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미국 시민권 관련 미국헌법 헛점 지적한 아스퍼거썰, 만화로 치면 요런 느낌
ㅡ"박사,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한 빈틈을 지적해서 칭찬이라도 받고싶었나? 우리가 그걸 몰라서 말을 안 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지금 한 일을 봐. 아무런대안도 없이 우리가 힘들게 일궈낸 최선을 부쉈지. 세상에완벽이없다는건 우리도알아. 하지만 무언가 생산하고 개선하기 위해 쌓아올린 우리에비해 당신은.. 그저 작은 헛점을 발견해내는 데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지적해서 무너트리는 게 정의라 생각하며 사회적인 혼란만 유도햇지. 당신이 지금 만든 세상의 꼬라지를 보라고.."
소유와통제-불확실성 범죄 카지노 게이
소유욕과 불확실성은 또 뭔상관? 오 /쓸거많다
'나'의 정의를 인식 속에서 통제가능한 것들, 요컨대 고정가능한 것들로 둘 수도 있지않을까. 기본적으로 모든게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것들인 세상속에서
그게 언제 범죄로 이어지는걸까?
"왜 행복도 성욕도 소유도 영원하지 않고 정착될 수 없을까?
만족하고 채워지면 그곳에서 개체는 멈추는 것을 답답해하기 때문이야
인간은 기본적으로 계속해서 인식하려는 운동의 욕망이있거든. 그래서 만족하고 채워져도 맴돌려고 움찔거리는 것이지
그것이 세계에의해 무너지든, 스스로 넘어서고 다시 나아가든
진짜 우리가 가야할 곳이 저 너머에 있기 때문이야
난 그렇게 봐. 현자타임이든 고통이든 전부 지금의 상실과 불가능이 전부다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한 이정표이지
그러니 매순간 새롭게 배우고 나아가는 거야 그 과정에서 매순간 고통과 쾌락, 권태의 진자를 반복하며..(권태가 진자 운동의 딱 중심의 포텐셜최소점)
욕망 또한 새롭고 더 어려운 시도속에서 '과정에서의 배움'이 목적이지, 결과와 달성 자체가 목적이 아니야 그 채워짐의 결과 자체에는 어떤배움도 없어. 그 전후의 경험과 깨달음이 중요한 거지.
단지 새로운 시야의 트임이라는 재료의 공급만이 있을 뿐, 배움과개선의새로운시행착오가없는 충족과 달성은 공허하고, 단지 정지일 뿐이야
배움없는성공의끝보다, 배움이있는실패의연속이훨씬가치있다고 생각해."
"언어는 불완전해. 우리가 살고, 또 보고있는 세계도 그렇고.
그러니 신이 완전하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해.
단지 우리가 신에게 알아서 찾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지. 그래서 신이 인간을 '기다린다'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신의 현현을 기다리는 게 아니지.
완전함이 불완전함에 들어오는순간 불완전한게 되니깐 그건 불가능해.
또는, 신이 이미 무언가 말하고 작용했지만, 그 결과 불완전하고 유한한 현실에서 찌그러지고 신성이 오염된 형태로 현현되느라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 한 것일 수도 있지
때때로 신의 영혼이 깃든 것처럼 말하고 이유없이 나를 돕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거든"
"혼돈이 너를 파괴하는 게 아니야. 너가 혼돈을 이용해 기존의 너를 부순 뒤 혼돈 속에서 새로운 너를 만들어나가는 거야.
너를 부수고 뒤흔드는 고통으로부터 배우고 창조한다면, 변화하는 자로서의 너는 결코 부서지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삶에 누군가를 퍼즐로서 고정된 형태로 포섭시키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건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혼자 살아가겠노라는 객기는 아니야.
혼자서는 그저 내 동일한 인식만 반복될 뿐, 아무것도 못 배운다는 걸 알게됐거든.
차이로부터 파괴와 재창조를 겪는 등 배우기 위해서 타자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야 해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배움도 겪고, 때로는 행복도 슬픔도 붕괴도 겪어
무언가를 특별히 평가절하할 필요도, 집착할 필요도 없어
ㅡ소설속 우로보로스와 카두케우스 우화(데미안처럼 설화 상징) / 우로보로스는 2차원적인 시지프스의 반복, 카두케우스는 3인칭 타자의 시선을 하나 더 찍어서 변화의 상징이 됨.
세계의 고통을 물질적으로만 환원시켜 이해하는 자들은 물질과 에너지 세계를 지배 및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이어가게 되고, 그것은 다시 물질세계에 종속되므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요컨대 물질적인 세계관 속에서 신이 되려는 자는 바로 그 물질세계에 의해 구속된다.
그래서 부처의 그노시즘은 물질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지'가 근본적인 제어장치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이다. 물질세계에서 물질세계로인한 고통을 통제하고 무언가 소유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미몽에서 깨어나게해주게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러한 탈-물질 연습은 결국 자아의 해체를 반드시 수반하게 되는데, 이유는 우리의 자아를 규정하고 있는 관념들이 전부 물질 세계에서 비롯된 형상들과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생전에 물질세계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는 별개이다. 실제 완전한 분리보다는, 그 기원을 다르게 인식함으로써 우리 정신의 물질세계에의 시선을 내부로 돌린다는 방향의 전환에 의의가 있다.
사랑이란 내 세계와 서사, 인식에 포섭시켜 고정해두고 소유하거나 그 불확실한 동요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와 똑같이 자유의지가 있고 스스로 생각하는 동일한 한 명의 인간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자기자신의 좁은 인식과 세계를 허물고 세계 전체를 하나로 여기려는 인식의 지평에의 확장이다. 그것은 나의 테두리를 비움으로써 더 넓어지는 일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변화까지도 사랑하는 일. 그럼으로써 나도 같이 더 넓은 세계로 흘러가는 변화.
고통에 하늘을 원망말고 그것이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어떤 새로운 나의 인식가능성을 만들어내는지를 본다.
지배의 악마인 마키마는 자기 스스로의 통제욕까지 지배하지는 못 했지.
현실 세계의 모든 우월성은 자기역설적이야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자는 자기자신도 파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면 '시간'을 도입해야 하지.
'언젠가는 그렇게 할 거야'라는 자기소멸의 약속을 수행해야만 해.
그러면 모든 존재는 결국 자기 우월성 위에 '유한성'과 '시간'이 군림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거야.
진화론과 창조설의 공생 관계
만약 신이 일일이개입하고 통제해야한다면 그것은 전부통제하고 전지전능 해야한다는 제약에 스스로걸린 것이므로 불완전하고 구속된것이겠지
신은 완전함이라는 긍정이 아니야. 정확히는, 모든불완전함의 상실이자 부정으로서 최후(최초)에 남는 완전함이다. 모든 신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의 비가역적인 상실이 곧 신이야. 그러나 그 과정의 역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시간 속에 박제되고, 그것이 신을 최후에 실제로 구성하게 되지. 요컨대 신은 최초에 내용없는 신이었고, 그 내용의 구성이 곧 역사이며 최후에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게 돼.
ㅡ부정신학, 과정철학 어쩌고와 유사하군요.
ㅡ내말은.. 이걸 신의 존재 근거로 삼아 무언가 증명하려는 게 아니야. 진화론은 자기충족적인 측면이 있고 창조설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을 덮지 못 한다는 점이야. 그러나 창조했다면 그건 생명을 하나하나 창조했다기보다는, 수학적 원리로서의 물리세계와 생명의 자유의지, 네겐트로피의 자유에너지 최소화 본성, 신과 이데아로의 회귀라는 귀소본능 자체를 처음에 창조한 것이겠지. 그러나 그건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창조한 게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로고스로서 그 창조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거야.
중요한 건 진화론이든 뭐든 그것들 저마다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수용하고, 그 사이의 절충을 찾는 게 아닐까.. 우주론도 우주의 시작과 시작 전, 결말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못 하고, 신학적이거나 신화적인 요소ㅡ우로보로스나 슈타게의 시작과끝의프롤로그ㅡ가 여기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어.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우리는 우주론을 버릴 필요는 없겠지.
"우리가 도달해본 적 없는 미래나 외부의 가상적인 무언가에 이끌리고 나아가려는 성질이 있는 것이 왜라고 생각해? 우리의 육체는 이곳, 지금 여기에 있는데도 말이야. 난 이것자체가 심신이원론의 근거라고 생각해. 육체는 유한하고, 그 안에 갖힌 무한한 정신이 유한한 생각을 만들어내지. 하지만 영혼의 기원 자체는 무한이므로 이곳에 구속되어있지 않아. 우리가 무언가 지금 눈앞이나 현실에 없는 것, 그 너머의 것을 원한다는 미래시에의 본성 자체가, '여기에 없고 가보지도 못 한 곳'에 대한 아이러니한 귀소본능이 우리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다는 나의 심증이야.."
소유가 아닌 learn의 관념으로 바라봐야 집착도갈망도 욕구불만과 열등감도 사라진다
learn은 개선의가능성이라는 관념이며, 관계나 욕망의 소유가아니라 경험과 진보의 기준이된다
즉, 소유가 아니라 변화로써만 그 소유라는 자기 강박, '소유하고자 하는 나를 그 집착을 통해 소유해버린 소유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딜레마와 내적갈등을 낳는지에 대해서는..
'원래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임을 안다면, 내 기원 자체는 무한한 정신임을 안다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나의 소유가 될 수도 나의 소유였었지도 않음을 안다면! 그러나 내 육체는 매 순간 그 이상에 반론을 제기하고'
욕망은 쾌락에의기대인동시에불안과공포의 근원이기도해서
후자쪽이 더 클때는 오히려욕망과집착을 내려놓는것이 행복이되기도하는것이설명된다
모든쾌락은예측과기대, 즉 미래시라는 시간관념을동반한다는것이 키포인트다
1초뒤에그것이 전부사라지고 고통이남는것을 육체가 처음부터 알정도로 현명했다면, 그 잠깐의 환락에 속는일은없었을것이다..
변화와 시도라는 불완전한 과정은 crippy, weird해도 돼
창피와 시선을 두려워하며 완벽한 현재에머무르는것보단, 망신창이가 되고 잠깐 망가진 모습으로 비웃음사는 나아감과 시행착오가 더 나아
양이 잡아먹힌 뒤에 늑대와 정신 속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대화할 수 있게 됨 이해도 할 수 있게 되고..
"혼돈처럼 보이는 두려운 것들은.. 사실 수많은 질서들이 골고루 흩어진 평형에 가깝대.. 그러니깐 나는 너에게 삼켜진 뒤 오히려 더 큰 질서 속에서 안심이 돼.."
고통을 피하기 위해 확실성과 안정성을 강박적으로 좇다보면, 불확실성이 주는 재미 역시 포기해야 한다는 아쉬움
그러나 재미를 위해 확실성과 안정성을 걷어차면 이번에는 그것이 다시 그리워진다는 점에서 인간은 어쩔도리없이 간사하고..
부정이란, 배제가 아니라 약화라고 생각한다.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서 경계를 주무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느슨하게 여러 논의를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은 지배와 제거를 위한 약화가 아니다.
놀람은 타자를 내 예측에 포섭시켜 수정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나를 수정하여 타자와의 합일로 나아가는 계기여야 한다. 이건 고정된 나에 타자를 포섭시키는 것도, 고정된 타자에 나를 포섭시키는 것도 아니라, 처음부터 그 둘을 포섭하고 있었던 새로운 실체 속 가능성이 드러난 곳으로 나아가 더 나은 나를 모색하는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되기'를 상상으로 해볼 수 있고, 그것은 다른 나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해주거나(외부로의 여행), 또는 지금 내가 유일하고 필연적인 나인지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정체성 붕괴를 수행하게 해준다. 후자의 경우, 그 '다른 사람 되기'는 시간이 수행한다. 시간은 매 순간 지금의 나를 미소 단위로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에 의해 비로소 인식될 정도로 많이 변화했을 때 나는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 내가 '전혀 상상해본 적 없었던 나', 또는 '원래의 나와 아무관계 없었던 외부세계의 무언가'가 되어있을 때, 그것이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반가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인식 바깥을 '내가 아닌 것'으로 정해두고 그것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 변태 없이 지금의 우리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것에 대해 불쾌해할 이유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사람 되기'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타자와 서로간의 괴리를 극복하며 평형에 가까워지도록, 저마다의 모난 부분들을 시간에 갈아 뭉툭하게 만들게 된다. 시간과 엔트로피는 고통을 주기 위한 처벌이 아니라, 우리의 저마다의 '개체성과 인식의 자기독단, 타자에 대한 무지와 확신'이라는 원죄를 갈아서 뭉툭하게 만들고, 평형(최대엔트로피=우주의 끝)으로 인도하여 죄를 전부씻어주기 위한 장치이다.
엔트로피=원죄 / 우주의 종료인 최대엔트로피(Page time)에서, 엔트로피 최소화 본성이 있는 '생명들'이 엔트로피 0의 최대 대칭이자 평형인 진공('하나'의 정신)에서 종료되는 것은 죄의 청산을 의미한다. 이때 최대 엔트로피로 남은 디아크는 모든 기록을 모든 시점에서 담은 아카식 레코드로 남는다.
연기와 그노시즘 vs 역사의 '끝'
1ㅡ내가 그노시즘 계열이나 불교의 해탈론 등에서 느꼈던 막연한 불쾌감은 '일부가 스스로를 구원할지언정 나머지는 현실에서 깨달음 등의 부재와 집착으로 인해 영원히 남아있음' 이라는 이원론적 구역 분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선별적 구원을 긍정하며 '어쩔수없는 것'으로 말하는 선민의식이 나는 싫었다. 내가 기독교의 천국-지옥 영원분리론에 반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2ㅡ요컨대 그것은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확실하게 끝나고, 그 어떤 죄많은 사람도 물리적인 대가로서의 속죄 또는 대속에 의해 마지막에는 구원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나의 바람때문이었다. 나는 직업의 특성상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자기정당화와 함께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놓고 아무런 성찰도 하지않는 사람들을 매 순간 봐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조차 세계의 끝에서는 비로소 영혼으로서 정화되어 구원될 수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도대체 왜 태어났고 왜살아가야하는가? 그리고 나조차도 어쩌면 그들과 같이 내 죄에 대한 무지와 오만에 갖혀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또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내가 더 낫다는 무지와 오만과 확신, 자기인식과 자기관점에의 안주가 바로 나의 죄였다.. 나는 그곳에서 새벽마다 걸으면서 저들이 바로 나 자신의 또다른 영혼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와 그들이 같은 이유로 이 지옥에서 역사를 수행한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나 대신 그곳에 갖혀있었지만 나는 직업 윤리도 버려서는 안 됐었고, 결국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친절과 감내, 타인의 입장에 대한 고려와 사랑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그들의 세계에 깊이 침잠하는 수준이지 않기위해서 스스로 경계하는 것도 무지 어려웠다.
3ㅡ설령 지옥을 상정한다해도, 지옥에서조차 희망만큼은 허용되어야 한다. 희망을 원론적으로 부정하고 여지를 주지 않는 완벽한 영원의 고통이, 요컨대 세계의 불완전함 너머에 있는 완전한 영원의 영역에 그런 사악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상상이 나를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낙담하게 만들었고, 수학으로 그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를 보이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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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무슨 쓸모가 있는 건데? 이 질문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단계에 돌입할 정도로 나의 생각들이 정교하지도 않고, 어쩌면 내 말과 결론이 아니라 언어화되지않은 내 삶 그 자체야말로 그 쓸모의 끝없는 고민이 그린 궤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이 카드는 이런 설명이고 이 카드들로 이런 게임이 굴러간다 정도만 나는 말하는 편이다.
나는 무언가 남들이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무쓸모에 대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학습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인 쓸모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무쓸모에서 편안함을 누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나는 둘 다인듯 하다.
무쓸모인 것들은 마찬가지로 무쓸모인 나라는 인간에게 '여기 아무 쓸모없이 존재해도 된다'라고 말해준다. '무쓸모인 우리를 읽어주는 것으로도 쓸모가 있는 인간이군', 이렇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반대로, 쓸모있는 것들은 그걸 읽는 것만으로도 매 문장마다 내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래서 넌 어떤 쓸모가 있어?', 하고. 그것들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와 읽기에 굳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소외된 자들을 읽는다. 나 또한 소외된 자이기 때문이다..
ㅡ부분적으로, 무작위적으로 읽기. 나는 책을 펼치면 단 한 문단조차도 순서대로 읽을 수가 없어서 페이지와 문장을 뒤죽박죽 무작위로 읽는다. 물론 문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ㅡ> 가끔씩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같은 장광설 소설의 경우 언어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느낌', 착란과 혼란한 생각의 폭주로 읽혀서 읽는게 좀 편하긴하다.
ㅡ몬테카를로 방법이 떠오르기도 하고, 자연의 최대 혼돈(극대 블랙홀의 지평선 양자계 SYK)은 현실에서는 모방할 수 없는 완전한 랜덤의 무작위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보를 섞는 속도가 우주에서 제일 빠르다고 한다. 그리고 최고 한계 속도로 그 모든걸 골고루 펴바른 평형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니깐, 나는 정보를 무작정 빠르게 섞어서 평형의 거대한 하나로 만들려는 추상화의 본성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읽기 방법이 정말로 병신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건 내 뇌가 인간으로서의 통제를 잃는 순간 무의식에서 비로소 자연의 부름에 이끌리기 때문인지도. 그러나 거기서 국소적인 무언가를 특정하고 뽑아내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내용을 쓰기위해서는(혼돈ㅡ>질서화) 다시 의식을 붙잡아야 한다(인간의 네겐트로피적 인식). 그런 인간의식의 켯다껐다의 과정이 도대체 어떻게 제어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이.. 남자는 태어나서 딱 3번 운다.
1. 헌터헌터 개미편 엔딩을 봤을 때..
이상임 ㅅㄱ
내일은 자구일어나서
내가 수학연구하면서 짠 SF세계관 구상 자료랑 최근에 쓴 플라톤주의 수학/물리/인식 관점에서 분석한 똥글 올릴게
뭔가 좀 지금 내머릿속에 얽혀잇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랑 강박을 비워내야 새로운 게 많이 보일 것 같아서 다 비우는즁








