓아서 왼쪽으로 휘두르며 부딪치고, 오른쪽으로 휘두르며 부딪치되, 또 그릇 부딪쳐 옆으로 지나가면 달아나던 자가 다시 창을 

빼앗아 도로 부딪치고 치기를 위와 같은 형세로 합니다. 징소리를 듣고 말을 달려 돌아서 좌우로 창을 휘두르며 착창세와 배창세를 지으며 그칩니다. 


보창세(步槍勢)는,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북소리를 듣고 각각 창을 휘두르는 형세를 짓고,좌우로 휘두르며 착창세를 짓는다. 

모두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창을 부딪치되, 서로 돌고 서로 부딪치며 혹 물리치고 혹 피합니다. 남은 것은 기창세와 같이 하는데

좌우세(左右勢)는, 취재(取才)할 적에 등급을 나누어 주기가 어려우니, 갑사 및 자원하는 사람은 춘추 습사(習射) 때에 이 예에 의하여 미리 익히게 하며

만약 이유 없이 미리 익히지 아니한 갑사에게는, 오는 임자년 도시(都試)에서 시작하여, 시험에 나가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며

무과(武科) 및 도시(都試)에서 하번 갑사(下番甲士)의 취재는 전례(前例)에 의하여 추인(芻人)을 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이 기록을 보면 조선의 창기병 기법은 무장간의 일대일 대결을 연상시키지 않盧??

물론 이런건 개인 전투 기술 향상을 위한 훈련법이긴 한데 조선의 창기병은 일반적인 중기병 전술인 '닥치고 돌격'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 볼수 있어


이처럼 조선 초기 기병 전술은 궁기병이건 창기병이건 근거리 교전이 우선인걸 알수 있지ㅇㅇ

그럼 조선 전기 기병 전술이 근거리 교전으로 귀결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조선 전기 주적이였던 여진을 상대하기 위함이였을거라 생각해



소규모 여진 기병을 상대해야 하다보니 조선 기병 역시 소규모로 분산하여 개별전투를 하는게 대세였을거야

특히 개마고원을 보면 알겠지만 산악과 구릉지대가 많은 북방에서는 대규모 기병 운용에는 한계가 있었겠지?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





세종 16년(1434)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가 진법에 관해 아뢰다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가 진법(陣法)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대체로 전투하는 군사는 각각 장기(長技)가 있는 것이오니, 저들이 저의 장점을 가지고 오거든 우리는 저들의 단점을 이용하여 공격하여야 

바로 이길 수 있사옵니다. 궁시(弓矢)로 싸우는 것은 야인의 장기이온데, 우리가 단지 궁시로서만 응전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야인과의 싸움에서 아직 대승(大勝)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야인의 포진(布陣)은 새처럼 흩어지고 구름처럼 퍼져서 항오(行伍)를 이루지는 못하오나 저들이 많고 우리가 적을 때에는 에워싸기에 

힘을 쓰고, 저들이 적고 우리가 많게 되면 형편을 따라 물러나면서 나무에 의지하고 돌에 붙어서 다투어 강궁(强弓)을 쏘아대므로, 우리 군사는 벌처럼 뭉치고 

개미처럼 모여 적을 맞이하게 되매, 적의 화살에 맞아 인마(人馬)가 많이 상하였사오니, 이는 병법(兵法)에 꺼리는 바입니다.

 

출군행병(出軍行兵)과 진퇴좌작(進退坐作)을 진설(陳設)에 의거하소서. 적군을 만났을 때에는 중익(中翼)에서 각(角)을 한번 불면 청·백 두 휘(麾)가 

앞을 가리키고, 북이 울리면 좌·우익(左羽翼)이 옆에서 나와 그 항오가 소통되게 하되, 구름이 피어오르고 새떼가 흩어지듯 하고, 서기를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나르듯이 하여, 좌우로 벌리고 형세가 에워싸는 것처럼 합니다.  3인이 1오(伍)가 되게 하되, 1인은 방패(防牌)를 잡고 검(劍)을 차며, 1인은 창을 잡고,아울러 궁검(弓?)을 차도 좋다. 1인은 궁시(弓矢)를 차고 검(?)을 찹니다.  3대(隊) 사이마다 화통(火?) 하나씩을 두고 3인으로써 오를 지어 방패에 1인, 화통에 2인씩으로 합니다. 서로 바꿔 가며 연달아 쏜다.  적군이 만일 흩어져 서서 나무나 돌에 의지하여 싸울 때에는, 각(角)을 한 번 불어 휘(麾)가 엎드리고 북이 울리면, 방패를

잡은 자가 말에서 내리고, 활과 창을 가진 두 사람도 말에서 내려 방패의 뒤에 있게 합니다. 


북이 급하게 울리면 방패를 가진 가자 빨리 뛰어 나아가고, 뒤에 있던 두 사람도 또한 달려 나아갑니다. 활과 창을 섞어 쓰게 되면, 적이 나무나 돌에 의지하여 

견디지 못하여 등을 뒤로 돌리고 달아날 경우에는, 좌우에서 일제히 나아가 급히 공격하게 하되, 적군이 만일 말을 타고 달리거든 우리도 말을 타고 쫓아가다가,

쇠[金] 소리를 듣고는 그만 둡니다. 


북과 나발[鼓角]이 다시 울리면 나아가 다시 싸우게 하는데, 대체로 중익(中翼)의 고각(鼓角) 소리와 기휘(旗麾)의 지휘에 따라 좌·우익이 응전할 것이며,

싸울 때마다 모름지기 기병(奇兵) 이 있어 그들이 뜻밖에 나타나 혹은 그 앞에서 맞아 싸우고, 혹은 좌우와 기병·정병(正兵)이 서로 나오고, 기각(?角) 이 

서로 따라, 항상 병졸들로 하여금 장수의 뜻을 알게 하고, 장수는 병졸의 마음을 알아서 적에게 투입시켜 들어갈 때에, 손으로 손가락을 돌리듯 하오면 

사람들은 저절로 싸우게 될 것이오니, 그 요지(要旨)는 주장(主將)의 평상시 연습(鍊習)에 달려 있는 것이옵니다.”

 


하니, 본도(本道)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이제 아뢴 바의 진도(陣圖)는 지세(地勢)와 저 적군의 장기(長技)로써 포치(布置)하고 제작한 것이나, 북도(北道)의 산형(山形)과 지세가 특히 다른 지방과 

다르매, 주장(主將)이 적에게 임하여 제승(制勝)하는 방책은 한쪽만 가지고서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5인으로 오(伍)를 삼는 오오지법(伍伍之法)은 고금을 

통하여 중요하게 여기는 바이니, 이제 말한 3인으로 오(伍)를 삼는 진법은, 모름지기 5인의 뜻이 맞는 자로서 그 마음을 한 데 묶어서 접전(接戰)할 때를 당하여,

1인이 급하게 되면 4인이 응원하고, 2인이 급하면 3인이 응원하게 하라. 


조운진(鳥雲陣)은 전혀 산천이 험애(險隘)하여 군대가 열(列)을 이루지 못하는 곳에서 이를 쓰는 까닭으로, 주장(主將)이 시기에 임하여 지세(地勢)를 보아 지휘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항오(行伍)를 성기게 하고 흩어져서 적을 막으면, 사람들이 스스로 싸울 것이라 하나, 승부(勝負)와 진퇴(進退)의 사이에 그 항오를 

잃어버리지 말고 각각 그 국세(局勢)를 회복하여야만, 잠깐이라도 진(陣)이 깨지고 병졸을 잃어버리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3인을 가지고 오(伍)를 삼는다면 결진(結陣)하고 행진(行進)할 때에도 3인으로써 오(伍)를 만들겠는가. 만일 결진하고 행진할 때는 5인으로서 오(伍)를 

삼았다가, 단지 접전(接戰)할 때만 3인으로서 오(伍)를 삼는다면, 오(伍)를 잃고 차례를 떠나게 되어 난잡하고 계통이 없이 될 것 같다. 


이제 단지 접전할 때의 일만 아뢰고 결진하는 법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결진하는 법도 아울러 마련[磨勘]하여 아뢰라. 또 경원(慶源)·영북진(寧北鎭)은

방어에 긴요한 곳이니, 한때의 폐단이 있음으로써 습사(習射)를 정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농사에 힘써야 할 때에, 새로 옮겨 온 백성들을 

모아서 이들에게 연습을 하게 한다면, 혹 밭갈이와 김매는 시기를 잃지 않을까 염려되고, 안심하고 토착(土着)할 수가 없을 것이니, 그 시세(時勢)를 보아 농사와

무예를 아울러 허소(虛疎)하게 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






여진의 전술은 조선군이 소수면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포위 공격하고 조선군이 다수이면 흩어져 달아나는 방식으로 괴롭히니

조선군은 3인이 방패,활,창으로 상성을 이루어 서로를 보호하고 추격할때에는 말을 타고 추격하자는 건의인데....

(이게 무슨소리야?! 조선 기병이 드라군이란 이말인가!? 핡핡핡.....)


전통적인 조선군 편제가 5인이 기본이기 때문에 전투시에만 3인으로 편제되면 매우 좋지 않은 일이 많아질거 같아서

실행되지 못했어ㅇㅇ


이 건의는 일년 후에 다시 논의되는데 아래와 같아














---------------------------------------------------------------------------------------------------------------------------------------------



세종 17년(1435)함길도 도절제사가 접전할 때의 진법을 아뢰다






처음에 함길도 절제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지금 아뢴 진도(陣圖)가 지세(地勢)와 저들 적(敵)의 장기(長技)를 생각하여 포치(布置)하고 제작한 것이나, 그러나 오오(五伍)의 법은

고금의 병법(兵法)에서 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싸울 때를 당하여 한 사람이 급하게 되면 네 사람이 구원하고, 두 사람이 급하게 되면 세 사람이 구원하는 것이다.

 

조운진(鳥雲陣)은 산천이 험하고 좁아서 열(列)을 이룰 수 없는 곳에서 쓰는 것이므로, 그 항오(行伍)를 성기게 하여 흩어져서 적을 막게 되어, 사람들이 각자가

싸움을 하되 거의 그 항오를 잃지 아니하고 각각 그 맡은 바 임무를 되풀이하여, 조금도 파진(破陣)되거나 군사를 잃을 근심이 없다. 

지금 만일 세 사람으로 항오를 삼는다면 결진(結陣)하고 행진(行陳)할 때에도 세 사람으로 항오를 짓는가. 결진(結陣)과 행진(行陣) 때에는 다섯 사람으로 

항오를 짓고, 접전할 때에는 세 사람으로 항오를 지으면, 항오를 잃고 제자리를 이탈하게 되어 통제(統制)가 없을 것 같다. 또 이것은 접전할 때의 진법이니

결진하는 법과 접전할 때의 진법(陣法)을 도순검사(都巡檢使)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뢰기를, 

 

“대개 전투하는 군사는 각각 장기(長技)가 있사오니, 저쪽이 장처(長處)로 하거든 우리는 마땅히 저쪽의 단처(短處)를 써서 공격하여야 제어해서 이길 수 있는 것

입니다.  궁시는 야인의 장기이온데 궁시(弓矢)만을 가지고 응전(應戰)하기 때문에, 야인과 싸우면 크게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야인이 진(陣)을 배치하는 것이 새가 흩어지고 구름이 가듯이 하여 항오를 이루지 않으므로, 저쪽이 많고 우리 쪽이 적으면 에워싸기를 힘쓰고, 저쪽이 적고

우리쪽이 많으면 형상을 감추어 퇴각하여 나무에 의지하고 돌에 붙어서 강한 활을 다투어 쏘는데, 우리 군사는 벌처럼 뭉치고 개미처럼 모이어 적의 화살을 

맞게 되어 사람과 말이 많이 상하니, 이것은 병법에서 꺼리는 바입니다. 


결진과 행진을 모두 진설(陣說)에 의하고, 적을 만났을 때에는 중익(中翼)이 각(角)을 한 번 불고 청·백의 두 휘(麾)가 앞을 가리키고 북이 울리면 좌·우익이 

옆에서 나와 그 대오를 성기게 하여 구름이 피어오르고, 새가 흩어지듯이 하고, 서기를 기러기가 가는 듯이 하여 좌우로 벌리어 형세가 포위하는 것 같이 하고,

다섯 사람이 항오가 되어 한 사람은 방패를 가지고 칼을 차며, 한 사람은 궁시를 차고 창을 가지며, 세 사람은 궁시를 차고 칼을 가지고, 만일 걸으면서 

전투하게 되면 한 사람이 네 사람의 말을 지키는데, 주장(主將)이 말 지키는 사람을 적당히 더합니다. 


매양 3대(隊)마다의 사이에 화통(火?) 부대를 두되, 역시 다섯 사람으로 항오를 만들어서 방패를 가진 한 사람은 칼을 차고, 화통을 가진 네 사람은 칼을 차며, 

말을 지키는 사람은 위에서와 같이 합니다.  적이 만일 흩어져 서서 나무와 돌에 의지하여 싸우거든, 각(角)을 한 번 불고, 휘(麾)를 잠깐 눕혔다가 잠깐 

일으키고, 북이 울리면, 방패를 가진 사람이 말에서 내리고, 활과 창을 가진 네 사람이 또한 말에서 내려 방패 뒤에 있습니다. 


북이 급히 울리면 방패를 가진 사람이 빨리 달려 앞으로 나아가고, 뒤에 있는 세 사람도 역시 빨리 달려 앞으로 나아갑니다.

말을 지키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만 세 사람이 활과 창을 번갈아 쓰면 나무 와 돌에 의지하여 굳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적이 패하여 달아나거든 좌우가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서 급히 치되, 적이 만일 말을 타고 달아나거든 우리도 또한 말을 타고 쫓으며, 쇠[金]소리를 들으면 

그치고, 북과 각이 다시 울리면 앞으로 나아가서 다시 싸우되, 무릇 중익(中翼)의 고각(鼓角) 소리와 기휘(旗麾)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익이 응하며, 

싸울 때마다 반드시 기병이 있어 뜻하지 않은 때에 나와서, 혹은 앞에서 요격하고, 혹은 뒤를 끊고, 혹은 좌우를 공격하여, 기정(奇正)이 상생(相生)하고 

기각(?角)이 상제(相濟)하여 항상 병졸은 장수의 뜻을 알고, 장수는 병졸의 뜻을 알아서 투입하는 대로 가기를 손이 손가락을 부리듯 하면, 사람들이 각자가 

싸움을 할 것이되, 요(要)는 주장이 상시(常時)에 훈련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건의 내용은 동일한데 해결방안은 기존 3인 편제를 그냥 5인 편제로 바꿔서 실행하면 되는걸로 해결해버려....

(.... 조상님들 머리회전 ㅍㅌㅊ....?)


쭉 다 읽어봤다면 조선 전기 궁기병이건 창기병이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궁기병/창기병 스타일과는 꽤나 차이가 나지않盧?


더더욱 자세하게 쓰고 싶지만 내 지식이 미천하고 오위진법이나 계축진설 등 조선 전기 병법서를 두루 봐야 

더욱 정확한 기병 운영방식을 알수 있기에 대충 마무리 할께;; 


너무 벌려놓고 수습도 안하니 미안하盧...;;










친군위(親軍衛)는 태종때에 신설되었으며 함경도 출신들을 우대하기위해 만들어 졌어

조선 개국 당시에는 이성계의 친위대인 의흥친군위 소속의 함경도 무사들이야.

후에 조선 전기 오위중 하나인 호분위에 속한 함경도 무사로 불려져.


조선 초에 부족한 정보력을 메우기 위해 믿을만한 함길도 출신 무사들로 정보력을 충당했어

시간이 지나면서 왕실 군정보기관으로 변했으며


세조 14년인 1468년에 재경시위로 확립되면서 중앙군 오위 중 하나인 호분위에 소속되었어

경국대전에서는 별시위와 동격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최고 높았을때는 내금위,겸사복과 같은 동격으로 올라간 적이 있는 부대야

뛰어난 공적과 실적을 올리면 정3품 당상관까지 올라갈수 있었다고 전해져







시위패(侍衛牌)는 왕실 근위대로서 중장보병인 팽배수가 주축이였다고 기록되어있으며

한때 수천단위로 운용되었다고 전해져 특히 이 중앙군 소속 팽배수들은 유사시 변경 방어임무를 받아 

동원되어서 변경 지방군과 함께 주력 보병의 역활을 맡았다고 전해져.

( 시위패의 다른 말로는 방패(防牌)로서 원래는 방패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지만 난 여기서는 시위패로 쓸까해 )


주로 개국당시 종친들과 개국공신들의 사병들에서 뽑아 갔으며 특히 종친들의 시위패는 엄선하여 왕실 근위대로 사용했었어

하지만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po도륙wer... 살아남은 시위패들도 태종이 땅크로 밀어서 결국 해산&부대편입...;




20.jpg 

(인터넷에 떠도는 팽배수 그림 / ㅎㄷㄷ하게 고증 반영한 그림이盧;; 첨주형 투구에 찰갑... 무기는 환도를 채용한걸로 표현한듯 )



이들의 주요 무장은 원형방패와 찰갑or경번갑으로 방어하고 주무장으로 환도 or 검, 부무장으론 활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주무장으로 검을 사용했다! 라는게 요즘 전쟁사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어.


기록에 의하면 대 기병용 병종으로 탁월한 무공을 쌓았다라고 하는데 

창병도 아닌데 어찌 그랬는지는 난 잘 모르겠어

아는게이가 있으면 알려주시게나ㅇㅇ


참고로 지방군 소속의 시위패랑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거의 같다고 보면되ㅇㅇ

이건 밑에 지방군에서 설명할께~



대졸(隊卒)은 태종 1년인 1401년에 설치한 수문병으로서 광화문을 수비하던 왕궁수비대야

천인들 중 힘이 장사인 사람들을 추려 뽑아 편성한 병종으로서

세조 12년인 1466년 5위진무소를 5위도총부로 개칭하면서 별시위와 함께 5위 중 하나인 용양위에 속한 부대가 되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 부대는 1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교대로 6개월씩 근무하고, 근무자들은 전원이 체아직을 받는등

갑사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광화문을 지키는 병졸들을 통솔하며 출직 동안에는 사령군(使令軍)으로 근무하며

중앙군의 다른 군사들 처럼 입직과 순찰업무를 하며 도성의 경비력 보강에도 투입되었다고 해

인원이 많은것으로 보아 중앙군에서도 한가닥 했을거라 추정하며 주로 시위패의 팽배수와 비슷한 무장을 했을거라 추측해




파적위(破敵衛)는 세조 5년인 1459년에 꽤나 늦은 시기에 신설된 부대야

지리적으로 산악지대가 많은 조선의 자연 조건에 비추어 산악보병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따라 

오위 중 하나인 충좌위에 소속되었어.


중앙에서의 임무는 대부분의 오위 병종들이 참가하는 입직과 순찰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기술되었을뿐

임무가 규정되어 있진 않았나봐 어짜피 산악보병으로 창설된 부대인데 중앙에서 할일이 뭐가 있겠盧....


대졸과 다르게 파적위는 체아직이 배당되지 않았으며 품외이거나 종9품 이상일 경우에 정록을 주는 실직이였어.

대우를 못받는거 같지만 밑에 쓸 장용위보단 상위 부대야ㅇㅇ





장용위(壯勇衛)는 공사천,천인 가운데서 목전,달리기,힘겨루기 등의 시험규정에 따라 선발된 병종이야

병종이라고 해봤자 장용위는 사역군의 일종이라고 보면 편해


인원은 총 600명으로 120명이 6개월씩 5교대로 복무하고 복무하는 6개월동안은 15명에게 체아직을 주고

나머지는 1보씩 지급하였다고 해 


세조 10년인 1464년 기록에 의하면 노군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사역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것으로 추측된데




1409년 태종 9년 10사의 임무를 바꾸어 순위를 맡은 1사를 제외한 나머지 9사가 모두 시위를 맡게 되었으며  

1418년 태종 18년에는 12사로 증설해 왕궁의 시위에 치중하였다.


1422년 세종 4년에 다시 10사로 되돌아갔으며, 1445(세종 27)에는 또다시 12사로 환원되었어

이 사이 갑사를 주축으로 하는 중앙군에 교대제가 나타나고 양계갑사(兩界甲士)가 따로 구분되는 등 상당한 군제개혁이 있었어


하지만  1451년 문종 1년에 12사가 5사로 개편되어 중군에 의흥사,충좌위,충무사,좌군에 용양사, 우군에 호분사를 분속시켰어. 

그리고 이때 갑사 이외에 별시위,총통위(銃筒衛),방패(防牌),섭육십(攝六十) 등 중요 병종이 5사에 고르게 분속되었어. 

이렇게 만들어진 5사는 2사가 입직하고 나머지 3사가 출직해 3일마다 교대하도록 규정되었지.


5사로의 개편 목적은 고려시대 이래 진법체제인 오군(五軍),오진(五陣),오위의 5단위 전투 편성법과 평상시의 부대 조직을 같은 형식으로 만든다는 것이었어 

그리고 5사에 소속된 군사들은 모두 5교대제에 따라 근무하고 하번(下番) 때에는 거주지의 지방군체제에 속하게 하였지.

따라서 5사로의 개편은 국방체제 전반과 연관되는 새로운 군사 제도의 확립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해ㅋㅋ



조선 전기 중앙군의 핵심편제인 오위진법은 5사가 갖추어진 문종 초에 완성됬어

이에 따라 부대 조직과 전투 편성을 완전히 일치시킨다는 방침 아래, 1457년 세조 3년에 5사를 5위로 개편하였지

이에 자연히 삼군에의 예속 규정이 없어지고 군사들은 병종별로 분속되었으며, 이 변화의 결과가 거의 그대로 경국대전에 법제화시켰어

즉, 의흥위에 갑사와 보충대, 용양위에 별시위와 대졸, 호분위에 족친위,친군위,시위패, 충좌위에 충의위,충찬위,정병,장용위가 각각 속했지.


병력은 복무중인 상번의 군액을 기준으로 갑사 2,960명, 별시위 300명, 친군위 20명, 파적위 500명, 장용위 120명, 팽배 1,000명, 대졸 600명 등 

모두 5,500명이 주력을 이루었으며 그 밖에 정병 약 5,000명과 정원이 전혀 규정되지 않은 충순위,족친위,충의위,충찬위와 보충대가 추가될 수 있었어.




6.jpg




중위인 의흥위는 경기,전라,경상도를 방위하고 전위인 충좌위는 평안도, 좌위인 용양위는 충청도, 후위인 충무위는 강원도와 함길도(함경도)

우위인 호분위는 황해도를 방위하면서 지방군인 잡색군이 서포트하는게 오위편제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어.

각각의 위는 병종에 약간 차이가 있으며 병력 또한 차이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자세한 수치는 잘 모르겠어ㅇㅇ







그럼 조선 전기 중앙군의 핵심 군편제인 에 대해 알아보자







5.jpg


조선초 중앙군 편제인 위(衛) 간단하게 도식화 해봤는데 '위(衛)'는 사단의 개념으로서 1개의 위(衛)는 5개의 '부(部)'와 예비대인 유군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러한 위가 5개가 모이면 5위라고 칭하는데 오늘날의 군단급으로서 5위의 최고지휘관이자 책임자는 은 종2품의 겸직인 장(將)이 임명되고

(즉 정2품 도총관 종2품 부총관 정3품 당상관까지가 5위의 지휘관이 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 정3품 당화관인 상호군이 지휘를 해







11.jpg

(편곤은 임진왜란 이후 보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이글에선 그냥 설명하려고 넣어둔걸 밝힐께ㅋㅋ 

또한 조선초 기병은 두정갑이 아니라 찰갑 or 경번갑을 입었을거라 생각해ㅇㅇ)






'부(部)'는 4개의 '통(統)'이라는 단위 부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2개는 보병이고 나머지 2개는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어.

또한 각각의 통(統)은 주와 전으로 나뉘는데 주는 본대와 보조를 맞추면서 진형을 이루고 전은 필요에 따라 본대를 이탈해서 

추격,포위,매복,우회기습 등등 다양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기동부대의 역활을 해


12.jpg



그러므로 각 부(部)는 보주통(보병),보전통(보병),기주통(보병),기전통(보병)으로 구성되며 

통상작전을 벌이는 주통과 기동부대인 전통으로 구분되 


각 통(統)는 또한 5개의 '여(旅)'로 이루워지는데  하위 병력단위로 125명으로 구성되었고 여수의 지휘를 받아.

'여(旅)' 또한 5개의 '대(隊)'로 구성되는데 1개의 '대(隊)'는 25명으로 구성되. 또한 1개의 대'(隊)'는 5개의 '오(伍)'로 구성되며 오장의 지휘를 받아


또한 예비대인 유군은 예하에 5개의 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비대 성격의 5개 부대가 약 1,000~2000으로 파악되고 있어



22.jpg

이 군 편제에서 가장 핵심 단위는 '여(旅)'야


'여(旅)'의 편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총 5개의 병과로 구분되

이중 팽배수와 총통수의 경우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규정대로 편성해야되

나머지 병과인 궁수와 창수,도수의 경우는 상황에 따라 병력을 가감 할수 있으나

원래는 각 병과의 비율을 균등하게 배치하는것이 원칙이야




14.jpg 

( 조선 전기 기본 편제단위인 '여(旅)'의 기본 전술배치도야.

적이 돌격해 올때 총통으로 원거리 사격후 2차로 사수가 활을 쏘고 진형 앞까지 다가온 적을 팽배수가 막은후 3~4열에 있는 

창수와 도수가 팽배수와 함께 밀어내는 전술을 사용했어 )



원칙대로 편성된 '여(旅)'의 단위는 다음과 같아


총통수 1개 대(隊) - 25명 

팽배수 1개 대(隊) - 25명 

사수 1개 대(隊) - 25명  

창수 대(隊) - 25명 

도수 대(隊) - 25명 


규정 병력 125명이야


조선 중기와 후기에 들어서면 조선군 특유의 장병기 사용 위주의 군사훈련과 전술로 인하여 근접전 병력인 

팽배수,창수,도수가 줄어들었지만 조선 전기때는 일정 비율로 유지하고 있었어 


또한 조선 전기 군 편제의 특징인 보기(步騎) 혼성 편제와 운용을 중시하는점은

실질적인 작전 단위인 부(部)'의 편제는 위에도 설명했듯이 2개통은 기병, 2개통은 보병으로 편성하는걸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보여ㅇㅇ 




상황에 따라서 각 통의 병력을 가감하거나, 아예 형식적으로 해당 병과로 편성하고 다른 병과의 통을 규모를 증강 시킬수는 있으나

모든 통을 특정 병과로 일원화 하지는 않았어.


이는 전체 지상군 병력 중에 기병이 차지하는 비율이 40~50%에 육박할 정도로 기병전력을 중요시하는 조선군의 기본 사상과 일맥상통 하지ㅇㅇ









이처럼 강력하게 보이는 중앙군이 외적을 맞이해서 지방군이 시간을 벌면 중앙군이 격파하는 시나리오로 흘러갈거 같은데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여서 이 아닌 것에 의해서 조선초 군사력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매우 ㅅㅌㅊ에 이른다는 주장도 나와

나도 그기에 대체적으로 동조하는 편이야 그 점은 밑에 쓸 지방군 파트에서 알게될거야.


















자, 중앙군을 설명하면서 조선 개국당시 정국이 약간 불안정 했다는걸 약간 느낄수 있었을거야.


왕권이 약하고 정도전을 위시한 신권이 강했으며 당시 개국공신들과 종친들은 자신만의 강력한 사병조직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을 보호해야 됬는데, 중앙군의 10위에서 의흥친위군위 2개만이 중앙군으로서 운용할수 있었기 때문에 외적방비에 대해서는

개국 당시에는 지방군을 믿을수 밖에 없었어.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군은 수도와 왕실을 보호하는 금군과 함께 수도방비에 국한이 되었고

지방군이 조선의 전체 방위를 맡는 역활이 되ㅇㅇ


그럼 조선 전기 지방군에 대해 알아보기전에 잠시 조선 지방군의 모태가 되는 고려 지방군을 알아볼까 해

길어지겠지만 부드럽게 흐름을 한번 자세하게 집고 넘어가볼께!








고려시대의 지방군은 크게 2가지로 나뉘어 

주현군주진군


주현군과 주진군의 차이는 위치야!


주현군은 남도에 편제된 지방군이고 주진군은 양계에 편제된 지방군이지

위에도 한두번 나왔을텐데 양계는 특수행정구역이야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갖춘 지역으로서

행정조직상 남도지역은 일반 주,현,군이 설치되었는데 반해 양계지역은 방어주,진이 설치되어 군사적인 주진체제로 편성되어있어


14.jpg

(일일이 조직도 만드는게 와이리 힘드盧 ㅠㅠㅠ / 불펌하면 뒤진다...)



딱 봐도 주현군과 주진군의 병종차이가 심하지?

이건 양계지역의 군사적인 중요성에서 비롯된거야.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방 국경지대의 신개척지에 주나 진을 설치하였어. 주,진은 군사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행정구역으로서

주에는 방어사, 진에는 진장이 임명되었어. 한편으로는 주진 이외의 현령관이 임명된 현도 다수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청천강과 원산만 이남의 후방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어. 주진군 역시 남도 주현군과 마찬가지로 고려 성종때 조직의 정비가 이루워졌을거라고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18.jpg


주,진은 모두 성곽에 의해 둘러싸인 성곽무장도시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북방의 신개척지에는 축성과 함께 주,진이 설치되었으므로

주,진은 성(城)이라고 불리웠지. 여러 주,진은 안북과 안변에 설치된 도호부의 관할하에 있었어

서경은 도호부보다 상위의 도시였지만 몇개의 속현을 거느릴뿐 주진을 갖지 않았으므로 양계는 사실상 두 도호부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지.



17.jpg



고려사 병지편에 의하면 양계의 주진군은 남도지역의 주현군과 비교해 병종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고 병력수 또한 훨씬 많았을뿐만 아니라

지휘관인 장교들의 군액까지 상세하게 나와있어. 한번 찾아보는것도 잃어버린 역사라고 칭해지는 고려사에 대해서도 좀 자세하게 알수 있을거라 생각해.


무튼. 남도지역의 주현 중심의 군사도(軍事道) 편성과는 달리 양계지역은 모든 주진이 주진군의 편성단위였어.

이러한 사실들은 주진군이 주현군에 비해 보다 조직적으로 편성되고 있었음을 암시하지ㅇㅇ


위의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주진군은 두개로 나뉘는데 북계와 동계야.

북계와 동계의 병종이 서로 겹치는게 많아보이지? 아마 동일한 병종의 명칭을 다른명칭으로 쓴거라고도 추측하기도해

주진군에서도 서경에는 해군과 원정양반군한인잡류로 구성된 부대도 있었다고 하니 주진군의 범위 ㅍㅌㅊ?


나와있는 병종에서 초군(정용),좌군,우군,보창,영새 등이 주진군의 주력 병력을 이루웠으며 그 병력은

북계가 약 4만명, 동계가 11,000명이였데. 북계의 신기,보반,백정과 동계의 공장,전장,투화,생천군,사공 등 제군은

전투부대를 보조하는 부대로서 전체 병력은 75,000명이였다고 전해지고 지휘관인 장교와 누락된 병력까지 합치면

양계지역만 해도 총 병력 14만명으로 추산되니 국까들이 말하는 헬조선하고는 넘사벽인 병력운용력을 보이지



주,진에는 토착주민으로 이루워진 주진군 이외에 남도로 부터 번상된 방수군(防戍軍)이 존재해

(이해하기 편할까봐 한자 쓰는데 틀리면 쪽팔려서 어쩌盧 ㅠㅠ)


지방 주,현의 보승,정용이 개경으로 번상(番上)하여 6위의 보승,정용을 구성하고 그 가운데 일부가 교대로 양계의 방수에 동원되었어

방수군은 주진군과 같이 방어를 했는데 별개의 지휘체계하에 각각 주진군 장교와 방수장군의 지휘를 받았는데

주진군 장교가 서열상 중앙에서 내려온 방수장군의 지휘하에 놓여있었어




16.jpg


나름 ㅅㅌㅊ 치는 방어편제였지만 이 편제는 몽골침략기때 주,진들이 대부분 함락당하거나 섬으로 옮기면서 

육지로 나온 뒤에는 주,진간의 병속이 이루워 지므로서 주진체제와 그에 기반을 두웠던 주진군 체제도 붕괴되었지

주진군이 붕괴되면서 방수군의 번상도 단절되었어. 제5차 몽골침입땐 별초군을 빼면 주진군이나 방수군의 활동기록이 없는거 봐서는

양계지역이 초토화 되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는거지


이후에 양계지역에는 동녕부와 쌍성총관부가 설치되면서 원의 직접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원의 군사제도와 주,진체제가 혼합된 복합형태가 나오는데 이건 아직 연구중이라고 하니 한번 찾아보는것도 좋을거같아.



일일이 짤에 나온 편제에 대해 쓰고 싶지만 너무 길어지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번 써볼께

그럼 이러한 고려시대의 지방군 편제를 계승한 조선은 어떤 지방군을 편제하였을까?





7.jpg 




고려말 지방군인 주현군과 주진군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개편하게 되는데 바로 위에 만든 짤이야




조선 전기 지방군은 크게 3개로 나뉘는걸 알수 있어.


하나하나 설명을 하자면  


육수군은 일반 농민들로 구성된 지방군으로서 크게 나눈 3개의 지방군 중에서도 주력이라고 할 수 있어

각도에 편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육수군은 5개로 나뉘어ㅋ





8.jpg


영,진군(營鎭軍)은 영진유방군(營鎭留防軍)으로 태조 이성계가 설치를 한 편제야ㅇㅇ

영군과 진군으로 나뉘는데 진군은 첨절제사가 지휘를 하며 영군은 병마도절제사가 지휘를 해

기병 중심의 편제로 4번(番) 교대로 운영되며 양인 중 상류층에 해당되는 사람들로 편성이 되

이 양인들 중에서도 3결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자에게는 1호의 봉족(!)이 따로 지급되는걸 보면 조선초 기병을 육성하는걸

국가적 목표로 삼았다고 유추 할 수 있어.

(!! 봉족은 세조때 실행한 보법의 전단계로 보면 되. 군역을 지는 집의 경제를 도우는 보인이 붙어)


특히 조선 초기 기병은 2가지의 병종으로 나뉘는데중앙군을 설명하면서 중앙군 소속 갑사들이 중기병을 담당했다고 했지?

그리고 갑사 파트에서 조선 전기 기병 전술 운용을 알아봤는데 이 영진유방군은 확실한 궁기병이라고 말할 수 있어

영진유방군의 기병이 기사(騎射)와 추격,후방교란,우회공격을 하는 경기병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ㅇㅇ

자세한 수치는 안알려졌지만 영진유방군에 소속된 기병들만 해도 수만에 달했을거라 추측하고 있어


이들은 기본무장으로서 활과 환도를 착용하였으며 가끔 기병창을 사용했으며 경제력이 있는 자들은 기사(騎射)에 최적화 된 갑옷인

두정갑을 착용했을거라 추측하고 있어ㅇㅇ

(기병창을 이용하기 때문에 확실한 궁기병이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공격방식은 활을 이용한 투사공격이 주된 방식이기에 궁기병으로 분류해ㅇㅇ)



세종 15년 건주위 파저강 야인 정벌전 당시 조선군 총 병력 1만 5천에서 1만이 기병이였는데

그중 대다수가 이 함길도의 영진유방군 소속의 기병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걸 봐서는 조선초 주력 기병은 이 영진유방군의 기병이

대다수였을거라 생각해ㅎ


야인들의 대갈팍에 화살 넣어버리는 조상님들 패기 ㅍㅌㅊ?














9.jpg 


다음은 수성군(守城軍)인데 영,진군이 기병을 담당하는 지방군이면 이 수성군은 보병을 담당해ㅇㅇ

영,진군과 마찬가지로 4번(番) 교대로 복무하지만 봉족이 없어


이들은 중앙군의 시위대와 보조를 맞추면서 활동한 보병집단이야

주무장으로 보병용 비파형 창과 부무장으로 환도나 활로 무장하고 있다고 전해졌어

이들은 봉족이 없어서 자비로 무장해야 됬기 때문에 갑옷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면피갑이나 가죽갑옷으로 무장한 경보병 역활을 했다고 추측하고 있어ㅇㅇ




시위패(侍衛牌)는 간단하게 말해서 귀족들의 사병이라고 생각하면되

위에 중앙군을 설명하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했지?


지방에 있는 신진사대부들 또한 이러한 사병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이러한 사병들을 모아 편성한것이 바로 시위패야ㅇㅇ

뭐 정종이 먼저 시위패를 혁파하려고 하였지만 완전한 혁파는 태종이 영,진군에 편입시키면서 되

태조 당시에 이 지방군의 시위패들은 잘 정비되어서 중앙군과 비슷한 수준의 무장을 보였다고 추측하고 있어 

하지만 숫자가 영진유방군이나 수성군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큰 역활을 했다고는 기대하기 어려워





수호군(守護軍)은 특수지대를 방어하는 군으로서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함길도나 평안도,하삼도(충청,전라,경상) 같은 외부침입세력이 자주 출몰하는곳에 만든 군이야.

일종의 향토방위대라고 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 편제야


또한 다른 말로서 조선시대 능묘를 수호관리하는 능지기를 일컬는 말이기도 해

대부분은 수호군이라고 하면 이 능지기를 일컬어ㅇㅇ




10.jpg


잡색군(雜色軍)은 예비군으로 생각하면 편해

1268년 고려 원종 9년 이후 잡색군에 관계된 기록이 몇몇 발견되지만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어.


조선시대 들어와서야 태종때 설치되었는데 조선 전기의 지방군은 영진군과 수성군이 주력이였지만 이는 해안지대와 변경을 중심으로 설치된 진이나 

도절제사가 있는 내상에만 주둔하였고, 대부분의 내륙지방에는 군대가 없었어. 


명나라의 압박으로 인해 정규군을 제외한 광범위한 동원태세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정규 군역 부과자 이외의 각계 각층의 신분은 망라해서 뽑는데 징병되는 신분은 양반,서리,잡학인,신량역천인,노비,전직관료,교생(농민은 제외되)이고

 향리,향교학색,공사천, 현직관리와 전직 3품 이상인 관리들을 제외되, 즉 거의 모든 계층에서 징집되는 예비군이지ㅇㅇ


편성은 25명을 1대(隊)로 하였으며 수령에게 징병과 지휘 권한이 있어.

징벌 대상자가 원하는 바에 따라 기병,보병으로 편제되었으며 10인 단위에는 소패,50인 단위에는 총패라는 지휘관을 두었어ㅇㅇ

하지만 세조 이후 전국을 군사조직으로 묶는 진관체제가 완성되면서 군액을 파악할 때 조차 포함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져 유명무실해졌어 



이름이 잡색군인 이유는 조선군은 색(色)으로 부대가 구분이 되도록 군복을 맞췄다는 기록이 있어

잡색군은 의복이나 기타 옷들의 색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해서 잡색이라고 불리웠다고 해ㅋ


이들의 무장은 농기구를 개조한 무기로서 농민들이 잘 다룰수 있는 무기들로 무장하였다고 알려져 있어

위의 수성군 처럼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무기와 갑옷이 있었기 때문에 

얼추 무장을 해서 나름 ㅍㅌㅊ의 농민군이 되었을거라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3개의 지방군 중 하나인 익군은 특이하게 평안도와 함길도 등 국경지대에 편성되어 있는 군 편제야 

농민군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상비군의 성격이 매우 짙어서, 둔전병이 특화된것이 바로 익군이라고 생각하면 매우 편할거야 


익군의 유래는 1274년 고려 충렬왕 1년에서 부터 시작해

원의 강요로 인해 실시된 제1차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 당시 원의 익군체제를 도입해 

중군,좌군,우군등의 3군을 조직했던것이 익군의 시초라고 할수 있어



그 뒤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의 익군 조직은 원의 영향 아래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고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병관(兵官)이 배치되면서

함께 편성되었던 것이.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전개하면서 보다 새롭고 강력한 군사조직의 필요성 또한 절실히 대두되었어.


특히, 양계(兩界)지역의 경우 원의 지배로부터 수복했다고는 하지만 고려 초 주진군(州鎭軍)의 핵을 이루던 초군(抄軍)·좌군·우군의 결여로 실질적인 통치력이 전혀 미치지 못한 데다가, 점증하는 원의 군사압력으로 원과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데 따라 익군이 설치되었지


향군의 성격을 띤 민병이니 징집후 군사훈련을 시켜 단기간 영내에 두었다가 일이 없을땐 귀가 시켜서 농사일을 보게하고

유사시에는 소집하여 종군하도록 하였지만 

1378년 우왕 4년에 전국 각 도에 설치를 하였으나 귀농을 잘 시키지 않는 등의 폐단이 많아져 이듬해 폐지하였어



1392년 태조 1년에 고려 말의 군목도체제(軍目道體制)를 계승해 서북면에는 평양도에 10익,안주도에 10익,의주도에 4익을 합해 총 24익을 설치하였어.

익마다 천호 1인이 배치되어 평시에 사졸을 훈련시키거나 또는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에는 출격하는 체제였는데 1407년 태종 7년 군목도의 변천은 알 수 없으나 전체 14익으로 편제된 것으로 보아 새 익군의 편성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어. 1424년 세종6년에 평안도, 1425년에 함길도가 군익도 체제로 변경, 정비되었어.


이것은 각 익에 속하는 군현의 다소가 같지 않고, 군액이 고르지 못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조처로서 시행되었는데, 즉, 평안도의 경우, 전도를 평양도,안주도,

의주도,삭주도,강계도 등 총 5군의 도로 나누고, 각 도는 중익,좌익,우익으로 나누어 각기 소속 군현을 거느리게 하였어.


이때가 바로 익군이 지방군의 주력부대였어.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평안도 전군액의 67.5%, 함길도 전군액의 75.1%가 익군이라는 사실은 이를 증명해

이에 따라 북방 양도의 모든 수령은 각 군익도 아래 군사직을 겸임하는 체제, 즉 행정과 군사가 일원화되는 직책으로서,익군 역시 그러한 범주 내에서 조직됬지


토착적 성격이 강한 지방 토호들을 천호,백호,통주로 임명하여 관장하였으나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여 세종때 군익도체제를 완성시키면서 

군익도체제의 주력부대로 자리매김 하였지만, 1455년 세조 1년에 북방 양도의 익군은 시위패와 통합되어 익속정군(翼屬正軍)으로 편제되었다가

1459년 다시 남방의 정군,시위패와 통합되어 정병으로 합칭되는 대대적인 개편과정에서 익군은 소멸되었어



















13.jpg 

(문제되면 사진 자삭하겠음)



마지막으로 기선군은 수군이야


고려말기 1387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예성강에 설치한 선군(船軍)을 조선이 계승한 편제야.

고려시대엔 큰 강유역에 '포'를 설치하여 하구연안을 방어하는 목적이 짙었던 반면에 고려멸망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해안과 연안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바뀌면서 하삼도,강원도,황해도에 대규모로 해군기지를 신설하게 되ㅇㅇ



왜놈.jpg 



수군도절제사가 최고 지휘관으로서 지휘를 하고 각 요해처에 '포'를 설치하여 도만호,만호,천호 등이 지휘를 했어


양번 교대료 복무하였으 신량역천으로 신분이 격하되었어

그로 인해 기선군으로 복무하는걸 꺼리게 되는 경향이 두드러졌어ㅇㅇ


나중에 성종때 경국대전이 편찬되면서 전반적인 개혁이 일어나면서 기선군은 수군으로 바뀌면서 기선군이란 명칭은 사라지게 되



사실 조선 초 군선들은 사실상 전선(戰船)이라기 보단 수송선에 가까운 개념이였어

평상시에는 세곡 운반선으로 쓰이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곡식 대신 병사를 싣고 전장으로 달려가는 용도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야. 그 이유는 왜구의 출몰과 관련이 있는데 공민왕 이후 고려의 안보에 왜구와 홍건적이 대두되었는데

홍건적이야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홍무제 주원장이 마치 홍어를 땅크로 미는 전땅크와 같은 패기로 밀어버리면서 사라졌지만

왜구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는데 고다이고 일왕(천황)과 막부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일본본토가 남북조 분열의 시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대규모 유량민이 발생했어

이중 상당수가 대마도로 유입되면서 가뜩이나 살기 팍팍한 대마도에 부담을 주게 되었지


23.jpg 


간간히 해안지방만 소규모로 약탈하던 왜구놈들이 숫자가 불어나니까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내륙에 상륙하는 패기를 시전하면서

대마도는 단순한 해적 본거지가 아닌 한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수 있는 적대적 군사세력의 주둔지로 탈바꿈하게되ㅇㅇ



24.jpg



때마침 최무선이 화포를 발명함과 동시에 이를 활용한 금강전투에서 마치 천년전 왜놈할애비들이 뒤진것처럼 자기들도 수장되는 참패를 당해. 

韓민족을 화력덕후의 길로 인도한 선지자 고 최무선 장군은 화통도감에 근무하며 총 17총의 화약병기를 개발하게 되지만

아쉽게도 조선왕조에는 발탁되지 못한채 눈을 감게 되고 그의 아들인 최해산이 발탁되면서 세종 치세에 막강한 화력전력을 가지게 되ㅇㅇ




최무선.jpg

( 야이 왜놈새킈들아 내 지금 당장 화포를 끌고가서 네놈들 대갈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군선은 맹선(猛船)으로서 대,중,소 세종류로 구분이되 

맹선은 30~80명 정도가 탑승 할 수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뿐 그림이 남지 않아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


맹선 예상도.jpg

( 맹선의 예상도 )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 있는 조선 전기의 군선은

대선,중대선,중선,병선,쾌선,맹선,중맹선,별선,무군선,왜별선,추왜별선,추왜병선,추왜별맹선 등 13종 총 928척을 보유하고 있었어

이중 화포를 탑채 가능한 군선은 대선,중대선,중선들로 이중 대선은 80명이 탑승 가능했어.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단종) 세조는 앞선 선왕들과 달리 화약병기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다가 

왜구의 노략질 또한 대마도 정벌 이후 소규모 단위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화포를 탑재할 수 있는 대형군선 보다는 

도망치는 왜구를 추격하여 포획 할 수 있는 소형군선을 요구했어


그 결과  조선 전기 평화가 계속되면서 자연적으로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대형군선들은 해체되었고

기존에 있던 선박들은 전투가 아닌 세곡운반용으로 활용되면서 조선 수군력은 정체기를 맞을수 밖에 없었고

중종 치세에 들어가서야 부랴부랴 수군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지ㅇㅇ



하지만 우리가 일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조선 전기 기선군(수군)에 관한 자료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어

2008년에 조선 전기 충청도 육-수군 편제/무기/전시임무에 관한 고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뒤로는 잘 모르겠盧...;;



































이로서 조선 전기 군 편제와 군사력에 대해 대충 알아봤어 

여기까지 읽다보면 뭔가 깨름직한 사실이 떠오르는 게이가 있을거야



반은 보병이고 반은 기병인 것인가...???




맞아 



조선초 조선군의 군 편제는 기병과 보병이 1 : 1~1.3 인 괴랄한 편제였어.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정착왕조)의 군편제상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1 :  6~8의 비율이고 

유목민족의 경우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1 : 2~4의 차이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유목국가중 티무르의 경우는 예외로 하자)




조선 개국과 전기에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나뉠수 있어


첫째는 당시 조선초 조선군의 주적은 여진,왜구 였어

특히 여진족은 유목민족으로서 기마실력이 ㅅㅌㅊ여서 당시 함길도에 주둔한 조선군을 회전을 통한 전투방식이 아닌 

기병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을 이용하여 괴롭혔어 



특히 이 여진은 고려 중기 윤관이 별무반을 창설하는 가장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므로 충분히 계연성이 있는 이유라고 생각해.

고려 조정에서도 기병을 육성하는데 큰 힘을 들였으며 귀족들의 사병 또한 기병으로 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고려를 이어 한반도의 주인이 된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런 풍족한 기병 자원을 '아낌없이 이용할수 있었다' 라고 생각해

여진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침 세력중 대다수가 유목민족이였던 점을 고려하면 고려와 조선왕조의 기병사랑은 당연한거 같아


왜구 또한 수군 발전과 화약병기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지

화약병기의 발전으로 인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소수의 군을 이끌고 대규모 여진군을 막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실패했다고는 하나 대마도 정벌로 인해 명종 이전까지 대규모 왜구 침략이 없었지ㅇㅇ

그 결과 조선 중기에 조선이 헬조선으로 바뀌는 사건이 터지지만;;;




둘째는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국가가 육성했다는 점이야

말을 육성하면서 소대신 경작에 사용하기도 하며 전시땐 군마로서 사용가능한 일거양득을 노린 정책이라고 평할 수 있어ㅇㅇ

이 정책으로 인해 세종 시대에 전국토에 저수지 등 농업장려정책과 함께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며 세계 2위의 농업대국으로 발전

( 이건 팩트가 있는데 나중에 글로 써볼까함ㅇㅇ )

자세하게 들어가면 전쟁사에서 벗어나 경제사와 문화사까지 포함될거같으니 더이상 쓰지 않을께 

이점은 게이들도 아마 인정할거라 생각하는데 만약 다르다면 꼭 댓글로 알려주길 바랄께!












이처럼 조선 개국에서 조선 전기까지 조선의 군사력은 동아시아에서도 수준급이였어

비록 이 글에서는 조선만 다루웠지만 다음글은 조선이 건국하고 급속도로 사이 나빠질뻔한 명나라에 대해 써볼까해


자료와 짤등 구체적인 자료들을 갖추고나서 쓸께!






여기까지 쓰는데 만 2틀이나 걸렸盧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까지 이 긴 글을 읽어줘서 고맙다 게이들아ㅋㅋㅋ





3줄요약


1. 조선 건국~전기 당시 조선군은 동아시아 ㅆㅅㅌㅊ 군전력을 지닌 국가

2. 성종 이후로 망조가 들어섬

3. 조선 전기는 헬조선이 아니였음 

 













참고문헌,자료


車文變,「束伍軍 硏究」,『朝鮮時代 軍制硏究』, 檀國大 出版部, 1973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편,『韓國軍制史』, 陸軍本部, 1977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1 

이세영, 『한국역사입문』, 풀빛, 1996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96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9』, 국사편찬위원회, 1996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3』, 국사편찬위원회, 1994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집부, 《한국사 23》<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국가편찬위원회, 2000

김돈,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솔, 2002

강만길, 《한국사7》<중세사회의 발전>, 한길사, 1995

한국중세사학회, 「군사제도」,『고려시대사강의』, 늘함께, 1997

정경현 외, 「군사조직」, 『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장동익,「고려전기의 선군」, 『고려사의 제문제』, 삼영사, 1986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1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